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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밀러 노동조건 개선투쟁
⦁ 시기 : 1987년 7월 8일 ~ 9월 1일
우성밀러는 1987년 초 기숙사로 제공한 월세방의 방세 지불을 회사측이 거부함으로써 집단사퇴 사건이 일어났지만, 특별한 투쟁이 있었던 곳은 아니다. 그러나 우성밀러의 노동조건과 처우는 참으로 참담했다. 3년간 단 한 푼의 상여금도 지급되지 않았고, 개들도 먹지 않을 것이라는 식당 밥은 급기야 농성투쟁 직전에 식중독까지 일으켰으며, 탈의실은 남녀 구분조차 안 돼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이직률이 아주 높아 3월 초 입사한 대학생 출신 노동자가 5월에 프레스반 반장직을 맡게 되었고, 이들 중심으로 4명이 소모임을 만들어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회사측 관리자들이 조성했다.
7월 8일, 전자과와 금형반 주임의 제안으로 주임 11명 전원이 연간 상여금 200% 지급 건의서를 작성해 서명했고, 7월 13일부터 일반 노동자들도 참여해 7월 16일에는 35명이 서명, 7월 22일 이 서명서를 제출하고 25일까지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측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7월 25일 비교적 장기근속자에 속하는 6개월 이상, 25세 이상의 노동자 중 부서별 대표자 5명을 선정하고, 머리띠와 대자보, 노가바, 식료, 식기 등 파업농성에 필요한 물품을 갖추고, 지도부·규율부·오락부·연락부 등 농성체계를 구축, 준비를 완료했다.
7월 27일, 27명이 전자과를 점거하고 회사측에 700원 상당으로 식사 질 개선과 상여금 200% 지급을 요구했다. 이에 회사측이 1년 이상 근무자에 한해 200%를 지급하겠다는 회답하자 총회에서 이를 거부하고 농성을 계속했다. 이날 연락부를 통해 김밥과 각종 지원물품, 지역노동자들의 지지유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7월 29일에는 공장에 남아있던 관리자 4명을 모두 쫓아내고, 공장을 완전 점거한 후 옥상과 담 위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지역노동자 20~30여 명이 지원투쟁을 오자, 지게차를 앞세우고 스크럼을 짜 공장주변을 돌며 함께 식사도 하고 토론도 벌였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사태를 장기화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7월 31일 사장에게 요구조건을 즉각 수락하지 않을 경우 미결재 어음과 기계, 금형 및 주요 부품을 파괴하겠다는 최후 통보를 했다. 사장이 이에 굴복해 요구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이튿날 바로 상여금을 지급함으로써 투쟁을 마무리 지었다. 이어 8월 10일에는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조합 결성식을 갖고 준비위원 대부분이 노조간부를 맡았다.
그러나 승리는 순식간에 파괴당하고 말았다. 8월 26일, 단체협약 협상 동안 이유 없이 협약을 지연하던 회사측이 이날 밤 철야작업을 하던 노동자 전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해 놓고는 그 사이 금형과 완제품, 주요 기계부품을 빼돌린 것이다. 다음날인 8월 27일 ‘정전으로 하루휴무’ 공고를 붙이고 출근하던 학생출신 금형반장을 납치해 구속하자 노동자들은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8월 31일, 반장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구사대가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구사결의를 하며, 출근하려는 노조간부들에게 협박 반 애원 반으로 “리스트에 오른 8명이 있는 한 사장이 공장을 돌리지 않겠다고 한다”며 농성투쟁을 주도한 8명의 사직을 강요했고, 결국 9월 1일 위원장을 제외한 1명만 남고 모두 사직함으로써 우성밀러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됐다.
⦁ 참고자료 :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 편, <우리의 아침은 새로왔다>(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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