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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
⦁ 시기 : 1987년 7월 28일 ~ 8월 13일
국제상사는 신발 제조업체로 총 종업원이 12,100명에 달하는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자가 나이 어린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이후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패배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대규모 남성사업장과는 달리 구사대를 동원한 회사측의 폭력에 맞서 이를 물리칠 물리적 힘이 없었던 것이다.
7월 28일 4일간의 휴가에 휴가비가 겨우 5,000~6,000원이라는 회사측의 방침이 전해졌다. 그러자 그간 쌓였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40여 명의 노동자가 운동장으로 나가 “휴가비 100%를 확보하자”고 외치자 순식간에 300여 명의 노동자가 결집했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대표를 선출하여 △상여금 연 400% △휴가비 100% △휴가기간 유급 △학생 수학여행기간 유급 △식당밥 개선 △어용노조 퇴진 △위원장 및 대의원 직선제 △최저임금 보장 △간식 제공 △몸검사·가방검사 철폐 △휴일특근 수당 250% 지급 등 16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정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이어 이들이 기숙사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하자 7월 29일, 회사측은 ‘29~30일 휴무’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이날 아침 많은 노동자들이 출근했고 아침 9시경에는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불신임 서명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7월 30일 교섭을 일체 거부하며 사태를 방관하던 회사측의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됐다. 아침 8시경 기숙사에서 철야농성으로 밤을 샌 여성노동자 1천 명이 회사로 행진하여 9시경 회사 밖의 노동자들과 합세하려는 순간 일당 3만 원에 고용된 깡패 70여 명과 회사 관리직 600여 명으로 구성된 구사대가 덮쳐들었다. 정문을 열자 소위 ‘구사단’이 나타나 망치, 쇠파이프, 각목 등을 휘두르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고, 고무가루와 돌멩이를 던지며 덮쳐들었다. 일방적인 폭력에 밀려난 노동자들이 기숙사로 들어가자 구사단은 기숙사 안까지 쫓아 들어와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국제상사 노동자들은 지원투쟁 온 대학생들과 빵·우유를 보내온 시민들의 격려로 깡패들의 폭력을 간신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기숙사생들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깡패들의 폭력과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에 놀라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을 지새우고 31일 오후 6시경 기숙사를 나온 노동자들은 8월 1일 새벽 2시경부터 사상동 성당에서 농성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회사측은 폭력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한 후 노동자들을 회유해 8월 2일에 일부 노동자들과 노사합의를 했다. 합의사항은 상여금 300%, 퇴직금 누진제 실시, 사후 보복 금지, 4대 국경일 유급처리 등 15개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농성을 주도한 노동자들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루어져 하기휴가가 끝난 8월 4일부터 투쟁은 다시 시작됐다.
8월 6일, 300여 명이 출근해서 농성에 돌입하자 회사측은 경찰력을 동원, 농성을 강제진압하고 8명을 연행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사상성당의 농성투쟁과 함께 현장투쟁을 계속하자, 회사측은 8월 9일 정상조업이 가능할 때까지 무기한 휴업을 선언했다. 투쟁이 시작된 지 15일 만인 8월 13일, ‘사후 보복 금지’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사상성당 농성은 해산하고 투쟁은 막을 내렸다.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과정에서 대학생 출신 ‘위장취업자’가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회사측에서는 ‘송후분’을 불순분자로 지목하여 감금하고, 농성장이었던 기숙사까지 와서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이때 농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를 파견하여 구출하고 시위현장에서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지역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화학, 신발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들의 투쟁에 영향을 받아 급격히 확산되었다. 30일 저녁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싸움에 관한 소식을 적은 벽보에 자극을 받아 (주)화성 노동자들이 31일 전면파업에 들어간 것을 비롯, 8월 5일 삼양통상 노조 설립, 8월 11일에는 삼화범일공장, 대양고무, 진양화학에서, 8월 12일에는 동양고무가 투쟁에 돌입했으며, 8월 17일 동풍고무에서 노조가 결성되는 등 투쟁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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