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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공동투쟁
□ 철도노동자들의 투쟁과 전기협 결성
전국기관차협의회 파업투쟁의 배경
1988년 철도파업
1988년 7월 26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철도기관사들의 파업투쟁이 폭발했다. 자정을 기해 전국 철도의 모든 열차가 일시에 멈춰 섰으며 수도권 1호선 전철까지 완벽하게 마비됐다. 파업에 나선 기관사들은 “국민의 발을 볼모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 집단 이기주의자”로 몰렸다.
전국에서 1,463명의 기관사가 경찰에 연행돼 28명이 형사입건되고 11명이 구속됐으며 그중 3명은 끝내 파면됐다. 이 파업을 계기로 기관사들의 참혹한 실정이 세상에 알려졌다. “졸음을 쫓으려고 봉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든지, 기관차 안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만 했다”, “겨울이면 기관차 실내에서 물이 얼고, 여름이면 40도 이상의 고열에 시달린다”는 등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1988년 기관사들의 요구조건은 △서울부산 간 직통열차 대전 교대 △시간 외 수당 근로기준법 기준으로 현실화 △노동시간의 단축이었다. 당시 해병대 사령관 출신의 최기덕 철도청장은 무리한 경영합리화 방침을 강행하면서 기관사들의 생리적인 욕구마저 무시한 채 서울-부산 간 직통열차 운행을 지시했다. 이 지시는 기관사들을 대·소변, 식사까지 차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극한 상황으로 몰아붙여 파업 말고는 선택할 길이 없었다. 파업 이후에야 교통부에서 실태조사를 나오는 등 뒤늦게 야단법석을 떨다가 8월 23일 △노동시간 최고 18시간에서 14시간 이하로 조정 △정기휴일 부여 △근로기준법 적용한 수당 단가 인상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국을 뒤흔들었던 파업의 충격이 가시자 기관사를 비롯한 철도노동자들에게 했던 교통부의 세 가지 약속은 휴짓조각이 됐다. 1988년 이후 1994년까지 노동시간은 여전히 24시간 연속 노동의 변형근로시간제 아래 360시간이 고수되고 있고, 유급 휴일은 어느 직종을 불문하고 단 하루도 없으며, 휴일수당으로 대체되는 연 15일의 법정공휴일도 일요일과 겹치면 수당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연장근로·휴일·야간근로 등 모든 초과근무 수당 단가는 근로기준법의 50%에 머물러 있었다. 파업 당시의 약속은 언론의 비판에 몰린 철도청과 정부의 언론플레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어용성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은 어용과 관료주의의 표본이었다. 철도노조가 얼마나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는지는 다음 몇 가지 예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988년 파업투쟁 당시 철도노조 집행부는 비번을 이용해 열흘간 농성을 벌이던 기관사들에게 찬물 한 그릇 대접하지 않았다. 그 후 집행부가 농성자들을 진압한 경찰의 밥값으로 조합비를 1천만 원 이상 지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 당시 집행부는 TV에 출연해 “기관사들의 파업은 불법이라 집행부로서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자는 조합원의 자격이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당시 집행부는 김창한, 채주영, 이태균 등 파업지도부가 철도청의 징계로 파면되자마자 절차도 없이 조합원 명부에서 삭제해버렸다. 또 철도노조 단체협약 중 임금과 노동조건 등 중요한 부분은 모조리 ‘관계 법령에 의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철도노조의 단체협약 갱신은 곧 공무원법, 공무원 복무규정이나 철도청 수당규정, 근무수당 규정이 개정되면 그대로 문구를 수정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임금교섭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철도노조 역사상 임금교섭을 한 것은 기관사들의 파업투쟁이 있었던 1988년과 파업 일보 직전까지 갔던 1990년 12월 투쟁 이후 수습을 위한 것뿐이다. 이외의 모든 안건은 노사협의회에서 “검토한다”, “노력한다”, “추진한다”는 약속만 반복해 왔다.
전기협은 1993년 봄부터 1994년 초까지 특별단체교섭의 성사를 위해 끈질긴 노력을 거듭했다. 1993년 정기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전기협 산하 19개 지부는 일제히 상급조직인 지방본부로 공문을 발송해 단체교섭을 공식 요청했고, 그해 5월 철도노조 대의원대회에서는 전기협의 요구안 중 5개를 채택해 단체교섭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조병학 철도노조 집행부는 이를 끝내 묵살했다. 1993년 6월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조병학 집행부는 단체교섭은커녕 1994년 정기대의원대회 직전 반대파인 오선석 서울지방본부 위원장을 전격 제명하는 등 세력다툼에만 열중했다. 전기협은 1994년도 5월 26일 철도노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직선제 규약개정안과 단체교섭에 관한 동의안을 제출했으나 위원장의 지연작전으로 실패하고, 이날 대회는 위원장의 파행적인 대회 운영에 항의하는 조합원들과 집행부의 몸싸움으로 끝났다.
