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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끝자락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1-06 조회 774
 

뉴스레터 [한내] 2009년 1월호 : 칼럼

한 해의 끝자락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는 한겨울의 광활한 평야, 흩날리는 눈보라, 며칠씩 내리던 눈은 녹을 줄 모른다. 겨우살이에 안간힘을 다하는 시금치 이파리가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지만 하얀 눈이 덮인 위로 파릇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신기한 듯 주시했던 내 어린 시절.

그 시절 뒤꿈치와 엄지발가락이 헤어진 양말을 네 개씩 발에 신고도 발이 시려워 동동거리곤 했지만 그래도 꽁꽁 얼어붙은 작은 도랑에서 기형적 스케이트를 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결국 손과 발은 동상으로 퉁퉁 부어올랐다. 그러면 귀동냥으로 들은 ‘동치미 국물에 손, 발을 담그면 얼음이 빠진다’는 소리가 떠올라 화단에 묻어 둔 동치미 항아리를 열곤 했다. 살얼음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을 한 바가지 훔쳐다가 손과 발을 넣었을 때 시원함이 심장에 전해졌던 섣달그믐은 을씨년스런 북풍과 함께 깊어간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어른들 이야기에 길고 긴 시골 겨울밤을 버텨보지만 딱딱치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들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시간과 공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쳇바퀴 돌림을 쉰 몇 번인가 계속하는 동안,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공통점 외에 같은 상황이 반복해서 연출되진 않았다는 게 내 기억에 담긴 삶인 거 같다. 한 해의 끝자락과 새해의 문턱에서, 마치 문학 소년마냥 종이 장에다 어쩌고저쩌고 긁적대기도 하고, 공장 통근버스로 고향을 향하는 동지들 배웅을 위해 새벽거리 찬바람 헤치며 자전거로 달린 때도 있었고, 한 해 평가와 함께 새해 사업계획을 논의한다고 민박집에서 한 해의 끝자락을 보낸 때도 있었다.

수배생활 중에는 엄격한 보안 때문에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신혼부부가 사는 방에 그들이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머물며, 서툰 분위기임에도 뻔뻔스럽게 진열장에 고이 보관해 둔 귀한 술병을 꺼내놓고 혼자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와 같이 문을 두들긴다’는 베토벤의 ‘운명’을 틀며 가슴을 적시다가 새해 동이 터 오기도 전에 변기통에 하소연하다가 필름이 끊겼던 그믐날 밤과 새해 아침도 있었다. 작은 독방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케익 삼아 분위기 잡아 놓고 혼자 한 해의 투쟁을 평가 반성했던 기억도, 긴 한숨과 함께 현실과 자신이 끊임없이 싸워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그렇게 모두 세월 속에 묻히며 한 해와 또 다른 한 해의 갈림길에서 갈등과 좌절, 고통과 분노 그리고 스스로의 형식적 희망을 설정하고 안위하던 때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또 시간은 괴물처럼 어김없이 다가와 다시 연륜의 길목에 도달했으니 뭔가를 생각하라고 졸라댄다. 습관처럼 지루한 10년의 1년을 회상하는 건 고통이지만 어쩔 수 없다.

미완의 투쟁인 KTX, 기륭전자, 코스콤, 동희오토, 강남성모병원, 건설기계, GM대우 등등 나열하기도 어려운 비정규투쟁의 파고가 차디찬 그믐날 밤에 아픔으로 다가온다.

2008년 한 해 동안 또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새로운 투쟁문화를 고민하게 했던 촛불항쟁 3개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재벌 비자금 폭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로 세계경제가 패닉상태에 빠져든 사건,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그중 지금 현재 몰아닥친 금융위기는 세계경제를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나락에 빠지게 했고 우리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치솟는 물가와 환율, 반토막 난 증시, 부동산 경기침체로 금융은 물론이고 건설, 조선,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이 치명타를 입었다. ‘대공황에 접어들었다’는 말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저질러놓은 구조적 모순은 신자유주의의 금융세계화와 과잉생산/축적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 극복에 대한 대책을 고작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데에서 찾는다. 수출 비율을 70%에 맞추고 수출국 서열을 자랑하며, 내수에 대한 정책은 오로지 삽질에 의존하는 부자들의 지도자인 이명박의 뻔뻔스러움에 슬픔을 넘어 뜨거운 분노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이 지나면 새로움을 예고하는 내일이 세월의 굴레가 되어 다가온다. 한 해를 거칠게 되돌아보는 건, 동천에 우뚝 솟은 붉은 태양의 기상을 노동자계급이 가슴 깊숙이 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자본이 만들어놓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준비하고, 요구를 내걸고 투쟁을 조직하자. 스스로 거대한 파멸의 길로  들어선 총체적 사멸의 상징이 되고 있는 자본주의는 시대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대안을 마련하자. 거대한 물질문명의 삭막함이 아닌 따스한 피가 흐르는 노동자, 민중이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투쟁을 힘 있게 조직하자.

그것은 유효수요를 들먹이는 타협적 케인즈주의가 아니라 오랫동안 시야에서 사라진 노동해방의 깃발과 정신을 복원해내는 것이며 이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위력적인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엄동설한 하얀 눈밭에서 삶에 치열한 투쟁을 벌였던 시금치 이파리가 수 십 년에 세월의 흔적을 딛고 올해의 싸늘한 그믐밤에 파노라마 되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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