고 문송면군 장례위 활동보고서 및 자료집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 1999년 7월 9일) 이영기(노동자역사 한내 자료국장)  <1989년 7월 9일.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 발간> 1988년 7월의 고 문송면군 투쟁은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직업병을 사회문제화한 투쟁으로 의미가 크다. 1973년 충남에서 나고 자란 문송면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야간고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 영등포로 상경, 협성계공에 입사했다. 협성계공에서는 문송면 또래의 소년들이 온도계, 압력계 등에 수은을 주입하고 신나로 제품을 닦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문송면은 입사 한달 만에 수면장애, 두통, 식욕감퇴, 허리통증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고 두달 만에 휴직, 석달 만에 수은 및 유기용제(신나 등) 중독증을 진단받았다. 그리고 입사 7개월, 발병 6개월만에 사망했다. 15살 소년의 수은 중독 사망이라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벌여졌던 기업주, 의료인, 노동부의 산재은폐와 책임회피가 사회 각계 각층에 충격을 주었고 산재문제, 직업병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회사는 수은, 신나 등 치명적인 유해물질을 필수로 취급하면서도 유해물질에 취급에 필d한 안전 작업환경은 커녕 환기, 환풍 등 기본적인 환경도 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을 일하게 했다. 다루는 물질의 위험성도 알리지 않았다. 발병 후에는 개인책임이라고 몰아세우며 책임을 회피했고 산재신청에 필요한 근무사실 확인 날인조차도 해주지 않았다. 사건이 사회문제화 된 후에도 진상조사를 방해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수은중독이 아닌 의료사고다’, ‘장례위원회가 3천만원을 가로챘다’ 등의 흑색선전에 몰두했다. 노동부는 그 해 1월 집단검진을 실시하고 수은중독환자들을 확인했음에도 무려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임시건강진단 지시만 내리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4월 문송면군의 산재신청은 사측의 사실확인 날인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하고 수은중독 진단 후에도 역학조사, 정밀진단을 핑계로 산재요양을 지연시켰다. 5월에 이 사실이 신문기사화 되자 6월 말에서야 산재요양을 승인했다. 협성계공의 산재지정요양병원인 한강성심병원은 한약복용으로 인한 수은 중독 가능성 운운하며 문송면을 비롯한 협성계공 노동자들의 수은중독을 부인하고 정상판정을 내렸다. 병원의 건강진단기록에는 수은측정결과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정상판정을 받았던 다른 노동자들이 후에 모두 유소견자(중독 판정 내지 중독 가능 판정)로 밝혀졌다. 기업주, 정부, 병원이 직업병에 의한 산재를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산재노동자 문송면은 제대로 된 요양과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고향, 서울에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가 6월 20일 산재요양 승인 후 입원한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7월 2일 생명을 다했다. 사망 직후 노동단체, 재야, 종교, 보건의료단체 등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는 위와 같은 산재 은폐에 대한 진상규명, 규명된 진실에 의거한 책임자 처벌과 공개사과와 피해보상, 이를 위한 사회화 활동에 주력했다. 투쟁의 결과 당면했던 과제로는 위와 같은 은폐사실들이 사회에 폭로되었고 노동부 서울남부지방사무소장 파면, 회사측 사과문 게시, 피해보상이 이뤄졌다. 활동보고서에 담긴 기고글(박석운 당시 대변인)을 통해서는 투쟁 이후 1년 동안 산재추방운동영역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 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에서 작업환경개선과 건강진단 문제가 새로운 근로조건 개선의 현안문제로 등장하고, 이어 알려진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사례, 故고상국씨의 카드늄 중독논쟁, 풍산금속에서의 산재폭발사망사고 등과 더불어 작업환경개선과 산재추방없이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노동자들에게 각인되었다. 노동부와 정부에서도 더 이상 방치만을 할 수 없게 되어 전국 도금업체, 수은 사용업체 등에 대한 일제조사 실시와 산업안전, 보건 장단기 대책 수립 발표, 직업병 연구조사를 위한 직업병 연구소 설립 발표 등이 이뤄졌다(정부의 이런 대책들은 발표 이후 유야무야 되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 더 많은 시간과 투쟁이 필요했다) 전 사회적으로도 산재실태의 심각성 및 산재추방의 급박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촉발시켰고 기존 보건의료계의 직업병에 대한 관심과 분발을 촉구하게 되었고 산재추방운동에 대한 사회여론의 지지를 담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산재피해자와 그 가족들, 노동자 스스로의 자구노력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원진레이온 투쟁이 다지 조명되어 대책위원회 구성 등 투쟁이 이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진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포자기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되찾는 투쟁에 나설 수 있게 모범과 희망을 제공해 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송면군을 보낸 지 1년이 지난 지금 늦게나마 장례위원회의 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은 이유는 이러한 소중한 경험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산업재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참고가 되고 조그만 기여라도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고 문송면군 장례위 활동보고서 및 자료집 중 ‘보고서를 내면서’ 일부 발췌 활동보고서에는 이러한 소중한 경험이 노동자들과 이 사회에 남아 산재추방운동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픈 바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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