철도노조 조합원 3만여 명이 위원장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모르는데도 집행부가 유지된 것은 철도노조만의 독특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철도노조는 ‘한국노총―철도노조―11개 지방본부―현장 지부’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설립때부터 지부로부터 대의원을 차례로 선출하는 4층 간선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합원이 직접 선출하는 것은 지부 대의원뿐이었다. 지부 대의원들이 모여서 지부장과 지방본부 대의원을 선출하고 지방본부 대의원들이 모여 지방본부 위원장과 본조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러한 제도는 대의원은 거수기에 불과해지고, 대의원의 과반수를 확보하면 하나의 파벌로 싹쓸이할 수 있게 되므로 집행부에 반대하는 사람은 절대로 상급단위의 대의원이 될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소수의 대의원이 전권을 갖기 때문에 어용화하기도 쉬웠다. 결정적으로 철도노조와 철도청의 오랜 유착관계 때문에 대의원들이 인사상의 기득권을 갖게 돼 직선제 등 집행부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규약개정 자체가 불가능했다. 철도노동자들의 현실
1988년 당시 철도노동자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시간이 월 300시간을 초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4년도에도 개선된 것은 없었다.
열차의 운행시각에 맞추어 출근하는 기관사의 경우 낮과 밤이 없는 생활을 반복하게 되어 취미생활, 여가생활, 교우관계 등이 불가능했다. 특히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잠자는 날이 한 달에 불과 8일밖에 되지 않았다. 쉬더라도 다음날 근무 때문에 잠을 자야만 하고 실제로 철도청에서는 항상 ‘과도한’ 취미생활을 삼가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어느 날 갑자기 승무원이 병이나 급한 집안일로 연차나 병가를 쓸 때(월차는 아예 없음)를 대비해 비상대기 승무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철도청에서는 인건비를 아끼려고 예비인력을 전체 인원의 3% 정도로 규제하고 있었다. 철도노동자는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연중무휴로 일한 것이다.
이런 실정에서 휴가는커녕 가족과 함께 잠깐 나들이조차 불가능했다. 일본은 불규칙한 근무특성을 고려해 휴일을 월 6일 이상 보장하고, 2일 이상 연속 휴일을 월 1회 이상 반드시 부여하고 있는 데 비하면 한국의 철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 수 있다. 서울지하철은 출퇴근 시간을 일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철도가 심야에도 운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야운행 후에는 반드시 낮에는 승무시간이 짧고 노동강도가 약한 열차에 승무토록 하거나 휴일을 배치해 파괴된 생체 리듬을 회복하도록 배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기관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노동자가 24시간 쉬지 않고 노동했다. 한 달 노동시간을 계산해보면 무려 360시간에 달했다. 이는 근로기준법은 물론 공무원복무규정에도 정면으로 위배되고, 철도청의 임의규정인 철도청 공무원 근무시간 규정대로 계산해도 월 270시간에 달하는 엄청난 노동시간이다. 예를 들어 순천기관사사무소의 경우 공식 인정된 노동시간만 월 306시간에 달하는 최악의 노동조건에서 근무했다. 1일 노동시간이 23시간 57분에 달하는 살인적인 승무부서도 있었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으로 1989~1993년 5년간 평균 18명이 직무 중 사고로 사망하고 147명이 부상을 입었다. 철도에서 ‘부상’은 부러지고 절단되고 깨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발목을 삐거나 디스크나 찰과상은 부상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철도청은 1996년 1월 1일 이전까지 공사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공사화의 목적은 경영합리화라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은 요금인상과 인건비 절감을 통해 흑자경영을 하겠다는 의도며, 이는 결국 국민과 철도노동자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겠다는 것이었고, 철도노동자 5,300여 명이 감원돼야 했다. 획기적인 시설개선과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감원은 노동강도 강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전국기관차협의회의 구성과 활동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는 1988년 파업투쟁 이후 1989년 5월 15일 결성됐다. 철도노조가 노조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철도청과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철도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합원들이 주체가 돼서 결성했다.
전기협은 전국의 기관사 5,200여 명과 검수원 3,000여 명, 그 외 500여 명 등 총 8,700여 명으로 구성됐고, 이 중 1994년 당시 전기협에 가입한 회원은 6,500여 명이었다. 약 74%정도가 주력인 기관사, 검수원 등이었는데 이들을 제외하면 중간 관리자와 사무원 등뿐이어서 실제로 기관차를 운전하고 정비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가입했다고 볼 수 있다.
전기협은 의장과 집행위원회로 구성된 중앙 지도부와 철도노조의 합법적인 하급 현장조직인 전국의 20개 단위지부로 구성됐다. 20개 지부는 철도노조의 공식 조직이며, 전기협은 비공식 단체였다.
‘해고자 원직복직 및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전기협의 투쟁은 1994년 초부터 시작됐다. 1994년 들어 공무원의 임금과 법정수당 단가가 인상됐으나 변형근로시간제로 일하는 철도원, 특히 승무원의 경우 임금인상 혜택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전기협 지도부는 철도원이 공무원의 임금인상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규명하던 중 이는 그간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초래하는 불법적 제도로 비난받아 온 변형근로시간제에 그 근본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됐다.
