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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의 분신과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1970년 11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70-11-13 조회 281

전태일의 분신과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

 

시기 : 19701113~ 1210

요약 : 1970년 평화시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동료들과 어머니 이소선이 끝까지 투쟁해 요구사항을 관철하고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전태일은 1948826일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를 중퇴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허가 판자촌에 살면서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손수레 뒤밀이 등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 196517살에 처음으로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시다로 발을 들여놓는다. 1966년에는 평화시장 뒷골목 동일사에서 어린아이들 막바지를 만드는 재봉사로 취직했다가 다시 점퍼 집 한미사의 재단 보조가 된다. 그는 점심을 거르는 시다들에게 버스비를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에서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 다니기도 했다. 1967224일 마침내 바라던 대로 재단사가 됐지만, 하루 15시간의 중노동 속에서 폐병으로 각혈한 여성 재봉사가 해고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나서기 시작했다.

 

19696월 말경, 동료 재단사들을 설득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바보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출된다. 바보회 활동을 의욕적으로 전개해 조직 확장에 열을 올리자 자연히 전태일이란 이름도 평화시장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업주들 사이에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해고당하고 만다.

 

19699, 전태일은 어느 바지 집에서 일하고 받은 임금으로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를 인쇄했다. 바보회 회원들과 설문 조사를 하고,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반향도 없었다. 실망한 전태일은 좌절과 번민 속에서 모범업체 설립을 꿈꾸기도 했지만, 바보회는 와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19704, 삼각산 임마누엘기도원 신축공사장에서 근로기준법을 다시 연구하는 동시에 좌절한 노동운동을 재정비하기 위한 계획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19709, 새로운 각오로 평화시장에 돌아온 전태일 열사는 바보회를 재정비해 삼동친목회로 조직을 일신했다. 첫 사업으로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재조사해 106,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진정서는 삼동친목회 회원 일동의 명의로 대표 전태일, 서기 이민섭, 정회원 신진철, 최종인, 김영문, 조명섭, 강진환, 주현민 외 93명의 서명을 첨부했다. 이 진정서는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107일 각 석간신문에 일제히 보도됐고, <경향신문>은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108, 이러한 언론 보도와 주변 노동자들의 격려와 참여에 고무된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다음의 7가지 건의사항을 제출했다. 작업시간은 여름 오전 8오후 7, 겨울 오전 9오후 8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쉬기(부득이한 경우 사전에 양해 구하고 수당 요구) 작업시간 어기는 기업주는 본 회 명의로 고발조치 건강진단 연 2회 전원, 전염병 돌면 예방주사 맞을 수 있게 시다 월급 현 3,000원 기준에서 100% 인상, 최하 6,000본 회는 정기총회를 제3주의 휴일로, 오전 10시 사전 합의한 장소에서 임시총회는 필요시 언제든지 소집 등이다.

 

그러나 요구조건의 실현은 차일피일 미루어져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삼동회 회원들은 1020일 노동청 국정감사를 겨냥해 노동청 앞에서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지만,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근로감독관의 이야기에 취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국정감사가 지나고 나자 근로감독관은 맘대로 해보라며 배짱을 부리기 시작했다. 분노한 삼동회 회원들은 1024일 오후 1시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에서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지만 이마저 삼엄한 경비로 실패했다. 다시 “117일까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113,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구호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등을 결정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화형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기로 하고 준비했다.

 

19701113, 오후 130분 삼엄한 경비와 경찰들의 몽둥이에 밀리면서도 500여 명의 노동자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10여 분 뒤 한 되가량의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전태일이 국민은행 앞길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며 몇 마디의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그를 낳아 22년 동안 기른 어머니조차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몰골로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다 짜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 구급차가 왔다. 친구 두 사람이 그를 들어 싣고 인근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옮겼다. 이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230분경,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수십 명의 노동자가 달려왔다. 이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최종인을 비롯한 몇몇 삼동회 회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현수막을 앞세우고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들과 혈투를 벌이며 동대문 쪽으로 밀려다. 곧 경찰의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구둣발에 짓밟혀 개처럼 경찰서로 연행됐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밤 10시 숨을 거둘 때까지 8시간 동안 화기를 가시게 하는 15,000원짜리 주사조차 맞지 못하고, 병원과 근로감독관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는 어머니와 그의 동료들에게 투쟁을 계속해 달라고 당부했다. 어머니에게 제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뤄 주세요라는 말을 세 차례나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그래, 기필코 하고 말겠다고 답했다.

이어 친구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란 부모에게 잘못하면 안 돼. 너희 부모들께 효도하고, 그러고 조금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 주게.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라고 당부하며 대답을 요구했다.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는 친구들에게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며 큰 소리로 왜 대답하지 않는가?” 외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맹세한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탈진해 가는 듯 잠잠하게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고 했다. 12일 아침 집에서 라면 한 그릇 먹고 나온 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굶었던 그였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스물두 해의 고통 속에서도 끝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위의 더 고통받는 이들과 나누려 했던 한 가난한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따뜻한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을 태우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람들에게 준 채 운명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전태일 열사의 뜻을 새겨 이소선 어머니는 내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다음의 8가지 요구를 내세웠다. 그 내용은 주일휴가(유급휴일)제 실시 법으로 임금인상(월급공) 8시간 노동제 실시(초과근로수당제) 정규 임금인상 정기적인 건강진단 여성 생리휴가 이중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 지원이다.

 

당국에서 ‘8시간 노동제노조결성 지원만 빼고 나머지는 다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나 혼자라도 내 아들 시체를 토막 내서 치마에 싸서 묻는 한이 있더라도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완강하게 투쟁을 계속했다. 마침내 1116일 이승택 노동청장이 전태일 열사 빈소에서 8개 항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할 것을 약속했다. 1118일 장례식이 엄수됐다.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이소선 어머니와 최종인 노조결성 준비위원장을 비롯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중앙청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항의시위를 한 뒤, 1127일 가입 조합원 560명을 대표하는 56명의 대의원이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결성대회를 치렀다. 1210, 노조설립신고증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노동운동의 전진기지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참고자료

- 청계피복노동조합, <청계노조 20년 투쟁사>(1990)

-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돌베개,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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