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③ 노동운동에 눈 뜨다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입사한 다음 해 1978년 1월에는 대의원에 선출됨과 동시에 노동조합 조사통계부장을 맡게 됐다. 간부수련회 등을 통해 노동조합 활동의 영역을 넓히는 계기였다. 당시 대한전선그룹 노동조합은 민주노조를 지향하며 민주노조 논리와 전략을 체계화시키기 위해 서울대 출신을 기획부장(신금호, 민청학련 관련)으로 채용하면서 수도권 민주노조들과 연대를 실천했다. 민주노조라고 해서 선거의 형식(지부장이나 위원장 간접선거)이나 투쟁성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노조의 범주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국금속산업연맹 선거에서 어용 위원장에 맞서는 후보를 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태일열사 추모제에 참석하거나 연대를 주장하며 정기적으로 수련회 등 활동을 이어 가는 쪽이다. 금속노련 소속사업장 선거에서는 매번 민주파가 깨졌는데, 간접선거로 진행되다 보니 결함투성이였다. 연맹 권력을 잡은 김병용(기아자동차)은 대의원들을 회유할 뿐만 아니라 납치와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권력의 엄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장기집권은 당연했다. 여기에 도전하는 민주 후보는 한달수(대한전선)였다. 대한전선그룹 노동조합은 기획실장(신금호)을 채용하여 민주노조의 내용을 확보해 나갔으며 수도권 민주노조(섬유·금속)들과 공동교육 등을 조직해 나갔다. 새로운 바람, 공장새마을교육의 실체 1978년에는 농촌새마을운동의 여세를 몰아 공장새마을교육이 바람을 일으켰다. 노동조합이 공장새마을운동을 반기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그 이유는 공장새마을교육을 이수한 조합원은 월급을 1호봉씩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공장에서는 50여 명이 새마을교육에 참여했고 나도 그중 일원이었다. 새마을교육은 병영식이었다. 입소하자마자 제복(상·하의 감색 죄수복같이 생긴 옷), 신발, 모자를 지급했으며 철저한 규율을 앞세운 교육이었다. 새마을교육관은 구로공단본부 자리에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상의를 벗은 채 공단거리를 구보하면서 일과가 시작되고 밤 9시에 교육이 끝나 취침에 들어간다. 교육은 박정희의 신년사와 건전한 공장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창의성을 부각하며 QC(품질관리)를 강조한다. 품질관리는 생산성과 맞물린 문제로 당시엔 기업들이 QC에 사활을 걸었다. 대부분 공장이 수출이 살길이라 하고 있었으니 “자갈도 수출 한다”는 말이 회자되던 시기였다. 다량의 생산품을 수출하면서 납기와 수량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불량제품에 크레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타격은 시간이 갈수록 컸기 때문에 품질관리운동을 통해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동시에 노렸다. 나아가 애사정신을 키우며 국가에 헌신 봉사하는 정신을 앞세우는 이데올로기 교육이었다. 공장새마을교육의 결과에는 국가와 회사는 있으나 노동자는 없었다. 1주일의 공장새마을교육을 마치면 공장으로 돌아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데 첫 번째가 분임토의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운동권에 도입된 분임토의는 그 성격은 다르지만 공장새마을운동에서 차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분임토의는 현장별로 7~9명 정도로 구성해 분임장과 서기를 선출되고 주제선정에 들어간다. 주제선정에는 원칙이 있다. 분임원들이 해결할 수 있는 주제를 뽑는 것이 원칙이다. 주제를 주면 그에 따른 현상, 원인, 문제점, 해결방안, 결론으로 토론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 여기에서 분임원들이 ‘해결방안’을 마련할 수 없는 주제는 선정할 수 없다. 가령 품질이나 생산에 대한 어떤 문제해결 방안이 기계 탓, 자재 문제, 회사경영의 문제로 귀결되는 주제는 선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분임토의에서 나오는 결론은 “분임원들이 애사심이 없어서” “자신들이 게을러서” “제품생산에 관심이 부족해서” 등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문제가 야기되는 모든 것은 노동자 탓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자아비판’이라는 결과를 도출해 낸다. 3개월에 한 번씩 진행되는 분임조 경연대회는 사장이 참여하는 가운데 펼쳐지고 우승한 분임조에게는 포상이 주어진다. 분임조 활동이 집단적이라면 개별적으로 제안제도가 있다. 작업현장에서 일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제출하는 노동자에게는 상장과 상금을 준다. 상금을 주든 포상을 하든 회사 자금지출에는 변화가 없다. 인사고과제도로 상위와 하위를 갈라치고 포상에 지출되는 경비는 하위노동자 것을 뺏는 것이기 때문이다.
▲ 조합원들과 함께
▲ 양규헌은 산악회 활동을 하면서 조합원과 만났다. 해방정신 가슴에 담았던 전태일열사 추모제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나 ‘전태일’이라는 단어는 ‘용공’과 같은 것이었다. 정상적인 산업역군은 ‘민주노조’를 얘기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도산(도시산업선교회)과 맞물려 회사 조회시간에 이런 교육은 공공연히 강조됐다. ‘도산’은 회사를 도산시키는 집단으로 규정했고, 노동자가 그들과 어울리면 신세 망친다고 했으며, 다수의 노동자는 그렇게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11월 전태일 추모제는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했고 참석하는 활동가들도 엄선해야 했다. 금속노련 민주노조 활동가들조차 전태일이 누구인지 모르다가 전태일 추모제를 거치며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한 동지는 여성동지가 낭송하는 추모시 ‘전태일 선배에게 바치는 시’를 듣고 현장에 돌아와서 조합원들에게 “너 혹시 전태일 누나가 누군지 아냐?”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노동운동의 현대사는 지하 깊숙이 갇혀 있었다. 후에 그 동지에게 왜 전태일 열사를 여성으로 생각했는지 물어봤다. 대답은 “추모시를 낭송한 여성이 전태일 선배라고 해서 당연히 전태일 열사는 여성”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누나, 오빠로 통용되던 시기에 선배라는 낯선 호칭은 그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1979년 전태일 열사 추모제는 11월 초, 일요일에 진행됐다. 민주노조를 자처하는 노조 활동가들이 비밀리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가남휴게소’에 모였다. 가남휴게소는 지금의 여주휴게소로 기억된다. 1970년대 말에는 영동고속도로가 없었고 국도밖에 없었고, 서울에서 출발하면 남한강 가기 전 왼쪽에 작은 휴게소가 나오는데 그게 가남휴게소다. 휴게소에서 만난 몇몇 동지들은 남한강 아래 다리 밑까지 걸어가서 다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일행들이 도착하면 샛강을 건너 산속으로 들어간다. 11월의 낮은 길지 않았고 산속은 소나무 잎을 가르는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가 추위를 더욱 부추겼다. 집에서 아침 일찍 나서서 서둘렀지만 산속에 들어가서 추모제를 시작할 때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목소리 톤을 낮춰 전태일 추모가를 부르고 추모사를 하고 추모시를 낭송했다.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촛불은 원형으로 서 있는 동지와 동지에게 전달돼 어두운 산속이 촛불로 환하게 밝아지면 살아있는 민주노조 활동가들이 전태일 열사에게 결의를 밝힌다. “전태일 열사의 해방정신을 계승하겠다.” 나에게는 최초의 촛불집회로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