철도청이 복무규정으로 채택하고 있는 변형근로시간제는 근로기준법에 보장하고 있는 노동시간 기준(8시간 노동제), 임금계산 기준(법정수당 계산 기준)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1996년 1월 1일 공사화를 앞두고 철도청이 경영합리화란 핑계로 진행하고 있는 인원 감축, 노동강도 강화 움직임과 맞물려 변형근로시간제는 기형적인 개악을 거쳐 4만 철도노동자를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에 1988년 철도파업 이후 변형근로시간제의 철폐를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전기협은 1~2월 열린 집행위원회 회의, 수도권 지부 임원 수련회를 거쳐 이 문제를 대중적 투쟁을 통해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곧이어 열린 대표자회의에서 투쟁 결의를 확인한 전기협은 △해고자 원직복직 △8시간 노동제 쟁취 △승진차별과 호봉체계 개선 등으로 요구안을 잠정 결정하고 정책자료집으로 정리해 3월부터 전국 20개 지부를 순회하며 설명회와 투쟁방침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 과정에서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파업에 대한 각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4월에 접어들면서 요구안을 확정하고 조합원 대중들의 투쟁 의지를 모은 전기협은 전국 5개 지구별 투쟁결의대회를 열어 결의를 다시 확인했다. 5월 3일 1천여 명이 모인 중앙 투쟁 결의대회를 통해 파업을 공식 선언하고 조직을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형태로 개편했다. 비대위로 전환한 전기협은 <승리의 길>이라는 투쟁속보를 내고 파업을 각오한 투쟁에 대비해 5월 9일 부산지구부터 지구별 임원 수련회를 실시하는 한편 지구조직을 비대위로 전환, 각 단위 투쟁체계를 정비했다. 5월 20일 수도권 지부 임원수련회를 끝으로 지구단위 조직을 투쟁체계로 정비한 전기협은 5월 24일 철도사상 첫 옥외 집회인 ‘서울역 투쟁 전진대회’를 1,500명 이상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이번 투쟁이 파업을 각오한 투쟁임을 명확히 천명하고 지도부 구속 결단식, 비상시 행동지침, 대국민 메시지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투쟁국면에 접어들었음을 확인했다.
5월 24일을 경과하면서 전기협은 5월 3일부터 기초적 투쟁으로 하고 있던 리본달기, 현수막 부착, 쟁의기금 15,000원 모금, 쟁의복 구입 등의 준법투쟁을 강화하면서 본격적으로 파업투쟁을 준비했고, 대외 연대사업, 대국민 홍보, 차량스티커 등으로 투쟁의 의미와 정당성을 적극 알려 나갔다.
한편, 3월 16일 궤도교통노동자의 연대조직으로 산별노조를 지향하면서 출범한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는 전기협의 투쟁을 적극 지원·협조하면서 연대 의지를 다졌고, 6월 2일 종묘공원, 6월 4일 부천역에서 열린 전지협 공동투쟁결의대회를 통해 전기협과 서울지하철노조, 부산지하철노조의 공동투쟁 결의를 대외에 천명했다. 전기협은 전지협에 참관단체 자격으로 참여했다.
반면 철도청은 전기협 회원들에 대한 집중탄압을 시작해 정년연장을 신청한 회원들을 협박해 전기협 탈퇴를 강요하거나 현수막, 스티커, 각종 홍보물을 폭력적으로 제거했다. 이러한 탄압에 저항한 노동자들을 소환해 그 수가 1994년 6월 초 이미 100여 명을 넘었다. 게다가 깃발을 빼앗으며 열차 운행을 방해하고 소속장들을 불러 탄압을 강요하고 명단을 내지 않은 소장에게 압력을 가했다. 순천지방청에서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전기협 탈퇴를 협박하기도 했다.
전기협은 이렇듯 강화되는 철도청의 탄압에 대비하고 유사시 즉각 대처하기 위해 6월 13일부터 조합원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전기협은 이미 비상시 행동지침을 통해 철도청과 정부가 지도부를 연행·구속할 경우 즉각 열차의 전면 운행중지를 비롯한 작업거부를 결의한 바 있다.
이렇게 파업을 향해 결의를 모아가는 중에 △5월 24일 해고동지 원직복직과 8시간노동제 실시를 위한 철도원 투쟁 전진대회(서울 서부역 광장, 2,000여명 참석) △5월 26일 철도노조 대의원대회장 점거 △철도청과 철도노조에 특별단체교섭 요청 △철도청의 ‘철도 현업직원 개선 대책’에 대한 입장 발표 등을 적극적으로 이어갔다.
한편 전기협이 전면적인 투쟁의지를 밝히자 정부도 전기협의 투쟁을 불법으로 단정하고 지도부 피검에 나설 준비를 했다.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전기협은 비상시 행동지침을 결정, 발령했다. 비상시 행동지침은 △침탈 예측되는 상황이면 즉시 전 조합원을 각 지부로 비상 대기시키고 미리 정해진 집결장소로 피신해 대책 강구 △지도부 일부 피검 즉시 잔여 지도부, 집행위원, 지부장들은 미리 정해진 비상본부로 집결 △지도부 전원 피검 시 전 조합원 비상동원령 즉시 하달 및 잔여 집행위원 및 지부장과 미리 정해진 장소에서 2차 지도부와 합류해 총파업을 24시간 이내에 결정·하달 등이다.
