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이 달의 역사
..... 석정남과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_ 이재성 (35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11-14 조회 1390
 
 
1978년의 겨울. 김민기는 고민했다. 어떻게 이 사회에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할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할까. 그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다해 작품을 완성했다.
 

석정남과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재성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70
년대.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에 노동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노동청이나 한국노총이 마련해 준 근로자 모범수기에 자기의 성공담을 공개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 모범수기에는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과장, 부장, 사장님들이 늘 등장하며, 참고 인내하며 근면하게 생활하면 누구나 잘 살게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당부의 메시지가 빠지지 않는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경험했던 폭압적 노자관계는 오히려 은폐될 뿐이었다. 노동자들의 사회적 고립은 전태일 열사가 느낀 절망과 분노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1970년대 말이 되어 <씨알의 소리>, <월간 다리>, <대화> 등의 잡지에 민주노조운동과 연관된 노동자들의 생생한 수기가 게재되었을 때 그것은 독자들에게 강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 속 민중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고민이 깊어가던 진보적 지직인들에게 노동자 수기는 그들을 사회적 진실에로 이끄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노동자 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고, 노동현실이 중요한 토론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대화>에 연재되던 인천 삼원섬유 노동자 유동우의 수기는 <어느 돌멩이의 외침>(1978)이란 책으로 출간되어 한 시대적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 석정남의 수기는 197711월과 12월에 <월간 대화>에 연재가 되었다. 제목은 각각 인간답게 살고 싶다불타는 눈물이었는데, 이후 1984년에 이 수기 내용은 추가 보완작업을 거쳐서 <공장의 불빛>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다. 나중에 <전태일 평전>이 된 조영래 변호사의 글이 저자는 물론이고 전태일이라는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그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 1983년이었으니 당시 노동수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 _사진 인천일보>

   <공장의 불빛>
이란 제목은 197811월에서 12월 사이에 제작된 김민기의 창작 노래굿 ?공장의 불빛?에서 온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노동수기들과 더불어 노래극이라는 다른 장르를 통해서 노동현장 속으로 파고들어가게 되었다. 노래극은 일종의 뮤지컬인데 김민기는 노래굿이라고 말한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직간접적으로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19782월에 동일방직에서는 대의원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현장은 민주노조를 사수하려는 집행부와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회사 측 및 남성 조합원들 사이의 갈등이 수 년 째 지속되고 있었다. 결국 대의원선거 당일 아침에 사측 남성 구사대원들은 여성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퍼부으며 폭력적으로 대의원선거를 와해시키고 조합원 124명을 해고시켜버렸다. 해고된 조합원들은 함께 모여 복직운동을 벌였고 922일에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시국기도회에서 동일방직 사례를 가지고 직접 연극을 공연하기로 하였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2개월 여 동안에 직접 대본 작업도 하고, 연기 연습도 하면서 공연을 준비했다. 기도회 당일에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약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난받는 동일방직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3부 순서로 연극이 공연되었다. 연극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 속에 동화되어 절규하였고, 많은 참석자들이 분노하는 가운데 경찰의 대대적인 연행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도회장에서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구호가 터져 나오고 특히 누군가 박정희는 빨갱이다라고 외쳐서 그 사람이 누군지, 또 정말 그런 구호를 외쳤는지 등을 두고 조사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한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_ 사진 중앙일보>
 
한편 서울대 미대 69학번이었던 김민기는 이미 1971년 첫 앨범을 내고 ?아침이슬?, ?친구? 등의 노래로 유명해진 상태였고, 1973년에는 희곡 ?금관의 예수?를 쓰고 연출에도 참여하는 등 천부적인 예술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의도치 않게 금지곡으로 선정이 되고, 또 운동가요로 불리는 가운데 그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군대에서 제대한 후 1년 여 간 봉제공장 생활을 거치면서 얻은 경험들과 당시 민주노조 운동의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큰 결심 끝에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비밀리에 제작하였고, 2,000개의 테이프를 녹음하여 전국에 배포하기로 한 후 김제로 내려가 잠적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인맥들을 총 동원하여 연주자와 가수들을 섭외했고, 녹음실은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와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를 빌렸다. 김민기는 여러 가지 고민을 했다. 우선 기존의 노래들은 아무리 길어도 제한된 이야기 밖에는 담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 저항적 민족문화운동으로부터 마당굿형식을 빌어왔다. 또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는 만큼, 그가 군대나 공장 등에서부터 배웠던 여러 가지 구전 가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시켰다. 교회운동으로부터 배운 가스펠이나 영가 등 서양 음악들도 적절히 녹여 내었다.
이때가 197811~ 12월경이었다. 녹음이 완성된 직후에 서울 제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안무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 공연을 위한 연습과정에서 녹화된 동영상이 있다고 한다.) 공식 공연은 역시 제일교회에서 19792월에 무대에 올려졌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의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녹음 테이프를 이용한 음원의 보급과 특히 녹음테이프 뒷면(B)에 노동자들이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 연극을 올릴 수 있도록 반주 전체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장의 불빛?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내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화적 생산수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서로의 현실을 공유하고, 현장에서 동지를 만들고, 민주노조의 의미를 배우고, 불의에 함께 맞서 싸우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배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노래극 전체가 무대에 올려지지 않아도, 그 안에 포함된 노래들은 노래집에 실려 각각 자기의 몫을 해 냈다. 이 작품은 1980년대 비합법 테이프 제작의 효시가 되어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래극 테이프 제작으로 이어졌다. 바로 거기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전국에 알려지게 된다.
 
