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가보는 내 나라
구로공단(2)
서동석
2010년 8월 31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대법원 재판정에서 판결을 지켜보던 몇 분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서울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구로공단) 조성 과정에서 강제로 토지를 수용당한 당사자의 유족이었습니다. 어느새 이분들도 노인이 되었습니다. 법원은 그때 강제수용 당한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해야 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근 반세기 동안 가슴에 담아 온 한이 녹아 내렸습니다. 공단을 만든다고 강제로 땅을 빼앗아가고는 오히려 국가는 이들을 '땅 사기꾼'으로 몰아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을 가슴에 찍었습니다. 국가가 강제로 빼앗아 간 토지는 가구 수로 2백여 가구, 68만 평방미터가 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에 대한 판결이었습니다. 이번 소송에 참가하지 않았던 이들도 모두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어디에 살아나 계신지, 이 반가운 소식을 알고나 있는지...
이 판결을 보도한 신문기사는 이렇게 났습니다.
‘판결을 내린 대법원 1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구로공단 토지 소유주였던 김아무개 씨 등 4명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소유권 이전 절차를 이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땅을 확보하기 위해 공권력을 남용해 불법구금, 폭행 등으로 소(訴) 취하를 강요했다"면서 "공권력 남용이 정의 관념에 비춰 묵과할 수 없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김씨 등은 구로동 일대에서 농사를 짓던 주민들로 지난 1961년부터 정부가 구로공단을 조성하면서 경작지에 간이주택 등을 지어 분양하자 토지 소유권을 내세워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주민들은 이 땅을 일제 강점기 때부터 경작해왔고 그 연고권으로 농지개혁 때 분배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가 검찰력을 동원, 민사소송을 사기로 몰아 당사자들을 집단 연행한 뒤 가혹행위로 소를 취하시키고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검찰은 원주민 53명을 사기 혐의로 입건한 바 있다.’
문제가 된 땅 위에 세워진 공단이 구로1공단입니다. 공단이 조성되면서 구로동이 ‘가난에서 헤어날 수 있는 희망의 일터’가 되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살 곳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공단 근처 야트막한 언덕배기, 개천가 뚝방 밑에 판자로 대충 바람이나 막는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정부가 허름한 주택을 지어 노동자들이 살게 하였습니다. 그 주택단지는 ‘간이주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수출단지와 모여든 노동자로 해마다 수출은 늘었습니다. 1억불 달성이 10억불로, 1백억불로 금자탑을 쌓아갔습니다. 1공단만으로는 부족하여 2공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1968년,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산업박람회가 열렸습니다. 박람회 부지는 1공단과 안양천 사이에 있던 너른 들이었습니다. 그 들 주변에는 자그마한 야산이 둘러 있었습니다. 박람회부지를 만들기 위해 야산은 뭉텅 잘려나가 평지가 되고 없던 도로도 뻥뻥 뚫렸습니다. 정말 요술방망이라도 두드렸는지 황무지와 공동묘지가 사라지고 각종 산업기계, 생산물이 전시된 전시관, 체험관이 들어섰습니다. 경부선 영등포와 시흥역 사이에 산업박람회 간이역도 만들어졌습니다.
박람회장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이곳에는 설탕이나 조미료, 담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포장되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장이 있었고 각종 기계와 산업시설이 전시되었습니다. 각 전시장에서는 선물도 줬습니다. 벽돌로 지어진 전시장이 있는가 하면 그때는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는, 표주박을 반쯤 잘라 엎어놓은 모양의 바람집도 있었습니다. 좌우지간 그 박람회장에서는 온갖 첨단의 시설과 장비가 사람들 정신을 홀렸습니다. 게다가 복권도 팔았습니다. 별이 다섯 개가 그려진 복권을 뽑으면 그때 돈으로는 어마어마했던 거금 1백만 원을 줬습니다. 당연히 이 복권 파는 장소에는 기차보다 더 길게 사람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가리봉 오거리 (사진=서동석)
박람회가 끝나고 그 자리는 2공단이 되었습니다. 간이역이 있던 곳에는 뒷날 가리봉역(지금은 가산디지탈단지역)이 들어섰습니다. 구로동에서 가리봉으로 넘어가는 곳엔 역시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때 잘려나가고 메워져 차가 다니는 길이 났습니다. 지금 남구로역이 있는 곳을 구로동 원주민은 ‘구종점’이라고 하는데, 그 길이 나기 전엔 그곳이 길의 끝, 종점이었기 때문입니다.
