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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으로 가보는 내나라> 동두천 쇠목마을 _서동석 (2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03-11 조회 1886
 

진흙 속의 연꽃이 되리라, 동두천 쇠목리

서동석(통일문제연구소 회원)

 가을햇살이 곱게 내리는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니 젖소를 한 50마리 정도 키우는 목장이 있고 그 목장을 지나자 곧 오른쪽에 사격훈련장이 나옵니다. 단박에 미군사격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철망에 붙은 경고판에는 붉은 색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DANGER FIRING RANGE DO NOT ENTER'.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위험, 사격장 출입금지’는 한국사람을 위한 배려겠지요. 공연히 푼돈 벌려고 탄피 주우러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겠지요.

사격장을 끼고 개천의 다리를 건너니 이정표가 나옵니다. 왼쪽으로 가면 ‘미2사단캠프호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쇠목’이랍니다. 쇠목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길섶엔 환삼덩굴이 서로 엉켜있는 속에 개망초, 개여뀌, 달개비 따위가 서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은 차량 한 대가 넉넉하게 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쇠목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따라가면 쇠목마을에 닿습니다. 예전에는 이 길이 비포장이었습니다. 미군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포장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니 자신들의 땅이라니!

길을 따라가니 사람 두길 높이의 돌무더기가 나옵니다. 기가 막힌 사연을 간직한 돌탑입니다. 그 탑 뒤로도 또 다른 미군 훈련장이 있습니다. 철망문이 굳게 잠겨있는 이곳 입구엔 영어로 쓰인 큼직한 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WELCOME TO BAKER RANGE'. 입간판 옆 철망에는 'WEAPON FIRING IN PROGRESS KEEP OUT'이라는 경고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격장인 듯 보이지만 전차(탱크)훈련장입니다. 훈련장 앞 돌탑은 ‘해원탑’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탑 옆의 작은 새김돌(비석)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해원탑과 새김돌 =사진 서동석>

‘쇠목주민에게 지워진 멍에 같은 고통의 세월이 금(今) 50년을 잊고 있으니 미군사격장?탄약고?훈련장 등이 주민생활을 크게 방해하는 악영향이 그것이다. 우리 선조들께서 살아온 한의 세월에 구들돌을 다듬고 난 잡석을 모아 후손들이 뜻을 합쳐 여기 탑을 조성하는 것은 통한의 시절을 회고하여 먼저가신 선조들을 위로하고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한 한의 사정을 풀고자 현주민들이 해원의 탑을 세운다. 2000년 춘(春) 쇠목주민 일동’

 마을을 드나드는 길목에 미군부대와 사격장, 탄약고, 훈련장이 있어도 그저 ‘대한민국’을 지켜주고자 미국에서 부러 온 군대이니 수더분하게 참고 살아온 쇠목마을 주민은 1996년 3월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미군이 탱크사격장을 만든다며 마을 농토에 고장 난 탱크를 갖다 놓았습니다. 드나드는 길도 저희네 땅이라며 주민들 마음대로 못쓰게 하는 미군이 이번엔 멀쩡한 남의 농토에 탱크사격의 목표물로 고물전차를 덜렁 부려놓았습니다. 마치 땅따먹기 하듯이 ‘여기서 저기까지 이번에 우리가 쓴다.’하고는 그냥 주인에게 말 한마디도 없고 마을을 드나드는 주민도 생판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어느 날 느닷없이 미군이 정하고 주민은 그저 따라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전쟁만이 난리가 아닙니다. 평시에도 미군은 전쟁에 버금가는 작전을 벌이는데다가 이젠 미군이 필요하다면 그냥 땅을 바쳐야 하니 이게 전쟁통이 아니고 뭡니까. 주민이 정부에 진정을 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이 사용하도록 한국정부가 승인해줬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미군이 합법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까. 일본놈이 조선을 식민지로 했을 때도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주인과 협의하는 척은 했다 이겁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고 버젓이 국호를 단 이 땅에서 미군이 필요 하다면 나라 땅이고 주민 땅이고 뭐고 간에 다 미군이 사용할 권리가 있다니 이건 식민통치보다 더하지 않습니까. 나라에서는 이를 ‘공여지’라고 하였습니다. 주민들이 똘똘 뭉쳐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동두천 시내 보산동 미2사단본부, 캠프케이시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보산동 미군부대 정문 = 사진 서동석>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이 권리를 갖는다는 ‘공여지’는 이렇게 구분합니다. 첫째, 전용공유지인데요, 미군이 배타적사용권을 갖고 사용하는 땅으로 미군기지, 훈련장, 기타시설 등입니다. 둘째 지역공유지로, 원래의 토지사용용도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미군이 사용권을 행사하는 땅으로 일종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입니다. 미군 송유관, 전선 및 기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확보한 땅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임시공여지가 있는데 이는 군사훈련 등을 위해 임시로 미군에게 사용권을 주는 땅입니다. 어떻습니까? 알고 있었습니까? 50여 일을 쇠목마을주민과 동두천의 시민이 힘을 합쳐 ‘쇠목 미군탱크사격장신설반대 및 미군공여지반환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열찬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투쟁으로 대한민국이 미군에게 제공한 ‘공여지’문제가 전면에 드러났습니다. 그때까지 ‘공여지’가 뭔지 또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땅이 공여지로 제공되고 있는지, 또 그 공여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쉬쉬하고 있었으니까요.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 = 사진 서동석>

