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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노협 서부지구 공동임금인상 투쟁(1992년 5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2-05-25 조회 194

1992년 서노협 서부지구 공동 임금인상 투쟁

 

시기 : 19921~ 6

 

서울의 영등포구, 강서구, 마포구 등지에 있는 노동조합들로 구성된 서노협 서부지구는 1992년 임금인상 투쟁 당시 10개 노동조합이 긴밀하게 연대활동을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결성 시기는 1987년에서 1989년 사이로, 조합원 수는 본조를 부천에 두고 있는 동양에레베이터노조 보수·공사지부을 제외하고는 15110명 수준이었다.

서부지구의 노동조합들은 1988년 이후 임금인상투쟁을 포함한 공동활동을 꾸준히 펼쳐왔고, 위원장단회의나 부서부장단회의도 일상적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세원, 세풍전자, 유원기업, 제일전산, 한국린나이, 영등포기계공단, 용마피혁, 대윤공영, 동양에레베이터, 승용전자 등의 노동조합은 연대활동을 꾸준하게 해왔다.

서부지구는 해마다 고용불안과 사측의 탄압으로 12개의 노동조합이 와해되는 등 조합원 수가 적고 고용불안이 상존했지만, 지구 차원에서 연대사업은 물론 지구 확대·강화 사업을 착실히 해오면서 구체적인 성과를 일궈가는 모범적인 지구였다.

또한 전반적으로 단위노조마다 핵심적인 지도부가 안정적이었고, 위원장들은 비교적 오랫동안 재임한 편이었다. 꾸준한 연대활동 과정에서 간부는 물론 조합원 상호 간에도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공동임금인상투쟁 기조와 목표

서노협 서부지구는 공동준비, 시기집중, 공동행동, 조합원과 함께 하는 공동임금인상 투쟁을 주요 슬로건으로 투쟁이 예상되거나 조직력 있는 사업장을 선 배치하고, 나머지 사업장들은 지지엄호하면서 최소한의 공동행동 배치 준비과정에서 현안이 있는 사업장과 역량이 약한 사업장에서는 보조를 맞추어 나가고, 시기 집중을 위해 더욱 치밀한 준비 조합원 대상 선전 내용 찾기 유리한 정세 형성되면 총력투쟁으로 각 단위사업장의 요구, 전노동자의 요구, 전민중의 요구 쟁취 등을 투쟁의 기조로 설정했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각 단위사업장의 특수한 현안인 고용안정 쟁취, 구속 및 해고 노동자 복직, 조직안정화 도모 조직력의 강화는 중간간부 역량 강화와 조합원의 주체적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에서 추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사업방침도 정했다.

 

공동임금인상투쟁 준비

서부지구 임금인상 투쟁 준비소위원회’(임투준비소위)는 목표 수립, 투쟁 상 정립, 지구 과제 고민, 단위사업장 역량분석 등의 임무를 갖고 1월 중순부터 공식적으로는 4차까지 운영됐으며, 그 이후는 지구위원장단회의에서 내용을 흡수해 진행했다. 임투준비소위에 결합한 노조의 절반 정도가 1991년 하반기부터 결합했기 때문에 지구 차원의 공동임금인상 투쟁은 1992년이 처음이지만 10개 단위노조 모두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참여했다.

임투준비소위가 초반에는 내용 있게 진행됐으나 점차 그 중요성과 비중이 축소됐다. 1992년 임금인상 투쟁의 정확한 상을 잡지 못한 채 서노협 확대 간부 차원에서 전국연합 가입문제, 노동자정당 추진위원회 문제, 국회의원 총선거 투쟁 전술 등 정치적 쟁점에 관한 논의로 대부분의 역량과 시간을 할애하게 되면서 단위사업장 분석 등 임투준비소위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또한 총액임금제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서 적극적인 대응방안을 고민하지 못했고, 공동임금인상 투쟁의 기준을 하향조정하는 선에서 검토하면서 1991년에 비해 의지와 고민이 많이 떨어졌다.