60년대가 저물고 70년대로 들어서면서 3공단이 생깁니다. 경부선의 서쪽에서 안양천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곡창지대가 메워지고 공장이 들어섭니다. 경부선 위에는 다리가 놓였습니다. ‘수출의 다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들판이 메워지기 전에는 한가롭기 그지없던, 철따라 푸르렀다가 누렇게 변하는 들이었지요. 마을의 아이들은 들판을 지나 안양천으로 멱 감으러 다녔습니다. 안양천 바로 못 미쳐 큰 못이 있었습니다. 민물낚시터로는 참 좋은 곳이었고 참 아름다운 못이었습니다. 이곳이 메워지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안양천도 시커멓게 변했습니다. 안양천엔 메기며 모래무지, 동자개라고도 하는 빠가사리가 많았다면 믿겠습니까. 개천가의 참 고운 모래밭과 수초들이 이들을 품었던 안양천이었습니다.
공단이 넓어지면서 경기도 광명 철산리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구로동, 가리봉에 방을 얻지 못한 노동자들이, 3공단하고 가까운 이곳에 순전히 ‘잠 잘 곳’을 마련하였습니다. 집도 아니고 제발 방만이라도 제대로 된 그런 곳이 절실 했습니다. 등을 짓누르는 노동에서 잠시나마 풀려나 활개를 뻗고 쉴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소설가 신경숙도 3공단 노동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서 그려진 그때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수출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공단은 더 필요했습니다. 부천으로, 부평으로, 그리고 마산과 창원으로, 구미로... 공단이 생기는 곳에는 여지없이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세상과 부대껴야 했습니다. 자본가들과 맞부딪히고 자본가들을 지켜주는 관료와 경찰, 심지어 방범꾼에게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니 공장의 경비한테도 그래야 했습니다. 노동자를 위해 지어진 ‘기숙사’는 사실 노동자를 붙들어놓기 위한 수용소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외출이 가능하고 정해진 시간에 들어오지 않으면 공장의 경비가 일차적으로 으름장을 놓고 행세를 했습니다. 아주 못된 인간은 어린 여성노동자가 통금에 걸리도록 했으니까요. 내가 다니던 공장 맞은편에 ㅇ산업이라는 봉제공장이 있었는데, 철야작업하다가 그 꼴을 보고 욕을 해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저 남쪽 마산의 자유수출단지의 ㅎ합섬에는 먼 훗날 나의 아내가 될 여성노동자도 이런 서러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구로역에서 본 가리봉시장쪽 (사진=서동석)
남구로역에서 공단 쪽, 80년대 중반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장소로 자주 등장했던 가리봉오거리, 약칭 가오리라고 하는데요, 이곳까지에는 가리봉시장이 있습니다. 예전에 구로아리랑이라는 영화에 등장도 했고, 올해 최고의 흥행작이라는 영화 ‘아저씨’에도 등장합니다. 또 이제 막 개봉하려는 영화 ‘황해’에도 이 가리봉시장이 나옵니다. 가리봉시장은 공단노동자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공장이 쉬는 날은 첫째, 셋째 일요일이었습니다. 이때에는 기숙사에 있던 노동자들이 주로 구로시장 쪽으로 옵니다. 구로동엔 극장이 두 군데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계종복지재단이 운영하는 구로시립청소년수련관 자리에는 국일극장이, 구로시장 극동아파트 부근에는 한도극장이 있었지요. 극장은 노동자들이 쉬는 날 맞춰 ‘쇼’를 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라훈아, 남진, 김상진이 떴고요 우리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한풀이를 했습니다. 극장에서 나와 구로시장에서 주전부리를 하고 자신들이 만들었지만 자신들은 사 입을 수 없는 옷 구경도 하고, 신발가게도 들렀습니다. 그렇게 모처럼의 ‘부자기분’을 내고 돌아가는 길에 가리봉시장을 거칩니다.
가리봉시장 부근에는 ‘비둘기장’이라 부르던 쪽방집촌이었습니다. 주로 2층구조의 벽돌과 콩크리트집인데 한 집에 많게는 30개쯤의 방이 있었습니다. 달랑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은 시간차를 두고 방에 머물렀습니다. 서로 작업시간이 다른 노동자가 방을 얻으면 공간을 이용하기 좋으니 그리 했습니다. 그곳에서 연탄가스로 죽어나간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 거리에서 혁명을 꿈꾸던 운동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거리의 애환은 조선족동포들이 이어받고 있습니다. 지금 가리봉시장은 중국의 어느 거리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에선 연변말이 표준어입니다.
그나저나 왜 이곳에는 교회만 많고 절은 없을까요. 형편없는 기독교 교리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마음씀씀이는 그네들이 더 적극적이니 참 알 수 없습니다. 훌륭한 교리보다 고단하게 사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비의 실천’이 더 그리워지는 공장지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