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역사, 우리계급 입장으로 스스로 써야”
- 노동자역사 한내 정기총회 및 토론회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노동’이 빠진 근현대사 교과서, 그마저도 좌편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지난 2008년, ‘교과서 파동’이 벌어졌다.
당시 노동운동 진영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관련 연구자, 역사교사, 현장노동자 등이 함께하는 ‘노동자는 역사교과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려 눈길을 끈다. 노동자역사 한내는 1월31일 대학로 흥사단 3층 강당에서 열린 정기총회를 기념해 이같은 토론회를 열었다.

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은 “노동자 역사는 노동자 계급의 입장으로 노동자가 써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교과서포럼의 역사인식과 근현대사 교과서 파동’이라는 주제로 발제에 나선 전국역사교사모임의 김육훈 교사는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거듭 이야기하니까, ‘어쨌든 좌편향된 부분이 있으니 저렇게 이야기되나 보다.’ 라고 이해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실상은 ‘좌편향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편향임에도, 어느새 그들이 중립인 것처럼 이해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김 교사는 “결국 좌편향이라는 것은 오른쪽에 서 있는 이명박정권, 교과서포럼, 자본가계급의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과연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라고 반문하며 “교과부는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기본 전제 위에서 수정작업을 벌였다’고 하는데, 정통성은 정당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그것이 과도하게 강조될 때는 권력행사의 정당성 차원을 은폐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연구소의 최규진 교수는 ‘노동의 관점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라는 발제에 나서 교과서에서 ‘노동’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지워졌고, 민족과 ‘정통성’에 갇혔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묻혔다고 주장한다.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노동과 노동운동이 어떻게 서술돼 있는지 비교분석한 최 교수는 “검정교과서는 노동의 관점이 계급적이고 편협하기 때문에 (노동사 서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검정교과서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는 ‘준거안’과 ‘사회화 교육과정’이야말로 노동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급적이고, 민족이데올로기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편협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 근현대사가 곧 한국 노동운동사일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중심축으로 삼아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며 “반공 이데올로기와 민족 이데올로기를 떨쳐내고 일국 차원이 아닌 세계 차원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바라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비노동자인 학생과 노동자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노동 현실을 인식하여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자세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교과서 파동이 단순한 개별사안이 아니라고 본다. 촛불 진압 이후 미디어 장악→시민단체 통제→노동자계급 고립 수순의 과정에서 고도의 지배전략의 일환인 이데올로기 공세로 ‘교과서’ 문제를 내놓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만큼 노동자들의 대응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장노동자인 철도노조 김병구 조합원은 ‘자기역사 쓰기’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정권뿐만 아니라 철도노조도 한국노총 시절 통치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노조 역사서를 발간해 왔는데, 정작 민주노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자기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업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김 조합원은 “구체적인 노동자의 삶의 역사를 근현대사의 과정 속에서 자기 계급의 입장으로 서술해가는 과정은 노동자 스스로 자기 삶의 주제로, 또한 역사의 주체로 서가는 과정이자 지배이데올로기에 감염된 자신의 사상을 부정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노동자역사 한내는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를 사업계획으로 잡고 있다. 노동자역사 한내 정경원 자료실장은 “토론을 하며 역시 역사는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노동자는 너무 멀리 있었다”며 “이미 우리는 근현대사에 ‘노동’이 없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안타깝다”고 밝혔다. 정 실장은 “노동현장, 노동조합에서도 ‘역사’는 ‘현안’에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이제부터라도 ‘나’부터, ‘우리 조직’부터 스스로의 역사를 써나가자”고 주장했다.
이날 토론회 사회를 맡은 노동자역사 한내 유경순 연구위원장은 “노동자 스스로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한내가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으로서 노동자 역사를 정리하고, 교과서를 바로잡는 데 적극적으로 고민하며 개입해 나가자”는 말로 토론회를 마무리했다.
이어 열린 노동자역사 한내 정기총회에는 전체 성원 371명 가운데 위임장을 제출한 회원 199명을 포함해 234명이 참여했다.

총회 참가자들은 올해 사업 목표로 △노동운동역사자료실(한내-웹)의 내실 있는 운영 △한내 목적사업의 주체적인 추진 △안정적 재정기반 마련 △법인 체제로의 점진적인 전환 추진을 승인하고, 이에 걸맞는 구체 사업으로 △한내-웹 시스템 안정화와 원문 제공서비스 △기록물 전산화 추진 △기록물 보존 장소 마련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 △구술-채록 자체 기획 추진 △전노협 연구 프로젝트 등을 추진토록 했다. 이밖에도 한내는 올 한해 △회원 배가사업 △회원 사업 계발 및 강화 △수익기반 마련을 위한 사업 △다양한 홍보사업 △기부금대상 민간단체 추천을 위한 요건 완비 △노동열사전시관 확대 △노동운동사 학습모임 지원 △정기총회 및 기념토론회 등을 추진한다. 참가자들은 이 같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예산안도 함께 심의, 확정했으며, 지난 2008년 8월 출범 이후 다섯 달의 사업실적과 결산도 승인했다.
또한 이날 총회에서는 비영리법인화 추진 과정에서 민법상의 규정과 관련 법령상의 강제 조항 등을 수용하느라 창립대회에서 통과된 회칙과 차이가 발생함에 따라 그 결과를 비교 보고했다. 법인 설립과정에서 관련 조문 수정에 대해서는 앞서 창립총회와 운영위를 통해 대표에게 위임된 바 있다.
한편 이날 총회는 학살된 용산철거민 범국민추모대회와 일정이 겹침에 따라, 회의를 빠르게 진행한 뒤 참가자들은 곧바로 집회에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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