4차례의 회의 이후에는 효율적 논의를 위해 지구위원장단회의가 임투준비소위를 겸하게 됨에 따라 임금인상 투쟁을 위한 집중적인 논의(단위사업장 분석 등)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으며, 단위사업장의 책임 있고 역량 있는 활동가들을 지구의 역량으로 조직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부지구는 준비기 동안 간부의 조직적 결속과 조합원의 역량 강화를 목표로 지구간부 교육, 선동 훈련, 간부 단합대회, 임금인상 투쟁 문화학교, 교섭위원 교육 등의 공동 사업을 전개했다. 임금인상 투쟁 문화학교와 교섭위원 교육에 미가입 노조가 대거 참석해 지구 간부들과 함께 했으며 준비기 동안의 연대에 힘을 모았다. 예전에 지겹고 딱딱한 행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행사를 조직한 것도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대중성 있는 형식을 취하다 보니 내용에 의식성을 담아내지 못한 점과 행사들이 관성적으로 진행된 측면도 있었다. 이것은 서부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의 침체와 맞물리면서 형식의 다양화, 내용의 하향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공동임금인상 교섭시기

1991년 임금인상 투쟁과 비교했을 때 노조들의 조직역량이 축소돼 있었으므로 변화된 조건에 근거한 투쟁을 진행했다. 또 지구 내 단위사업장들 대부분이 총액임금제 적용 대상 사업장이 아니어서 별다른 쟁점이 형성되지 않았다.

교섭기에는 서노협 행사에 결합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지구 행사 없이 단위노조별로 개별화돼 교섭이 진행됐다. 그 와중에 단위사업장들은 다양한 준법투쟁을 개발,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그러나 사측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투쟁 전술 개발이 부족했고, 지구나 지역 차원에서 공동임금인상 투쟁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줄 만한 공동의 준법투쟁을 벌여내지는 못했다. 전국적으로나 서노협 차원에서도 공동 준법투쟁을 추동할만한 사업을 기획하지 못했다.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사업이 있었지만 총액임금제 대상 사업장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인 서부지구의 경우 단위노조의 결합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서노협 서부지구는 총력투쟁 시기를 고려해 쟁의발생 신고 시기를 맞추는 등 지구 차원의 노력을 기울였다. 교섭기에 서부지구 차원에서는 총액임금제 저지를 위한 노동조합 대표자회의 참가, 총액임금제 저지 철야 농성 및 노동부 항의방문 참여, 단체와 간담회, 노동절 지역 선전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참석, 민자당 재집권 저지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제1차 국민대회 참석 등을 공동사업으로 전개했다.

 

공동임금인상 투쟁과 마무리

총액임금제가 현안으로 대두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한 전국 투쟁 전선이 형성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러나 총액임금제에 대한 안이한 판단과 임금인상 투쟁 준비시기에 발생한 노동자정당 추진위원회 문제, 국회의원 총선거 후보전술 문제 때문에 임금인상 투쟁 준비가 부족해서 실질적인 전국적 투쟁 전선은 형성되지 못했다. 서울지역에서도 서울대병원, 나우, 싸니, 지하철 등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의식적인 노력은 있었지만 투쟁 전선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서부지구 차원에서 5114일 사이에 쟁의발생 신고를 결의하고 쟁의발생 신고를 집중했다. 총력투쟁에 돌입하는 날인 52526일에 한국린나이노조는 2시간 파업을 전개했고, 유원기업, 세풍전자, 승용전자, 동양에레베이터 등은 1시간 총회파업을 벌였으며, 용마피혁, 제일전산, 영공단, 세원 등은 보고대회와 선전전을 전개했다.

또한 단위사업장별로 지지대자보 교환’, ‘유원과 린나이 등 투쟁사업장 지지방문’, ‘서울대병원노조 투쟁 지원’, ‘양우화학 투쟁 지지방문과 모금등 단위사업장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63‘1992년 임금인상 투쟁 중간보고 및 완전 승리를 위한 서울지역노동자 결의대회에 서부지구 소속 조합원 42명이 참가했다.

서노협 서부지구에서는 투쟁 과정뿐만 아니라 이후 평가까지 전체 조합원을 비롯해 집행단위별로 진행, 임금인상 투쟁의 경험과 결과를 조직화 사업의 출발점이자 계기로 삼았다.

 

서노협 서부지구 공동임금인상투쟁 평가

서부지구는 1992년 임금인상 투쟁을 맞으면서 조직력 강화를 주된 목표로 설정하고 투쟁에 임했다.

준비기에는 문화학교, 교섭위원 교육 등 부서 차원의 공동임금인상 투쟁 준비, 조합원 힘몰이 야유회, 간부 단합대회 등 지구 차원의 공동사업을 추진했다. 이 시기에는 예년과 다르게 다양한 대중적 프로그램으로 마련해 조합원들까지 투쟁에 동참시켰다.

교섭기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준법투쟁을 전개해 예년에 비해 높은 액수의 타결액을 쟁취하는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임금인상 투쟁이 단위사업장 차원으로 개별화되면서 지구 전체 조합원과 함께 하는 공동임금인상 투쟁의 기조는 올바로 실현되지 못했다.

서부지구는 전국적으로 지지부진한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으로 전국적인 투쟁의 전선이 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총력투쟁 시기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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