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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묘역에 가면 저 뒤에 노동자들만 조르르 묻혀 있거든요. 사람들이 왔다가 앞쪽만 보고 가버려요. 그러면 그 영령들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속상하겠어요....”
망월동에도 계급이 있다? – 정향자 전남제지 노조 위원장 이야기
이재성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작년에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 愛>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와 맞서 싸웠던 민중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지도부나 지식인의 증언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체험을 근거로 역사를 새롭게 조명했다. 광주 ‘민중항쟁’은 1997년에 국가에 의해 기념일로 지정되면서 ‘항쟁’이란 용어는 점점 사용하기 어렵게 되고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식으로 체제 내 사회운동의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09년 경부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기념 행사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는 일마저 발생하여 기념식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5월 광주’의 해석과 관련하여 사회적 쟁점은 계속 변화해 왔다. 초기에는 이 사건의 성격과 평가를 둘러싼 주제가 중요한 논점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가 중요했고, 피해보상 및 명예회복 문제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논점이 변화해 간다고 해서 이전의 문제들이 깔끔하게 해결되어 정리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여전히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 역사기념으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의 이야기인 <오월 愛>는 하나의 좋은 사례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광주’를 겪었던 한 노동운동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정향자 선생. 1952년 좌익 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으나 사회에 대한 의식 없이 1970년 전남제사 노동자로 입사. 성추행을 당하던 동료를 돕는 과정에서 성당에 나가게 되고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회원이 되고 노동운동을 시작, 전남제사에서 19명에게 JOC 투사선서를 받아낼 정도로 열성적인 활동가로 성장. 섬유 산별 아래의 16개 사업장 중에서 10개 이상 사업장에 JOC 소모임을 조직하였고, 결국 1974년에 전남제사 노조지부장 선거에 도전하여 무효 한 표를 제외하고 100% 찬성으로 여성 지부장으로 당선. (전국 최초의 여성지부장은 1972년 동일방직의 주길자이지만, 동일방직의 1대, 2대 지부장은 핵심 활동가가 아니었다는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정향자 선생의 이력은 대단히 역동적이다. 1980년 5월의 현장에서 최후의 순간 직전까지 도청을 지키며 투쟁했고, 그 후 5.18동지회 활동과 노동운동을 겸하면서 육아와 가정이 위태로워질 정도로 운동에 헌신했다. 1984년에 자발적으로 퇴사와 동시에 현장 활동을 접었으나 이내 광주노동운동협의회,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등 지역 노동운동으로 복귀하였고, 민주노총지역본부 지도위원을 역임하는 등, 오늘날까지 노동, 여성, 실업, 인권 관련 사회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광주 항쟁 당시 선생의 체험은 ‘5.18’의 계급적 성격을 재조명한 홍희담의 소설 [깃발](1988)로 형상화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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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투쟁의 현장에 서 있는 정향자 선생 _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하지만 오늘날 노동운동사 저서 및 연구논문에서 전남제사나 정향자 선생의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가 없다. 방현석의 [아름다운 저항](1999)에서 “광주 노동자들의 투쟁 1980년 5월”이라는 짧은 기록과, 박수정의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2004)에서 다룬 구술생애사 기록이 가장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1980년 광주항쟁을 ‘민중항쟁’이라고 명명하면서 그 변혁적 성격을 강조하는 논의에서조차도 구체적인 노동자들의 활동 내용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시민군이나 희생자들의 계급적 분류 통계자료를 통해서 볼 때 ‘노동자와 민중’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근거를 대고 넘기는 정도이다. 결국 서술은 다시 윤상원 등의 지식인 및 조직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사실 수 많은 공장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례들은 책으로, 자료로만 볼 때에는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다 똑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각 사례가 별 다를 게 없이 느껴진다. 그럴 때에는 뭔가 ‘튀는’ 사례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농성, 폭행사건, 점거, 대규모 공장 등등 극적인 사례가 중요하게 보인다. 한 번 사례가 조명을 받게 되면 계속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재생산되면서 점점 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오늘날 민주노조 운동의 기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스펙터클’에 집중되어 있을 뿐, 어떻게 그러한 폭발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주로 신민당사 농성을 한 YH 노조사건이나, 똥물사건과 속옷시위 등으로 알려진 동일방직 등등이 언급될 뿐 이다. 사실상 ‘속옷시위’가 ‘나체시위’라고 계속 쓰여지고 있는 것도 부지불식중에 작동하는 ‘센세이셔널리즘’의 흔적이다. 다른 수많은 노조의 투쟁사, 일상사는 덜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며 잊혀지고 있다. 수도권이나 울산, 마산, 창원 등과 같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아닌 지방도시들의 노동운동은 지금껏 제대로 연구되지도 평가 받지도 못해 왔다. 1980년 중반의 대대적인 노학연대와 노동운동의 이념적 성장에 강조를 두다가, 노동운동의 종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과도하게 평가절하시켜 버렸다.
