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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강 노동자 파업투쟁
⦁ 시기 : 1980년 4월 28일 ~ 1980년 5월 5일
⦁ 요약 : 1980년 당시 노동조건이 터무니없이 열악했던 동국제강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회사 사무실에 불을 지르며 격렬하게 투쟁했다.
1980년 들어 전국에서 파업, 농성, 시위, 방화, 파괴, 점거, 태업, 잔업 거부, 진정, 점식식사 거부 등 노동자들의 격렬했던 투쟁 가운데, 1970년대의 노동운동 양상과는 사뭇 달랐던 동국제강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다.
동국제강은 부산과 인천에 공장이 있었는데, 부산공장에서는 관리직 사원 200여 명과 생산직 노동자 2,600여 명 등 총 2,800여 명이 8시간 3교대제와 12시간 맞교대제를 동시에 실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중 구정과 추석을 빼고 휴일이라고는 하루도 없었음에도 2년 근속자 월 급여가 고작 84,000원이었다. 게다가 하루 결근하면 8,000원을 공제했고, 일요일에는 4,000원을, 1~2분만 지각에도 1시간분 임금을 삭감했다. 작업조건도 매우 열악해 공장 안은 항상 38~40도에 이르는 높은 온도였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신입사원을 뽑아도 1~2년 만에 90% 이상이 퇴사해 버려 40대 이상의 중년 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1977년 노동조합을 조직하려 했지만 회사의 강경한 탄압과 주동자 회유로 무산됐다. 임금도 1978년 12월 15.6% 인상한 뒤 1979년에는 전혀 오르지 않았고, 1980년에는 부산시 직권중재로 고작 15.4% 인상하는 등 최저생계비 수준마저 보장하지 않아 노동자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1980년 4월 28일, 부산시가 직권으로 임금 15.4% 인상을 단행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여들어 △임금 40% 인상 △상여금 200% 인상해 관리직 사원과 동일하게 400% 지급 △공상자 임금 현행 60%에서 100% 보장 등을 요구하며 전면파업 후 농성에 돌입했다. 4월 29일에도 회사에서 응답이 없자 노동자들이 회사 사무실 및 인사기록 카드와 경리장부 등을 보관한 계근실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등 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사태수습을 위해 서울에서 이준호 부사장이 급히 내려왔으나 노동자들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한 채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격분한 노동자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회사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이날 밤 8시 45분, 120여 명의 기동경찰이 출동해 회사 정문에서 2백 미터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시내 진출을 차단한 뒤 소방차 7대를 대기시키는 등 진압태세를 갖췄다. 850여 명으로 증원된 경찰과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온 노동자들의 일대격전이 벌어져, 8명이 연행되고 6명이 구속됐다.
1980년 4월 30일 오전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에 진입했지만, 회사와 교섭할 대표들이 모조리 연행되고 없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각 부서에서 선출한 100여 명으로 협의기구를 구성해 △1979년 인상분 20% 포함 임금 56.5% 인상 △근로조건 개선 △퇴직금 누진제 시행 △노조결성 지원 △현장노동자와 일반사원 간 차별대우 철폐 등 총 9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사장과 교섭에 들어갔다. 회사는 임금 30% 인상 외 모든 조건을 수락했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투쟁해 갔다. 그러나 결국 방화에 대한 책임추궁, 경찰의 협박, 회사 쪽의 회유로 5월 5일 투쟁을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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