전기협은 요구안으로 △변형근로시간제 철폐(시간 외 수당을 월 192시간 기준에서 일 8시간 기준으로 지급, 유급휴일 연 67일 이상 보장 △해직노동자 원직 복직 △승진차별 철폐 △호봉체계 개선 등을 요구안으로 내걸었다.
□ 지하철 노동자들의 투쟁
파업의 배경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은 4월 21일부터 6월 23일까지 모두 11차례 임금교섭을 진행했다. 노조의 요구는 △기본급 70,000원 인상(14.5%) △안전봉사수당(50,000원) 기본급화, 중식비(75,000원) 정액화 및 통상임금화 △사내복지기금 100억 원 출연 △기 합의사항 이행 등이었다. 교섭에서 공사는 노조요구안을 모두 거부하고 기본급 3% 인상만 고수하다가 막판교섭에서 안전봉사수당 기본급화와 식대 50,000원 통상임금화, 사내복지기금 30억 원 출연을 수용하겠다고 수정했으나, 노조의 핵심요구인 기본급인상에 대해 3%를 고수하는 바람에 결렬됐다.
6․24 지하철 총파업의 전개
서울지하철노조의 6․24파업은 수년 동안 저임금을 강요당해온 것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6․24파업 동안 지하철 노동자의 임금이 160~190만 원이라는 왜곡선전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지하철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열악하다는 공무원보다도 적어 “더도 덜도 말고 공무원만큼만”이라는 구호가 나왔을 정도다. 당시 지하철노동자의 임금은 공무원보다 평균 164,000원 적었는데 이는 정부가 공무원에 대해서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처우개선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임금을 수년간 인상했지만, 공기업노동자에 대해서는 임금 억제정책의 시범케이스로 설정해 매년 가이드라인을 강요해왔기 때문이다.
1994년도 임금교섭에서 정부는 3% 임금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이것을 지키도록 지하철공사에 강요했다. 이는 노동쟁의조정법상으로도 명백한 불법인데도 정부는 노사자율교섭을 가로막았고, 노사 간 합의된 사항의 시행을 번번이 막아 파업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서울지하철노조는 요구조건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6월 27일 04시에 전기협과 동시에 파업에 들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교섭을 통한 합리적 해결을 거부하고 23일 새벽 전기협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던 곳을 침탈, 강제 연행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전기협 농성은 비번근무자들이 전기협 사무실에 모여있던 것으로, 적법한 행위였음은 물론이고 파업시한을 무려 4일이나 남겨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강제 연행한 것은 합리적 해결보다 물리력을 통한 강제 타결방침을 세운 것을 의미하며, 노동자들은 자위의 수단으로 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결성과 공동 투쟁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결성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는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지하철노조, 전기협이 1994년 3월 16일 창립한 전국 궤도교통 관련 노조협의체다. 서울지하철은 서울시 산하 지방공사 형태고, 부산지하철은 교통부 산하 교통공단이므로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 노동자들은 공기업 사원 신분인 것과 달리 전기협은 전국철도노동조합(조합원 약 3만 명) 산하의 160개 지부 중 20개 기관차 사무소(기관사, 기관차 검수원) 지부 간의 협의체였다. 따라서 전기협 소속 조합원은 철도노조에 소속된 조합원이고 전기협 산하 지부 역시 철도노조 소속의 합법지부였다.
서울·부산 지하철과 전기협 3개 조직은 각각 소속 기관이 달랐지만 궤도교통 운수기관이라는 업종의 동질성과 공무원 또는 공기업 사원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각종 근로조건이 정부의 통제 속에서 결정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종래의 사업장별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통한 경험으로 각 사업장은 조직적 결합을 통한 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노동조합 조직발전 전망 속에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과제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전기협은 철도노동자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한계로 인해 전지협에 참관자격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전지협 공동투쟁
서울과 부산지하철, 그리고 전기협의 투쟁방침은 이미 각 사업장의 내외적 조건에 따라 규정돼 있었지만, 근로조건 개선의 구체적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미 3사의 근로조건 결정권이 사용자가 아닌 정권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고 정권의 탈법적 노동정책으로 인해 투쟁을 결의하게 되었다는 점에 공동투쟁의 근거가 있었다. 더욱이 업종의 동질성으로 인하여 쟁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는 상호관계가 확실했다.
철도·지하철 노동자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요구와 함께 공동쟁의의 개연성이 최초로 공개된 것은 1994년 6월 2일 종묘공원에서 열린 ‘전지협 공동투쟁 결의대회’였다. 이제까지는 사업장별 전술에 따라 추진해온 설명회, 공청회, 토론회, 촉구대회, 규탄대회, 결의대회 등 투쟁사업을 공동으로 조직하게 됐다. 소속이 다르고 근무지역이 다른 서울지하철과 전기협노동자 3,500명이 참가한 자리에서 공동투쟁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6월 4일 부산지역에서도 부산지하철과 전기협 부산지구위원회 중심으로 1,5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결의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6월 8일 전지협 3사는 각각 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발생신고서를 접수하고 다음날인 6월 9일 전지협 지도부는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요구의 정당성과 함께 공동투쟁의 결의를 발표했다.
