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메타를 만나다 소요(한내 회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은 본격적으로 문학의 정치적·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1947년 샤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예술가의 적극적인 현실참여에 대한 개념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명확한 의미를 불어넣음으로써 ‘앙가주망(engagement)'은 예술가들의 사회참여를 폭넓게 아우르는 단어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해방공간의 격렬한 좌우대립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폭력적으로 종결되었고, 1960년 4.19혁명을 이후로 앙가주망 논쟁이 격화하였으나 IMF를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예술은 쇠퇴하였다. 노동자들 고유의 문화는 노동예술·현장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되거나 격리 당했고, 이는 리얼리즘 예술이 자연스럽게 배척당해온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내부의 헤게모니와는 별도로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예술 활동을 해나가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쇼미더머니’를 비롯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며 대중문화의 주류를 차지하고 ‘힙하다’라는 유행어들이 생겨나면서, 힙합은 현재 젊은 층 생활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그것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저항적이고 해방적인 힙합음악의 정체성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이는 이미 상품으로서의 기능이 음악의 본질을 압도해버린 음악시장에서, 이국의 문화상품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해온 결과인 동시에 필연적으로 내용에 대한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현주소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가리온이라는 힙합크루를 시작으로 힙합문화가 발달해왔는데, 가리온이 해온 음악은 현재 대중음악의 주류로 진입한 힙합문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힙합매니아들 사이에서도 늘 논쟁거리였다. 2018년 겨울, 홍대의 한 연습실에서 가리온의 멤버이자 한국 힙합정신의 대변자로 평가받는 MC메타를 만나 그가 문화노동자로서 살아온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하는 그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고향은 대구입니다. 거기서 쭉 자랐고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에 대학원을 오게 되면서 그때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해서 결혼하고 인천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음악은? 음악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는데, 소위 말하는 힙합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pc통신 동호회가 유행하던 시기를 전후로 굉장한 매니아 였어요. 그런 힙합 음반을 수집하는 소위 ‘힙덕’이었죠. 주로 미국음반을 들었는데. 피시통신 모임을 통해서 창작을 할 수 있는 기회랑 동기가 생겼죠. 저희들끼리 모여서 가사 쓰고 랩하고, 작은 공간을 대여해서 저희가 만든 곡들을 서로 보여주고 즐기다가 그게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고.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랩퍼로서의 삶이 시작 된거죠. 평범한 학생이셨던거네요? 네, 전혀 음악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어요. 힙합음악을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원래 굉장한 록매니아였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통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기타리스트가 되려는 꿈을 꿨고. 나중에 졸업을 하면 스쿨밴드 만들자 락밴드 만들자 그런 얘기 하면서. 록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었고. 특히, 당시에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음악 장르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있었어요. 록이 짱이다. 뭐 그런. (웃음) 힙합음악은 당시에는 그런 음악이 있는 줄도 몰랐을뿐더러. 당시 80년대 중후반에는 디스코나 댄스가 주류인 것처럼 느꼈는데 저 같은 록매니아들은 당시의 음악을 이건 쓰레기야 라고 취급하기도 했었어요 (웃음) 그래서 저는 당시에 힙합음악을 들을 때도 몰래 들었어요. 친구들이 알면 변절자 취급을 받는게 싫어서 몰래들었고, (웃음) 그러다가 마치 리트머스 종이 물들듯이 서서히 힙합으로 넘어왔죠. 물론 지금도 좋은 록음악을 많이 듣고, 저희 팀같은 경우는 지금도 록밴드랑 콜라보도 많이 해요. 유독 (힙합음악에) 끌리셨던 이유가 있나요? 제가 록음악을 좋아했던 이유를 먼저 말씀드리면. 저는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고. 