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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송정기 민주노조 사수투쟁(1987년 8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8-13 조회 274

영송정기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사수투쟁

 

⦁ 시기 1987813~ 819

 

 

오리엔트 본사 자본이 60%를 차지하고 있던 계열사 영송정기는 19877월 초 회사측이 하계휴가를 무급으로 실시한 후부터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들의 사전준비를 거쳐 724, ‘노동조합 준비위가 결성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노조결성의 자유보장과 임금인상12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회사측과 협상에 들어갔다. 회사측에서는 노조만 결성하지 않는다면 모든 조건을 들어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58명의 노동자들은 727일 금속연맹 사무실에서 결성식을 갖고, 조합원 가입을 받아 120여 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는 88극렬노조 대책위라는 구사대를 조직해 노조 가입자들을 회유·협박하는 등 본격적인 노조 와해공작에 나서 12일에는 외부세력 개입운운하며 9명의 노조간부를 해고시켰다. 이로써 813일부터 7일에 걸친 해고자들의 출근투쟁이 시작됐다.

 

813, 100여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출근한 해고자들에게 구사대는 무차별 폭행을 가해 1명의 중상자와 수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자 다소 위축돼 출근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 수는 60여 명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남성사원 중심의 구사단 폭력에 60여 명의 숫자로는 부상과 고립만 심화될 것을 우려해 회사의 부당노동행위, 폭력탄압을 사회문제화 시켜 교섭력을 강화시키자는 취지에서 민주당 농성을 결정했다. 817일 오후 530분경 이들은 민주당사에 들어가 회사는 노조탄압을 중지하라” “폭력사태 공개 사죄하라” “해고자 원직복직” “공장민주화 없이 사회민주화 없다고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회사측이 819일 오후 노조활동의 자유와 해고자의 원직복직등 모든 조건을 들어 주겠다고 수락함으로써 농성투쟁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을 한 후에도 구사대를 통한 노조 와해공작은 더욱 심해져 조합원들에게 탈퇴를 강요하고, 회유 작업을 계속해 회사측에서 내세우는 인물로 노조임원 선거를 다시 하자는 주장을 확산시켰다. 또한 경찰측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사내에서 구사대에 의한 폭력이 자행되는데도 오히려 매 맞은 여성노동자를 신원조회 하는 등 회사측과 확실히 결탁했다. 그리하여 자본, 정권, 구사대가 협력하여 진행한 민주노조 말살책동은 임원 재선거를 가능하게 했고, 이후 임원 재선거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주도했던 기존 임원들은 모두 교체돼 어용화되고 말았다.

 

영송정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규모면에서는 비록 작았지만 서울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열기가 막 솟아오르려는 시점에 시작되어 매우 끈질진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성수동 주변은 물론이고 서울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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