6월 16일 전지협은 3사의 파업 찬반투표 결과와 공동쟁의 일정발표를 위한 공동기자회견을 용산 전기협 농성장에서 열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전지협 노동자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시 6월 27일 04시를 기해 전국의 철도와 서울 및 부산의 지하철이 총파업투쟁에 들어갈 것을 밝혔다. 사업장별 쟁의행위 찬반투표 결과, 서울지하철노조 90.7%, 부산지하철노조 96.2%, 전기협 90.4% 찬성으로 집계됐다. 특히 대의원대회에서 직권중재 거부 방침과 집행위원회에서 알선·조정까지 거부한다는 조직적 결의를 위임받은 서울지하철노조의 경우, 강고한 투쟁의 실천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러자 정권은 전기협 지도부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통한 검거령으로 협박하며 공동투쟁에 제동을 걸었다. 6월 18일 철도청과 철도노조의 탈법적이고 기만적인 노조합의사항에 따라 ‘철도 현업직원 처우개선 대책’을 보도하고 대내외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국민여론을 최대한 정권에 유리하도록 조성해 놓고 공동투쟁을 분리해서 사업장별로 탄압하겠다는 의도였다.
6월 22일 밤 전노대 간부를 통해 철도청과 노동부장관이 기만적인 대화를 요구하더니, 그 틈을 타 공권력은 6월 23일 03시 40분경 기습적 침탈을 감행했다.
파업투쟁의 전개
6월 23일 새벽 3시40경 전기협 용산 농성장을 포함한 전국 14개 지부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서울 2,000여 명, 전국 각 지부당 1,500여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돼 농성 중이던 비번 조합원과 심지어 근무자까지 무차별 연행, 이날 전국에서 연행된 철도노동자는 무려 641명에 달했다. 연행자 중에는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긴급구속영장이 발부된 전기협 핵심간부 13명 중 박상수 부위원장(서울기관차 지부장), 양동인 상황실장(서울전동차 지부장), 김창한(1988년 해고자), 이철의 선전홍보국장(서울전동차지부 교선부장), 정덕종 재정분과위원장(서울전동차 수원분소 지부장), 이종두 협력분과위원장(안산전동차 지부장), 최용의 대외협력국장(서울기관차지부 조직동원) 등 7명이 포함돼 있었다.
전기협 농성장이 침탈당하자 서선원 전기협 의장은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적인 철도 총파업을 선언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오전 7시 20분 비대위는 “서선원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건재하다. 서선원 의장의 현장복귀 명령이 없는 한 현장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9시경 전기협 지도부는 기독인권회관에서 농성에 돌입했고, 조합원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영등포산선), 종로성당, 명동성당 등으로 나누어 농성투쟁을 시작했다. 지도부는 오후 2시 한국기독교협의회(KNCC)회관 농성장에서 정부의 탈법적인 노동정책과 공권력 침탈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전기협 농성장 공권력 투입에 항의해 서울지하철과 부산지하철은 새벽 4시를 기해 규정 준수 운행을 시작했다. 전지협 공대위는 대표자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으며, 성균관대에서 2,0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했는데 집회 후 1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철도·지하철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전지협공대위)와 ‘민주당 철도 및 지하철 사태 대책위원회(위원장 이부영)’는 기독교회관에 지지방문했다.
전노대는 오후 1시 기자회견을 열어 “전노대는 전기협에 대한 경찰투입과 불법연행을 강력히 규탄하며 이에 맞서 총력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조속한 문제해결을 위해 불법연행자 석방, 경찰투입 사과, 경찰력을 철수, 전기협 간부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 전기협과 실질적으로 교섭등을 요구하고, 정부가 수용하지 않으면 전노대는 전지협과 연대해 총력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6월 23일 오전 비상간부회의 열어 저녁부터 전국 20개 지역에서 철야농성 돌입 △6월 24일 전노대 소속 모든 사업장에서 중식집회 열어 규탄과 강력한 연대투쟁 결의 △6월 25일 전국 지역별로 전노대 소속 조합원과 학생·시민 등이 참가하는 대중 집회 개최(수도권은 서울 집회 집중) △6월 24일 비상 대표자회의 소집(종로성당) 등의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이날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은 총회를 열어 6월 24일 04시를 기해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막바지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예정대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서울지하철 농성대오는 고려대, 민주당 여의도당사, 명동성당, 영등포산업선교회 등에 산개해 집결했다. 부산지하철도 6월 25일 04시에 총파업에 돌입, 부산대학교 강당에서 조합원 총회와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6월 24일 서선원 전기협 의장은 “철통같은 대오로 잘 싸우고 있다. 지도부는 건재하다. 언론의 복귀자 증가 보도는 기만이다. 또 철도청이 내일 아침 9시까지 복귀하라고 하는 것은 협박이다. 흔들리지 말고 집행부를 믿고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라는 전화메시지를 발표했다. 전기협 기독교회관 농성장에서는 10시 45분 조합원 4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했다.