쇠목마을의 투쟁으로 미군은 훈련장 계획을 거뒀습니다. 또 1998년 동두천의 공여지 600만평을 땅 주인에게 반환했습니다. 동두천시민연대의 주장에 따르면 아직도 동두천에만 1천만 평이 넘는 미군공여지가 있다고 합니다. 쇠목마을은 대한민국 최초로 미군의 공여지문제를 사회문제화한 역사적인 마을이며 또 미군상대로 처음으로 빼앗긴 땅을 찾은 사례가 되었습니다. 훈련장 입구에 세워진 해원탑은 그런 사연을 담은 탑입니다. 탑의 문구가 그때의 사연을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아 그곳에서 마을로 1백미터 더 들어간 곳에 2005년 7월에 따로 ‘주한미군공여지반환투쟁기념비’를 세웠습니다. 2002년 동두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의 전차에 깔려 숨진 효순양과 미선양을 추모하는 집회 때 들었던 ‘촛불’의 형상을 땄습니다. 신영복선생의 글씨체로 새긴 기념비의 본문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산과 개울이 잘 어우러져 참 아름다운 마을이었던 동두천에 1951년 7월 미군이 들어왔습니다. 다음해엔 미군기지를 확장하기 위한 작업으로 이곳에 살던 주민을 내몰았습니다. 56년엔 마구잡이로 공여지를 늘리기 위해 토지를 징발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두천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넓고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미군기지마을이 되었습니다. 지금 동두천시의 3할에 이르는 총 872만평을 미군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원래 이 마을의 중심도 바꾸었습니다. 서울에서 원주로 가던 경원선이 전철화되어 지금의 동두천중앙역에서 쇠목마을로 가려면 이담이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옛날에는 이곳이 이 고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미2사단이 보산동에 들어서서 지형이 바뀌었습니다. 미2사단에만 미군이 1만 명입니다. 기지에 종사하는 이가 5천 명입니다. 동두천 시민이 7만5천 명입니다. 보산동 기지를 캠프케이시라고 합니다. 쇠목마을 가는 곳의 미군기지는 캠프하비입니다. 당연히 이 기지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캠프케이시 정문 앞 거리는 분명 삼거리인데 이곳의 방향표지판은 ‘2사단사거리’라고 합니다. 그 까닭은 기지 안을 지나면 걸산동이 있어 그렇습니다. 이곳 주민은 통행증이 있어야 드나들 수 있습니다. 이럴 정도로 미군기지는 동두천 주민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두천은 미군의 마을입니다. 미군과 미군속, 그리고 종사자들을 상대로 들어선 상가가 기지로 통하는 길에 즐비합니다. 가게마다 내걸린 영어간판이 이곳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윤금이 살해 규탄 대회 = 사진 경향신문사> 

미군기지가 절대비중을 차지하는 동두천이다보니 이 도시를 떠올리면 이어 ‘기지촌’이 함께 물려 올라옵니다. 예전엔 저녁이면 캠프케이시에서 나온 미군이 기지 앞 철길건널목(지금은 고가전철화되어 건널목이 없다)을 건너 보산동 기지촌으로 몰려갔습니다. 술집과 유곽이 이들로 흥청 되었지요. 물론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이라크전쟁으로 미군이 빠져나갔고 또 평택으로 기지 이전작업도 있어 한창 흥청 되던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한산합니다만 그래도 미군을 상대로 성업 중입니다. 지금은 이곳을 ‘동두천외국인관광특구’라고 부릅니다. 이곳엔 아직도 미군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미군범죄에 거의 속수무책입니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이는 등 미군 교통사고는 400건이 넘어 전체 미군범죄의 60∼70%에 이르고 있으나 국내 법원의 재판권 행사건수는 10건에도 못 미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미군범죄 가운데 가장 잔인한 사건으로 기록된 윤금이씨 살해사건으로 이런 불평등 협정을 개정하는 투쟁도 있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윤씨가 동두천 기지촌 자신의 집에서 미군 마클 이등병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입니다. 윤씨의 신체 특정부위에는 맥주병과 우산대가 꽂혀 있었고 입에서는 성냥개비 등이 발견된, 미군 범죄 중 가장 잔인한 성범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기지촌 여성문제와 주한미군범죄 실상이 밝혀지고 미군철수와 함께 협정개정운동이 불붙었습니다. 마클 이병은 어찌되었는지 아십니까? 마클은 협정규정에 따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다 대법원에서 15년형이 확정되어 사건 발생 1년 6개월 만에 한국정부로 신병이 인도돼 1994년 5월 천안교도소에 수감됐다가 2006년 8월, 슬그머니 가석방되어 미국으로 내뺐습니다.  

쇠목마을투쟁을 이끈 그때의 주민이름은 해원탑의 비석 뒷면에 새겨져 오늘도 ‘우리 땅, 우리 주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권태원 김종규 조규재 조규범 김규식 이상린 김영도 이희남 최정도 조량환 조욱환 박상덕 이용헌 김병규 이상묵 권배수 송창근 고장식. 참 착한 분들이라 여기에도 올렸으니 많은 분이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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