“기숙사에 있으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요일모임을 만들었어요. 1호실부터 4호실까지는 월요모임, 몇 호실에서 몇 호실까지는 화요모임 이래가지고 뺑뺑 돌아가면서 교육을 했죠. (…) 서울에서 받은 교육 내용, 신문에서 본 내용, 박정희 정권의 잘못된 점, 긴급조치, 유신독재 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토론했죠. 동일방직 등 다른 사업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현실감 있게 얘기하고. 마산공단 여성노동자들의 생활을 조사해 공부하면서 다국적 기업의 문제, 쪽방의 이중생활도 얘기하고.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노동은 신성하다, 우리가 당당하게 살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했죠. 낮은 수준에서 자본론도 공부했어요. 물론 그때 당시로서는 낮은 수준은 아니에요.”([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253쪽)
이것이 1974년 지부장 선거 이전의 이야기이다. 지부장이 된 이후 정향숙 선생은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광주지역의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당시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개신교 NCC 계통의 그룹, 헌정동지회 그룹, 녹두서점 그룹, 현대문화연구소 그룹, 엠네스티 그룹, 양서협동조합 그룹, 해직교수 그룹, YMCA와 YWCA 그룹,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여성노동자 모임, 송죽회 그룹,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팀 등 약 15개 단체가 주도하고 있었다. 들불야학이나 백제야학 등의 노학연대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이 전두환 측의 계엄확대 및 강경진압 과정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지역 민주화운동의 힘을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실상 지식인과 조직 중심의 활동가들은 예비검속 등을 피해 지하로 도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기의 항쟁은 지역 민중들에 의해 비조직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 날부터 계속 시위를 하고 따라다니는데 제가 굉장히 무서웠던 건 계엄군도 아니고, 총도 아니었습니다. 어제까지 늘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논의했던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거, 혼자 동그마니 남아 누구하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떨림으로 오더라고요. (…) 그러니까 지도부라는 사람들은 다 잠수를 했든지 빠져나갔던지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위의 책, 263쪽)
조직적으로 수습위원회가 조직되는 22일까지 최초의 차량시위로부터 시민군의 투쟁과 소위 ‘절대적 공동체’, ‘해방공동체’의 형성은 거의 민중들 자신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었다. 이 점을 인정하는 집단의 경우에도 민중은 인격적 주체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 추상화시킬 따름이다. 그리고 다시금 윤상원 등의 지식인과 조직이 시대를 대표하게 된다.
“저는 그래도 지금 운동을 하고 일을 하기 때문에 정향자 하면 5.18 때 무엇을 했다 이런 부분이 조금 조명되지만 정말 그 이전에 같이 했던 노동자들은 완전히 묻혀졌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세상은 바닥에서부터 빡빡 기는 어려운 일을 다 한 여성들의 역할, 노동자들의 역할을 조미료 같은 역할, 부속품 같은 역할로 취급해 버려요. 그게 무척 안타깝습니다.”(위의 책, 260쪽)
그래서인지 영화 <오월 愛>에 등장하는 분들의 증언은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증언을 부탁하는 영화감독에게 ‘왜 이런 쓰잘때기 없는 일을 하느냐’고 역정을 내고 인터뷰를 거부하거나, 텅 빈 눈빛으로 과거를 응시하면서 ‘내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럴만큼 현실의 고통은 저리다. 그들은 여전히 삶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자신의 투쟁을 긍정하고, 다시 그 역사를 증언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부한다. ‘기억해 달라’고. 하지만 이건 단순히 누군가를 기억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여 기억하고, 어떻게 기념하고, 또 반대로 무엇을 선택적으로 망각해 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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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 2011년 시무식 _ 사진 : blog.daum.net/ideaba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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