이렇게 전기협은 23일 연행되었던 조합원 전원이 석방되자 단 한 명도 복귀하지 않고 회유와 협박을 피해 은신했으며, 광주 전기협도 연행자 모두 석방되자마자 20개 조로 나눠 잠행하며 광노협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대구 전기협은 23일 새벽 4시 45분 사무실에 공권력이 투입돼 39명이 연행됐다가 밤 9시경 모두 각서를 쓰지 않고 풀려나, 24일 150여 명 30여 개 조로 나뉘어 각 지역에 분산돼 지도부와 연계를 취하면서 복귀를 거부하고 있었다. 대구 지역에서는 ‘전기협투쟁지원대책위’를 구성했다.
한편 이날 새벽 총파업에 돌입한 서울지하철 차량·기술지부 조합원 3,000여 명은 고려대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부산지하철은 11시 기자회견을 열어 공권력 투입을 규탄하고 마라톤 교섭을 벌였으나 결렬됐다.
전노대는 서울 숭실대 사회봉사관에서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불법적 경찰력 투입 책임지고 내무부장관 퇴진 △전기협 동지들의 불법연행자·구속노동자 석방 및 사전구속영장 철회 △정부는 전기협과 교섭창구 마련 △서울지하철에 대한 직권중재 철회 △3% 임금억제 철폐 및 자율교섭 보장 등의 요구사항을 밝혔다. 더불어 26일까지 요구가 보장되지 않으면 27일부터 전면 투쟁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밝혔다.
6월 25일 부산교통공단노조(위원장 강한규)는 24일 오후 5시에 열린 16차 교섭이 결렬되자 25일 새벽 4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5시간 이상 계속된 마라톤협상에서 노조는 최후로 5% 선까지 양보안을 내놓았으나 공단측이 정부 임금가이드라인인 3% 이상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교섭이 결렬된 것이다. 이에 따라 노조는 25일 새벽 4시부터 전면 무기한 파업을 선언했으나 대화창구는 계속 열어두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밤늦게 금정구 노포동 기지창으로 집결했던 조합원 1,000여 명은 밤 11시부터 인근에 있는 부산대학교 신축 학생회관으로 농성 장소를 옮기고 25일 새벽 1시 1,000명의 조합원이 모여 파업 출정식을 하고 흔들림 없이 파업농성을 전개했다.
전기협 비대위 파업투쟁본부는 기독교회관 농성장에서 오후 1시 30분 기독교 인권위원회 대표 등과 함께 동대문경찰서와 면담하고, 기독교회관에 공권력을 투입하면 그것은 곧 기독교 전체와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구로역에서 농성 중이던 가족들은 경찰 닭장차에 실려 구로경찰서로 연행됐고, 나머지 20여 명은 기독교회관 농성장으로 격려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철도청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직접 방문해 가족이라도 출두하여 복귀서명을 하면 파면을 3일간 연기한다는 식으로 협박했다.
6월 24일 오후 6시를 기해 고려대로 결집했던 서울지하철 차량·기술지부는 농성 첫날 침탈에 대비해 지도부가 빠져나가서 다소 혼란을 겪기도 했다. 6월 25일 재진입한 지도부는 가장 강력한 대오인 차량지부를 끝까지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공권력 침탈 시 재빠르게 이동해 공권력을 무력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전술을 구사하기에 고려대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경희대로 대오 3,000명 전체를 이동시켰다. 지하철 조합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이동해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경찰의 허를 찔러 초기 공권력 투입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6월 26일 침탈에 대비하고 있던 조합원들은 경찰이 경희대로 몰려오기 시작하자 조용히 야산으로 퇴각, 산에서 3,000여 명이 1시간 동안 행군해 동덕여대로 안전하게 철수했다. 이후 공권력이 재침탈하자 대오는 동덕여대에서 산개, 명동성당과 개운사를 거쳐 다시 명동성당으로 기습적으로 이동했다.
한편 전기협 기독교회관 농성장에도 15시에 경찰이 난입, 농성 조합원 전원을 연행했다. 14시 50분경 정무 제2장관실에서 신분보장을 약속하고 전기협 지도부와 대화하겠다는 연락이 와서 이창환 쟁의국장이 기독교회관 건물 2층에서 면담에 들어갔다. 바로 이때 동대문경찰서가 1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기독교회관으로 난입한 것이다. 오후 4시경 272명이 모두 연행돼 9개 경찰서에 분리 수용됐으나, 전기협 서선원 의장을 비롯한 핵심지도부는 별도의 장소에서 여전히 투쟁 구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연행되면서도 “데려가도 해결되는 것은 없을 것”이라며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였다.
연행된 조합원들은 성동, 중랑, 북부, 노원, 중부, 남대문, 서대문 각각 30명씩, 마포 29명, 동대문 3명 등으로 분산됐고, 사전영장 발부자인 이명환, 이창환(쟁의국장), 이상도는 동대문서에서 17시 15분 용산경찰서로 옮겨졌다.