1980년대 노동문학의 뿌리가 된 것은 1970년대 말에 활발하게 발표되었던 노동자 수기(手記)였다. 자신의 생활이나 체험을 스스로 쓴 글을 말하는 수기는 노동자역사 한내가 내걸고 있는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이기도 했다.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란 백서, 구술사, 자서전, 보고문학,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방식의 집단적 혹은 개인적 이야기하기(storytelling)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특히 이 개념은 개별 노동자나 집단으로서의 노동자들이 그 스토리텔링의 주체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한 주체적 시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기대를 담고 있다.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개념 안에는 고민하고, 숙고하고, 판단하고, 답을 찾고, 실천하고, 반성하는 성숙한 노동계급을 형성해 나가고자 하는 전략이 담겨져 있다.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에서 등장하는 역사란 단어는 학술적 영역에서 다뤄지는 역사와는 그 차원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역사 쓰기란 것은 학술적 엄밀성보다는 사회적 의사소통과 토론, 그리고 집단적 성찰성의 심화라는 실천적 적실성에 더욱 무게를 둔다. 이 점을 간과하게 되면 1970년대 말에 발표되었던 노동자 수기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으며, 오늘날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가 왜 당시와 같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노동자 수기가 그 문학적 완성도와는 별도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예술적 완성도를 통해, 그리고 새로운 매체적 실험을 통해 실천적 적실성을 극대화해 낸 예술가가 있었다. 치열한 이론적 모색과 조직적 실험이 전개되었다. 많은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로 오늘날 공장체제와 노동현실은 1970년대와는 많이 달라져 있다. 여전히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있지만 요즘엔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책과 인터넷, 방송에서도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이야기가 양적으로 많아진 만큼 또 그 영향력은 줄어들어 버렸다. 여성, 장애인, 환경, 학생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함께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학생은 혜택을 입고 노동자는 희생을 한다는 시대도 아니고,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조국이나 계급을 위해서살겠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워졌다. 노동자들 중에서도 꽤 잘 사는 부류가 생겨났다. 산업의 발전으로 노동계급 내 다양성이 커지고 그런 만큼 서로의 동질성이 줄어들고 있다.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노동자들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왠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1978년의 겨울. 김민기는 고민했다. 어떻게 이 사회에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할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할까. 그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다해 작품을 완성했다. 1980년대에 민중예술은 부흥을 맞았고 다시 1990년대 중반에 쇠퇴하였다. 하지만 김민기는 1994년에 극단 학전을 결성하여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우리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20023월부터 상시공연을 시작하여 20081231일에 4000회 공연을 끝으로 긴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지난 9월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박물관으로 간 지하철 1호선>이란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김민기는 작품과 관련된 모든 소품들을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그렇게 1990년대 민중사회사의 한 페이지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장의 불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 참고자료
 
<노래굿 공장의 불빛>(2004년 발매 음반)
이덕기(2005), “노래굿 ?공장의 불빛?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22.
이재성(2009), “인천 민중문화운동의 역사: 1960~1992”, 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 편찬위원회 편, [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 인천문화재단.
최유준(2008), “대중음악과 민중음악 사이 - 김민기의 매체 실험, ?공장의 불빛?”, [대중서사연구], 20.
 
 
 
동일방직_인천일보.jpg
 
 
 
목록
 
이전글 복지에 가려진 생존권 _ 양규헌 (35호)
다음글 <기억을 기록으로> 구술, 어떻게 받나_정경원 (35호)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