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출 활동가와 현장 노동자의 만남으로 어우러진 대우자동차 투쟁.... 국가와 자본은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결코 보장하지 않지만, 노동현장을 장악하거나 생산을 멈추는 노동자들의 투쟁 앞에서는 그들 스스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운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학출 활동가와 현장 노동자의 만남으로 어우러진 대우자동차 투쟁
김영수(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80년대 초반에는 노동자의 권리 같은 것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자 불행이었다. 꿈 속에서라도 권리를 누리는 모습이 행복이었다면, 잠을 깨는 순간 괜한 꿈을 꾸었다고 자책하면서 일터로 나가야 하는 모습은 불행이었다. 특히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일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바리깡’을 든 경비들이 긴 머리카락에 고속도로 공사를 하였고, 복장 검사, 출퇴근 체크, 출입증 확인, 퇴근 시 몸수색 등의 감시를 당했다. 노동자들은 일터에 가야만 돈을 벌 수 있었던 상황에서 말 그 대로 ‘짐승 사육장’과도 같았던 일터에 자신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결성하면서 ‘나는 짐승이 아니다. 나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외쳤던 제2의 전태일이 되고자 했지만, 국가와 자본은 이를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 중심에 1981년 2월, 국무총리 훈령 163조를 근거로 구성된 “노동대책회의”가 있었다. 이 “대책회의”는 노동부장관을 중심으로 일반행정기관, 경제행정기관, 경창, 안기부, 보안사까지 참여하여 ‘노사분규의 예방 및 해결대책 마련, 노사문제 확산 방지대책 마련, 노사문제에 대한 제3자 개입방지, 기타 사회에 물의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노동문제에 대한 해결대책’ 등을 협의하는 기구였다. 이 “대책회의”가 주로 논의했던 대상은 바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꿈을 꾸기 시작했던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잠을 자면서 꾸는 행복의 꿈을 노동현장에서도 꾸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은 1980년대 상반기에 수도권 공단지역으로 위장취업했던 약 3-4천 여 명의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과 함께 그 꿈을 꾸었다. 소위 학출들은 현장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기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규모 학출 활동가들의 등장은 19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반성, 즉 민주노조의 조직형태와 활동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계급적 이념과 과학적 이론에 입각한 정치적 지도의 부재, 민주노조의 본질적 성격을 둘러싼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고민했던 학생운동의 결과였다. 이러한 고민들은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을 노동현장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노동현장의 투쟁주체가 형성되는 실질적인 동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출처 = 백산서당,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현장으로 침투한 학출 활동가를 중심으로 전개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1984년 8월 초, 학출 활동가들은 신분이 노출되어 회사로부터 부서이동을 당했다. 송경평 이외에 이용선, 홍영표, 박재석 등의 학생운동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회사의 부서이동을 계기로 이선희, 이용규, 한비석, 정상국, 김태석 등의 핵심조합원들과 함께 기존노조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조합원들을 조직하면서 5단계에 걸친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4단계까지의 투쟁은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투쟁, 호봉승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 민주노조를 결성하는 투쟁, 그리고 어용노조를 불신임하는 투쟁’ 등이었다. 4단계의 투쟁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은 조합원들과 함께 했던 4단계까지의 투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을 위해 파업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학출 활동가들은 4단계까지의 투쟁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합원들은 학출 활동가들의 투쟁에 대해 많은 지지를 보냈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은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1985년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하였다. 1985년 4월 11일과 15일 열린 12차 교섭에서 노조 측은 18.7%의 인상, 회사 측은 5.7%의 인상을 주장하였으나, 서로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은 1985년 4월 16일에 파업농성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노동조합과 회사는 기본급 8.0% 인상, 수당신설 4.1%, 기숙사 6개월 이내 건립 등을 내용으로 합의하였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력은 현상적으로 임금인상투쟁을 계기로 드러났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력은 실질적으로 학출 활동가들 중심의 선진 활동가들이 전개했던 1984년 8월 이후의 투쟁들이었다. 그리고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투쟁의 동력도 노동현장에서 형성·강화되었고, 그 중심에 학출 활동가들 중심의 선진 활동가들이 존재했었다. 이 모습은 노동조합운동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선진 활동가들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대우자동차만이 아니라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주체를 형성했던 대부분의 노동현장에 볼 수 있었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업종과 지역을 넘어서서 노동조합 간에 일상적 연대활동의 중요성도 보여주고 있다. 1985년 구로동맹 파업투쟁의 한 주체였던 가리봉전자의 한 조합원은 ‘노조의 각종 기념행사에 타 노조의 조합원을 초청하였고, 조합원 숙박교육 및 간부숙박교육의 상호교류, 임금인상투쟁과 관련한 간담회 및 의견교환구조를 마련하였고, 대우자동차 농성?한국음향노조?동일제강노조 및 노총간부들의 농성투쟁에 연대한 경험’이었다고 말하였다.

사진출처 = 백산서당,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
사진 출처= 백산서당,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미친 영향이었을까? 1985년 4월 19일 자 동아일보 사설은 노동관계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전두환 정권도 1985년 4월 22일, 노신영 국무총리의 주재 하에 노사분규에 대한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노동관계법 개정하자고 하였다.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당시 민정당 노동문제 세미나에서도 노동법의 단체행동권을 제약하고 있는 각종 규정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이 규정의 개정?폐지가 주장되었다. 국가와 자본은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결코 보장하지 않지만, 노동현장을 장악하거나 생산을 멈추는 노동자들의 투쟁 앞에서는 그들 스스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운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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