김영삼 정권의 침탈에 대해 기독교회관측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정부에서는 이번 침탈에 대해 사전에(15시 경) 기독교회관 김동완 목사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발표했으나 김동완 목사는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며 단호히 거부했다”고 밝혔다. 인권위원회쪽은 이번 사건을 “기독교회관 침탈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기독교에 대한 침탈”로 규정, 27일 임원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은 정부의 기독교회관 경찰난입에 대해 항의하며 철도·지하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도회에 들어갔다. 기도회에서 정부에 △연행·구속 노동자 즉각 석방 △공권력 남용과 교회협에 대한 경찰난입 책임자 처벌 △실질적인 대화로 철도·지하철 사태 조속히 해결 등을 요구하고 강력히 경고했다.
한편 부산지하철노조는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부산대 농성을 해산했다. 핵심지도부 30여 명을 검거하겠다며 동아대에 난입한 경찰병력은 단 한 명도 검거하지 못했다.
6월 27일 전기협 비대위 서선원 의장은 조합원 호소문을 발표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명동성당에 1,000여 명의 조합원이 결집해 파업투쟁을 계속 전개할 것을 확인했다. 이날 명동성당측은 농성 중인 조합원들에게 철수를 요구하는 공문을 전달했다.
오후 3시부터 서울지하철노조 간부 10여 명이 마포 민주당사 2층 상임고문실에서 농성에 돌입했으며 19시부터는 ‘임금인상 투쟁 승리와 노동법 개정을 위한 서울지역 노동조합 투쟁본부’(서울투본) 주최로 2,000여 명이 참가해 철도·지하철 파업투쟁 승리를 위한 서울지역 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어 연대파업과 1994년 투쟁승리 결의를 다졌다.
6월 28일 전기협은 제2철도파업 투쟁을 선언하고 새벽 0시 30분부터 조계사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전기협은 이 농성의 의의를 “정부의 ‘제2파업 선언으로 철도노동자 대부분이 복귀해서 열차가 곧 정상화된다’는 주장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는 데 뒀다.
이날 서울지하철노조 김연환 위원장은 위원장 지침 3호를 통해 “9,000 조합원 여러분,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조합원 여러분이 함께 투쟁하는 한 저는 목숨을 걸고 승리를 쟁취할 것을 약속드립니다”는 메세지를 발표하고 “승무지부(안개작전)는 집결시간 29일 19시로 48시간 연장, 차량지부(번개작전)는 별도지침 내려갈 때까지 소조별로 대기, 명동성당(역무1, 2, 기술1, 2) 사수, 위원장 복귀 명령 없이 현장 복귀 불가”라는 행동지침을 발표했다.
6월 29일 마포 민주당사를 농성장으로 삼은 지하철노조 지도부는 공사에 교섭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노조는 6월 30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기로 해 산개해 있던 조합원들이 이날 오후부터 명동성당으로 총집결했다.
한편 부산지하철은 오전 11시 강한규 위원장과 조합원 수백 명이 남포동 기지창에서 집회를 하고 나서 빈 전동차를 타고 모두 밖으로 빠져나갔다. 집회에서 강한규 위원장은 “투쟁승리를 위한 반격의 불꽃을 올리자”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날 서울지방노동청과 서울지하철공사, 철도청이 제3자개입으로 고소하여 전노대 양규헌, 권영길 공동의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전기협은 29일 밤 10시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서선원 의장과 부산, 청량리, 서기, 서전동, 대전, 천안 등의 지부장과 임원 2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투쟁방침을 결정했다. 6월 30일 12시까지 △서울지역 지부장 조계사 집결 △비번 조합원들 조계사로 모여 투쟁 동참 △근무 시 쟁의복 착용 △각 지부 연락체계 시급히 재조직 △지도부 구속·수배된 곳은 제2지도부 구성 등을 실행키로 했다.
6월 30일 김수환 추기경 등 원로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파업투쟁 자제 요구 및 정부의 성실한 대화’를 촉구했다. 이날 11시 20분부터 30분가량 <주간노동자신문> 이태복 발행인과 지하철 파업지도부 간의 대담이 있었는데, 이태복은 김수환 추기경, 월하 스님, 석주 스님, 이세중 변호사, 서영훈 변호사, 강원룡 목사를 중재위원으로 하여 정부에 대화를 유도하며, 공사와 철도청에 징계를 최소화할 것을 요구하고, 노조는 현장복귀 후에 해결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선 복귀 후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원로들의 성명은 결국 투쟁전선을 교란하고 철도·지하철 지도부들이 현장 복귀 방침을 내리는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조합원 총회를 열어 “7월 1일부로 업무에 복귀한다. 지도부 18명은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농성투쟁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조계사의 전기협 비상대책위원회도 “7월 1일부로 업무 복귀, 전기협 지도부는 무기한 농성” 방침을 선언했다.
7월 1일 파업 6일째, 부산교통공단노조는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자, 고소고발자 등을 제외하고 거의 현업에 복귀했다. 11시 노포동 차량기지창에서 열린 조합원 비상총회에 300여 명이 집결, 노조는 계속 투쟁을 다짐하는 강한규 위원장의 메시지가 담긴 유인물을 배포했다. 조합원 총회에 참석했던 전기지부 양춘복 지부장, 류강걸(쟁의부장), 한준우(조사부장), 류승호(지부장) 등 사전구속영장 발부 간부 4명이 연행·구속됐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명동성당에서 수배된 간부 중심으로 총 18명이 철야농성을 벌이며 현장 조직력 복원에 주력했다. 공사측은 징계를 빌미로 협박·회유에 몰두했다.