소심한 그런 아이였어요. 숫기도 없고 남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굉장히 내향적인 성격이라 활동적이지도 못하고. 친구들도 잘 못 사귀고 혼자있는 걸 좋아했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음악을 듣는게 자연스러운 취미가 된 것 같은데. 그 음악을 듣다가 록음악을 듣고 쎈 음악을 쫓아가게 된 것이. 제가 그렇지를 못하다보니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강렬한 락 사운드나 거기서 소리 지르는 보컬들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같은 것을 느낀거죠. 그러다가 점점 센 음악으로 갔어요. 헤비메탈 같은.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예전에 AFKN이나 라디오 같은 곳에서 랩음악을 듣게 된거죠. 물론 당시에는 랩이나 힙합이라는 용어도 몰랐지만요. 그 음악을 우연치 않게 듣고 되게 락음악에서 느껴지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을 느꼈거든요. 그 강한 힘을 느꼇던 게. 리듬이나 그런 것도 강렬했지만 랩퍼들이 외치는 소리가 뭔가 한이 서린 듯, 단순히 멋있어 보이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들이 무슨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의 결은 좀 느끼겠더라구요. 뭔가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 뭔가 굉장히 억울해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또 굉장히 궁금해졌어요. 왜 저렇게 뱉을까. 그러면서 랩음악을 수집했죠. 근데 구해서 듣다보니깐 또 한번 충격을 받은 것은 비속어를 막 쓰더라구요. 당시에는 검열도 있었고 주로 말랑말랑한 가사들이 주류였는데. 왜 이사람들은 욕을 하지? 노랫말은 아름다워야 하고 시와 같아야 하는데 욕을 하잖아? 그러면서 엄청 가사를 궁금해 했어요.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래서 저는 그 궁금증을 시작으로 힙합에 빠져들게 됐죠. 그러면서 pc통신을 하면서 애호가들끼리 가사들을 공유하고 비속어들을 해석하면서 시작된 거죠. 또 그 내용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그 랩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동네의.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리포터들이 리포팅하듯이 굉장히 적나라하게 묘사를 했더라구요. 그러니깐 굉장히 리얼리티를 느꼈죠. 그런 데서 어떤 문학적인 순간이랄까. 그런 게 발생하는 것 같아요. 예 저는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물론 기존의 록음악도 좋았지만, 어찌됐건 거기에는 조금은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있었다면 힙합은 굉장히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었어요. 우리 동네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엄청 매력적이었고 훅 빠져들게 되었죠. 그런데 창작자로까지 의지가 뻗치신걸 보면 어떤 억압에 대한 감각이랄까? 그런 게 있으셨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저도 돌이켜 봤을때요 당시에는 제가 록음악이 주는 강한 출력의 사운드를 좋아라하다가 또 랩퍼들이 강한 메시지를 강렬한 메시지에 빠져들고 이런 것이 당시에는 못느꼈고 그냥 그 장르가 좋았고 그 장르가 주는 신선함이나 매력에 빠져있기만 했고 그냥 탐닉하기만 했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고 랩퍼로서 활동하면서 돌이켜보니 어찌보면 제 안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요. 그게 억압이 됐건 반항심이 됐건. 그걸 생각하면서 같이 떠오른 게 뭐냐면 이번에 영화 1987인가요. 이한열 열사. 그 시기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대구에 있었고. 보수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더라구요. (웃음) 그 한가운데서 저도 자랐고. 저도 반공교육을 받았어요. 매주 받은 기억이 나요. 제가 초등학교 1학년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나서. 제가 등교하는데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다 울더라고요. 왜 울지? 이유도 모르고 저도 펑펑 울었어요. 그래요? 그게 기억이 다양하더라고요 어떤 지역에서는 만세소리가 나기도 했다는데...(웃음) 저는 아직도 그게 너무 강하게 기억나는게. 저는 그냥 선생님이 우는게 슬퍼서 친구들이 우는게 슬퍼서 울었거든요. 제가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전혀 모르는데. 어쨌든 그런 기억이 있던 대구에서 제가 그런 환경에 있다보니깐 반공교육이나 소위말하는 지역감정이나 그런것도 자연스럽게 접했었고. 모르고 그냥 고등학교 가서도. 1987 당시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학교가 시내중심에 있었고 항상 거기서 데모를 하는 걸 봤고 저는 그래서 계속 최루탄 맡으면서 수업을 받는데. 그때는 대학생들을 되게 미워했어요. 수업도 못하고 눈 따갑고 코 따갑고 그래서. 그때는 그게 싫어서 데모를 싫어 했어요. 저는 음악만 듣고 그냥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대학을 진학했는데 입학식 때 총장님이 연설을 하는데 총학생회 여러 명이 나와서 막 구호를 외치더라구요. - 2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