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때문에 바닷물을 없앨 수 없다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황금물결과 풍요의 상징인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가을들녘의 풍요로움은 FTA로 말미암아 더 이상 보기 어려울 위기에 처해있다.
가을이란 계절은 ‘하늘’을 연상하듯, 여름은 ‘바다’를 떠 올린다. 그런데 ‘하늘’은 왜 ‘하늘’이며 ‘바다’는 왜 ‘바다’라고 할까? 이런 질문을 하면 매우 멍청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 이름이 지어지듯, 자연에 대해서도 그렇게 지어졌고, 불려지고 있으니 그렇게 이해하고 그냥 넘어가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 걸 보면 여전히 나는 멍청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고민 속에서 ‘하늘’이라는 관념을 한번 헤아릴 필요가 있다. ‘하늘’은 하늘나라, 천국, 그리고 전혀 다른 초월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종교적 도그마에 기원하는 관념이 될 수도 있고, 직접적인 자연의 대상과 결부된 ‘하늘’이 은유적 시공간으로서의 하늘로 변모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로 생각하면 ‘바다’도 같은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관념적 개념과 다른 방향에서 의미를 돌출하고 싶다.
‘바다’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비유에서 읽혀지듯이 넉넉함과 포용 그리고 희망의 무한함을 담고 있다. ‘바다’는 시내와 강을 거슬러 유입되는 온갖 오물들을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고 ‘바다’라고 하는 게 아닐까.
온갖 오물들이 ‘바다’로 유입됨에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 같다. 첫째는 바닷물에 함유된 염분이고, 둘째는 파도의 일렁거림으로 ‘바다’가 끊임없이 숨을 쉬기 때문이다. 즉 파도의 지속적인 격동과 함께 바닷물이 함유하고 있는 염분이 생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바다’가 필요로 하는 염분은 100%가 아니라 3%라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100%를 갖기 위해, 아니 그 이상의 탐욕으로 눈알을 부라리고 있다. 위기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회저변에 빈곤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에도 자본가들의 탐욕은 전부, 그 이상을 소유하기 위해 세상의 주인이 자신들임을 외치고 있다.
재벌과 가진 자의 행태는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에게 삶의 의욕마저 짓뭉개고 있다. 47세의 한 남성은 주택을 무려2,123가구를 소유하고 있으며 경기도에 사는 한 여성은 723가구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고, 영등포에 사는 44세 남성은 307가구를 보유하고 있다. 서울에서 집 한 채 갖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한 사람이 수백 가구를 보유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한 살짜리 갓 난 아이가 10가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미국 ‘뉴욕’ ‘주코티공원’에서 시작된 자본을 점거하라는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인류가 공감하는 핵심은 1%가 99%를 독점 소유하는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다. 미국의 마스크 공장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68혁명 이후 최대사변”이라는 분석과 “반자본 축제의 장이 변혁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분석들이 제출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의미 자체가 ‘자본이 주인인 세상이 진리’임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주인의 부의 축적을 위해 노동자, 민중은 노예적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이해하고 “밥은 주는 대로 먹고, 일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즉 노동자, 민중의 삶과 인생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극복을 위해 도입한 신자유주의 질서는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강요하며 출발했다. 자본주의 위기극복의 해법은 결국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노동자계급을 양산하고 있으며 구조조정에 의한 정리해고로 빚어지는 절망적 현상들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 모는 작금의 상황은 낡아빠지고 입에 발린 분배원리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업률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자본가들의 수익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닫고 있다. GDP대비 실질임금은 하락하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태에서 반자본 투쟁은 당연한 것이다. 바닷물이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염분이 3%에 불과하듯, 자본은 1%만 가져야하며 노동자 민중이 99%를 갖는 게 평등이며 정의인 동시에 진리이다. 따라서 모순으로 점철된 야만과 탐욕의 자본주의는 역사에서 퇴장해야 한다.
100%의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바닷물을 없앨 수 없듯이 자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없앨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바다는 이 땅의 절대다수인 노동자계급이 주인일 때, 자연과 생태의 균형발전이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회모순을 척결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유와 행복을 실감하려면 돈이 아닌 인간이 주인되는 세상을 절대적이다.
인류의 변화발전은 피지배계급의 투쟁에 의해 변화, 발전되어 왔다. 최근 TV토론회에서 한나라당 원내 대표는 북한 인권을 강조하면서 ‘인권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투쟁의 산물’이라고 했다. 비유의 주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지만 올바른 이야기다. 노동자계급의 권리 또한 자본가의 탐욕 때문에 절대 그냥 주어질 수 없으며 투쟁의 산물로서만 그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반자본에 저항하는 투쟁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권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잠잠한 편이다. 분노는 있으나 뜨거운 투쟁으로 조직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를 쓰레기, 폐기물 처리하듯 집단적으로 잘라버리는 정리해고, 이어지는 비정규직 양산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만든 법과 제도이기 때문에 절대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투쟁의 산물로서만 억압의 족쇄를 깨뜨릴 수 있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고 가운데 우리의 분노도 집단적으로 모아내고 자본을 점령하는 것은 이 시대 노동자계급의 과제임에 분명하다. 투쟁의 성과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해방된 세상을 열어나가는 변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타오르는 들불의 열기를 높여내자.
생존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 전재되지 않으면 사막에 아름다운 꽃은 절대 피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