7월 2일 종묘공원에서는 전국연합 주최, 전지협공대위 후원으로 ‘공안정국과 노동운동탄압 규탄대회’를 하고 명동성당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부산에서는 부산지하철노조 총회 실시 후 강한규 위원장 등 간부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전기협 조계사 농성지도부는 ‘천막농성 시작 및 조계종 법난 사태’에 대한 100만인 서명운동과 비디오 상영으로 농성장 분위기를 조성했다.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이 현장에 복귀하자 정권의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7월 4일 서울지하철노조의 발신 자료를 보면 현장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사후 탄압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다.
7월 5일 서울지하철에서는 10시 30분 1,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구속 수배 철회 및 대량징계 저지를 위한 조합원 총회를 열어 부위원장에 석치순을 지명하고, 총파업 기간 반조직 행위자를 응징하며 수배·직위해제·직권면직자의 생계 보장을 결의했다.
7월 6일 조계사에서 전기협, 지하철, 공대위 조합원과 가족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철도·지하철 노동자 수계법회’가 열려 수계식을 거행하고 조계사 농성 지도부 7명이 법명을 받았다. 오후에는 ‘노동운동탄압 규탄 노동자 시민 결의대회’를 열어 ‘노동운동탄압 분쇄를 위한 대정부 투쟁 전개, 100여 명에게 씌워진 구속 수배 철회, 근로기준법 준수, 생존권 보장, 철도청과 공사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재파업 등 강력한 투쟁으로 이를 분쇄하겠다’고 결의했다.
한편 전기협 소속 노동자 가족들은 김영삼과 면담 예정이 있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구속자 전원 석방, 수배 해제, 중징계 철회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협조 서한을 전달했다.
7월 8일 서울지하철 명동성당 농성 지도부는 대량징계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현재 징계 대상자는 직권면직 30명, 직위해제 87명, 주의·경고 1,772명 등 총 1,889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숫자였다. 한편 현장에서는 7월 8일부터 전 조합원이 ‘구속수배 철회, 징계음모 분쇄’ 리본을 달기 시작했고 지부별로 역량에 맞게 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가족대책위 가족 50여 명이 시청 항의 방문과 피켓시위, 호소문 배포를 했고, 김수환 추기경 관사 앞에서 면담을 요청해 7월 9일 10시 추기경 비서신부 면담을 약속받았다.
7월 9일 토요일 오후 2시 종묘공원에 4백여 명이 모여 “철도·지하철 대량징계와 전노대 공동대표를 비롯한 노조 간부에 대한 구속·수배가 철회되는 날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또한 공공부문 노동자에 대한 3% 임금 합의선, 노경총 임금 합의선 철폐, 변형근로제 철폐, 제3자개입금지 등 모든 노동악법을 깨기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집회가 끝난 뒤 일부는 조계사로, 지하철 조합원은 총회에 참석하가 위해 명동성당에 각각 들어가려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조계사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명동성당에는 100여 명 정도만 들어가 총회(집회)에 참석했다. 양쪽에 들어가지 못한 조합원들은 을지로에 모여 약식 집회로 투쟁을 마무리했다.
7월 22일 서울지하철노조는 조합원, 가족, 학생 등 약 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구속·수배·징계 철회를 위한 조합원 총회를 열었다. 정해숙 전교조 위원장과 학생대표의 연대사, 석치순 직무대행의 인사말과 김연환 위원장의 영상을 통한 인사, 결의문 낭독 후 한진희 사장 화형식을 진행했다. 총회에 참석한 조합원의 재파업 결의는 드높았다. 이후 전지협 공대위는 종묘공원에서 규탄대회를 하고 철도청장, 경찰청장, 교통부장관, 내무부장관을 고발조치했다.
서울지하철노조 재파업 선언과 철회
7월 1일 서울지하철노조의 현장 복귀 이후 정부와 공사는 보복적 징계와 탄압을 무자비하게 자행했다. 전 직원의 30%에 해당하는 2,872명을 징계했다. 이는 전교조 이후 단위사업장에서는 최대 규모의 징계로 1989년 3․16파업 때 6명이 해고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고소·고발을 남발(41명)하고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월 8,000만 원의 조합비가 가압류됐으며 무노동무임금을 적용해 파업기간 지불해야 할 35억 원의 임금을 가로챘다. 또한 직무대행의 노조 전임을 인정하지 않는 등 단체협약을 위반했다.
공사측이 탄압만 일삼으며 교섭 요구를 거부하자 노조는 8월 15일을 기해 재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공사가 대화를 제의해와 노조는 이를 수용하고 8월 5일에 재파업을 유보했다. 이후 9월 5일까지 한 달간 4번의 본교섭과 2번의 실무교섭을 진행했으나 공사측은 타협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시간만 끌면서 노조 말살 책동을 벌였다. 노조는 다시 9월 13일 재파업 돌입을 선언했으나,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파업지도부가 재파업 철회를 권고해 와서 12일 10시 기자회견을 열어 전제조건 없이 재파업을 전면 철회했다. 75일간 농성 중이던 파업지도부는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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