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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읽는 현장
..... 오늘 하루_오태근 (47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11-14 조회 861
 

오늘하루

시: 오태근 (민주노동 1984.7.25)

나는 오늘도 지쳐 있다. 그라인더로 주물품을 갈아내고 또 갈아내고, 오늘도 그랬듯이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작업복에는 쇳가루가 뽀얗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동자 외에는 얼굴도 쇳가루로 시꺼멓다. 퇴근 때쯤이면 온몸이 쇳가루로 시꺼멓고 팬츠도 시꺼멓게 찌들어 있다.

내 직종은 주물 조형공. 이 곳 선반 가공 중소업체로 쫓겨 온 지도 어언 4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기진맥진 지쳐 있다. “오 씨 아저씨, 지금 빨리 페인팅 좀 해줘요, 중공업 라인이 올 스톱 이래요.” 스프레이건에서 뿜어 나오는 붉은 페인트, 검정 페인트로 완제품 표면이 도색된다. 그리고 내 코 속으로도 들어간다. 마스크를 하면 복중 더위에 질식할 것같이 답답하다. 검정 빨강 페인트는 코 속으로 목구멍으로 창자 속으로 스며든다. 코를 풀어본다. 검정 페인트 덩어리가 섞여 나온다. “현재의 시설로서 생산에 최선을 다해달라주인아저씨의 훈시다. 창자 속으로 검정 빨강 페인트가, 쇳가루가 들어가는가 보다. 생산성 향상이 더 절실하단다.

예수 할아버지, 석가 증조할아버지, 당신들이 소리높이 외쳐대던 인간 존엄은 어데 있는가요.

내 직종은 주물 조형공. 15년을 중공업에서 주물 조형공으로 일했다. 인생의 황금기인 청춘 15년을 중공업에 바쳤다. 이곳에 쫓겨 와 사상공 페인트공이 웬 말인가.

영어 선생이 수학을 가르친다. “당신이 제일 연장자이고 일당도 제일 많으니까 모범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은 회사에서 라면으로 때운다. 눈이 떠지는 시간이 출근시간, 점심 때 쯤이면 속이 쓰리다. 잔업 2.5 시간을 하고나면 쇳가루가 페인트가 목구멍을 조인다. 양재기에 그득한 막걸리가 쇳가루를 씻어낸다. 페인트를 씻어낸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양재기로 석 잔이면 배가 북장구가 되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 무슨 놈의 술을 그렇게 퍼마시느냐고 마누라는 바가지를 긁어대고. 텔레비전에서는 잘사는 농어촌이, 선진조국 창조가, 서울의 찬가가, 쇳가루에 취하고 검정 빨강 페인트에 취하고 막걸리에 취하여 몽롱한 내 동공에서 주마등처럼 스치고.

화장품 외판에 지치고 세 놈의 뒷바라지에 지치고 페인트공인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서 주물 조형공 마누라가 으음 우우 신음한다. 콜콜 잠을 잔다. 주물 조형공 마누라가 코를 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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