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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이야기 다섯번째 : 1980년 서울의 봄
첨부파일 -- 작성일 2020-12-14 조회 522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1980년 서울의 봄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19791026, 산업화와 경제개발에 집중하며 노동자들에게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요했고 초유의 탄압으로 일관했던 박정희가 죽었다. 그러나 출근하는 통근버스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았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북한군이 쳐내려온다”, 어떤 사람들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눈물범벅이 됐고, 벌겋게 상기돼 넋을 잃고 있는 표정들. 그 속에 극소수 동지들은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평온 속에 미소가 살짝 엿보인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동지가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 귓속말로 제 부모가 죽어도 저렇게 슬퍼할까라고 한다. 그런 분위기는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그날 현장 생산량은 무려 10%가 줄었다.

수도권 민주노조 활동가들은 바빠졌다. 대한전선그룹노조지부가 회의를 소집하고 활동가들은 현 상황에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노동조합 탄압으로 희생된 동지들과 금속 노민추 동지들은 투쟁 결의를 모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들은 기나긴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담장을 벗어나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양상도 과격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임금투쟁 시기가 되자 대한전선지부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국노총도 통제 밖에 있는 노동자투쟁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동자투쟁 봇물한국노총 점거

한국노총은 1980513일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를 소집하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수도권 민주노조 활동가들은 비밀리에 모여 궐기대회에서 한국노총을 점거한다는 결의를 모아 당일 조직에 힘을 쏟았다. 모임에서 금속 노민추 활동가들이 주의사항을 강조했는데, 그건 연단에 나가서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는 것은 자유지만 절대 소속을 얘기하지 말라는 거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속을 밝히면서 규탄 연설을 했던 동지들은 이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한국노총 회관을 점거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전국금속노조 노동자들 _ 경향신문사([알기] 109쪽) 

 

한국노총 정한주 위원장 직무대행이 대회사를 하는 순간 민주노조 활동가들이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직무대행을 끌어내리고 한국노총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점거농성을 시작해 밤이 되자 500여 명이 남아서 농성을 이어갔다. 나무 탁자를 부숴서 탁자 다리로 탁자 판을 치면서 투쟁가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서 부르기)’를 부르고 조별로 장기자랑 등 급조된 프로그램을 이어나갔다. 개별로 연단에 올라 한국노총의 역사적인 어용행태와 박정희 정권의 노동자 탄압에 대한 연설도 이어갔다. 투쟁가라고 해봐야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하리라’, ‘훌라 송정도였고, 김민기 노래 한두 곡 불렀으며 군가였던 진짜사나이도 불렀다. 노가바 중에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그때 그 사람을 개사한 곡이었다. “유신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 가장 믿던 재규에게 총을 맞고서 /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그다음 날은 300여 명의 학생 시위대가 스크럼을 짜고 계단으로 7층까지 올라와서 노학연대를 제안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투쟁지도부가 연대투쟁에 따른 책임을 두려워한 것으로 이해한다. 구실은 학생은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같이 연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지만, 본질은 정세분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점거투쟁 지도부는 차기 대통령이 3김 중의 하나라고 했고 학생들은 전두환의 등장을 주목한 것이 쟁점이었다. 노학연대는 불발되고 한국노총 농성단은 계엄이 임박했다는 정보와 함께 자진 해산했다. 이미 40년이 훌쩍 넘어버린 한국노총 점거였고 당시는 나도 젊음을 과시하는 시기였다.

 

수석부위원장 당선, 노조 민주화에 힘쓰다

회사는 대한마루콘에서 대우전자부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동심회, 산들회, 산악회 중심으로 노조 선거를 준비했다. 직접선거가 없던 시기에 노조 집행부를 바꾼다는 것은 대의원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대의원 선출이 결정적이었다. 대의원이 후보로 나갈 때 후보에 대한 신뢰도는 물론 조합원의 반응과 성향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했다. 대의원 선출이 목표대로 됐고, 위원장, 수석부위원장, 사무장을 선출하는 집행부 선거에서 나는 수석부위원장에 당선됐다. 새롭게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여성부와 청년부를 신설했고, 노보 발행을 목표로 편집부도 만들었다. 아울러 통기타 강좌를 알리는 홍보물을 게시판에 붙였는데 120명의 조합원이 신청해, 매일 점심시간에 통기타 강습을 하기도 했다. 짧은 시간 통기타 강습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상당수가 노동조합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을 노조위원장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선출하도록 신협 약관을 바꿨고, 소비조합도 투명성을 높여 일계표를 공개했다. 그때까지 신협은 노동조합 임원들의 조직기반이었다. 대출이라는 권력으로 대의원이나 조합원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면서 장기집권을 이어가는 주요한 기제로 활용했기 때문에 노동조합과 신협을 분리해야만 했다.

 

탄압 속에서도 노래책 만들어 활동 기반으로

교육활동에서 교육은 노동가요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노동가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노래책을 만들기로 하고 연세대 앞 알서점에서 민중가요 책을 샀지만, 악보도 알아보기 어려운 책이었다. 악보를 다시 그리고 페이지마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의 기능과 역할은 물론 5.18광주민중항쟁과 살인적인 전두환 정권의 행태를 폭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노래책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여성부장(홍옥희)을 포함하여 세 명이 밤을 새웠다. 삽화를 넣고 노동자 처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노동가요 100여 곡을 담은 노래책을 만들었다. 노래책 이름은 <울림>이었고 5천 부 인쇄를 의뢰했다.

노조 단골 인쇄소에 원고를 맡기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경찰에 잡혀갔다. 같이 만든 사람 이름부터 대라고 앙앙거렸지만 혼자 만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내 신원을 탈탈 털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털어봐야 찾고자 하는 게(운동권 학생 출신) 없었던지 양규헌이 아닌 거 같다며 지문을 찍자고 한다. 나는 주민등록이면 됐지 무슨 지문이냐며 버텼다. 경찰은 위장하여 취업한 운동가로 생각한 것 같았다. 경찰과 말싸움이 시작되었고 경찰은 노래책(<울림>)이 불온서적이며 이적표현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 책이 왜 이적표현물인지 근거를 제시하라고 했더니 노래책에 나온 노래 중 두 곡 외에는 자신들이 모르는 노래들이기 때문에 불온서적 아니냐고 다그쳤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경찰들이 부르는 노래를 나는 전혀 모르는데 모르면 불온이냐고 물었더니 나를 치안본부로 넘기겠다고 협박을 한다.

노조위원장이 경찰서로 찾아왔다. 노조위원장은 나이는 많았지만 민주노조운동에 동의하고 내 활동에도 전혀 문제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역 기관장들과의 정기모임 등에도 참석했으니 경찰들과는 일정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노조위원장 에 나는 기본조사만 받고 나왔다.

<울림> 노래책이 문제가 된 것은 인쇄작업 중에 인쇄소 사장이 겁을 먹고 자신들이 다칠까 봐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인쇄소에서 책을 한 트럭 싣고 회사로 들어왔는데 노조위원장이 소각장으로 안내한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경찰과의 약속이고 소각하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기로 했단다. 위원장과 논쟁 끝에 1,000권만 소각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나머지 책들은 티엔디노조와 대한제작소노조에 500부씩 나눠주고, 주변 노조에서 간부들 대상으로 통기타와 함께 하는 노동가요모임도 만들었다. 보유한 3,000권은 한동안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조합원들에게 배포했으며 신입조합원 교육 때 유용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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