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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1)
박창수 열사 부모님 황지익, 김정자 이야기
정경원 받아 적다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2002년 노동자역사 한내의 전신인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시절 박창수 열사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전노협’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부모님. 1991년 5월 안양병원에서의 일과 박창수 열사 장례 투쟁,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 곡절 많은 삶에 대해 몇 시간동안 말씀을 이어가셨다. 이번에는 두 분의 만남을 정리했다.
운명적 만남
어머님의 고향은 부산이다. 아버님은 강화도. 아버님은 “내가 눈이 멀어가지고 끝에서 끝이 만났다고” 하신다. 1966년경 두 분은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만나 연애 하셨다. 당시 젊은이들은 몰래 숨어서 연애 했지만 그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두 분의 연애는 장독대와 하숙집 창문을 통해 힐끗 넘겨보다가 한두 마디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 불붙었단다.
김정자> 아버지는 공군 제대하고 부산에 직장을 가진 거야. 아버지 하숙한 집이 우리 집하고 붙어 있었어. 하숙하는 집이 몇 층이니까 창문을 내려다보면 우리 집 장독대. 빨래 같은 거 널고 그럴 때 서로 내다보고 이야기 하고 그러면서 딱 만났지. 아버지가 젊었을 때 인물이 참 좋았어. 나는 창수가 있었잖아. 아버지는 총각이었잖아. 아버지는 그래. 내 하나 후퇴하면 둘 살린다. 나도 젊은데... 친정에 있었다고. 나도 시집은 안 갔거든. 안 가도 애가 있으니까. 친정엄마가 인물 좋지, 키 크지, 총각이지, 안 된다는 거야. 저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사람 데리고 살 거냐, 이용할라 그런다, 객지고 하니까 이용하려고 그런다. 안 된다는 거야. 그래도 만나가지고 극장 구경도 가고 그러니 정이 들어가지고 나도 되게 좋은 거야. 서로는 불이 붙어서 좋은 거지. 창문 내다보면서 서로 알았잖아, 그게 연애야.
그렇다고 몰래 눈길만 주고받은 건 아니다. 진한 회색 물을 들인 투피스를 입고 나가 영화도 봤다.
김정자> 연애할 적에 영화구경을 갔다. 흰 고무신 코 예쁘게 올라온 신 신고 옷은 뭘 입고 갔냐 하면 생각만 해봐, 회색 좀 진한 거, 다이드 스커트에다가 얼마나 멋있어. 그때는 흉이 아니었어, 그게. 그래도 투피스야. 그걸 입고 고무신 신고 극장 구경을 갔어. 이 남자는 퍼런 곤색 운전수들 입는 거 같은 거 딱 입고 고무신 신고 나왔어. 그러니 난 흠이 안 되지. 난 좀 세련되게 투피스 입고 나갔다는 거잖아. ‘황포돛대’를 보러 갔는데 그게 또 슬프잖아. 지금은 다 잊어먹었는데, 죽고 해가지고 강에 가서 뿌리고... 슬프잖아. 막 울고 그랬어.
그 때 두 분이 본 영화는 ‘황포돛대’였다. 1960년대는 5.16쿠데타 이후 정부의 검열과 규제로 예술성보다는 청춘물, 멜로물 등 상업성을 띤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황포돛대’는 1966년 작품으로 강찬우 감독, 이경희?김운하?김진규?태현실 등이 출연했다. 내용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하다. “사랑하는 그와 헤어진 그녀는 그의 아들을 낳지만, 사생아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들을 그에게 보내고, 자신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딸을 낳는다.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아들과 딸을 장성하여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거센 반대에 부딪힌 그녀의 딸은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그녀를 어머니로 모시기로 한다.” 요즘 드라마는 1966년 영화 속 이야기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어머니는 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냥 집에 갈 수 없었다. 영화를 본 후 용두산에 올라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정이 들었다. 그날 이후 두 분은 따로가 아니라 늘 함께하신다.
김정자>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은 내 처지를 생각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잖아.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다 그렇게 될 거야. 저게 영화다 그러면 눈물이 안 나지만. 그래 울고 나와 가지고 그때는 다방이고 어디고 갈 줄 몰랐어. 용두산에 갔지. 벤치에 앉아. 오륙도가 내려다 보이고.... 의자에 앉아서 얘기를 했잖아.
황지익> 그때 과거 얘기를 다 하더라고 나한테. 참 일본서 나와 가지고 아버지 일찍 이렇게 이렇게 돌아가시고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엿 잘라 먹고 늘려 가지고 팔기도 하고....
김정자> 불쌍해서 동정을 한 건지, 그거야 알 수 없지. 그래 살자 하대. 살자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미끼를 던졌지. 우리 집에 가자고.
황지익> 그런데 몸으로 던지데, 나한테.
김정자> 내가 그때 민화투는 좀 알아도 육백 같은 거 이런 거 전혀 몰랐거든. 용두산에서 내려와서 광복동 미화당 백화점 쯤에서. 용두산 내려오면, 아버지는 저리 가야 되고 나는 이리 가야 되는데, 내가 우리 집 가서 화투 한 판 치고 갑시다. 내 그랬다. 화투 한판 치고 갑시다. 그래요. 왔어. 화투를 치는데 칠 줄 아나 아버지는 조금 치드라. 육백을 치재. 할 수가 있어야지. 적어주데. 그래서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하니까 모르잖아, 나중에 보면 내가 졌어. 그래가지고 밥을 해줘야 하는데 해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짱께이 불렀어. 그때 짬뽕 먹었지 싶어.
황지익> 난 짬뽕이고 당신은 울면이야, 그때. 간다 그러니까 내 입을 쫙 맞추는 거야. 참 나...
김정자> 그래 먹었다, 간다고 일어나데, 그래서 가실라고요. 부산말로 나 그때만 해도 진짜 부산말, 가실라고예~ 하고 나도 딱 일어났어. 엄청 키가 크드라. 지금은 그냥 맞춰도 될 거 같애. 그때는 내가 이리 해가지고 (발을 돋고 팔을 뻗어) 꼭 맞췄어. 나도 한참 불이 붙었잖아. 꼭 맞췄더니, 그랬더니 반응이 좋데~. 싫으면 간다 하고 갔을 건데 딱 잡고는 안 놓는 거야. 한~참 잡고 있었어. 부산 말로 누버 자자!
“그날 첫날 밤 치르고 시아버님 환갑 때 가서 상 물리치고 거기서 친척들 있는 데서 식을 올린 셈이지. 안 그랬으면 총각으로 있을 건데.” 어머니의 연애 이야기는 이렇게 일단락된다.

2006년 6월 3일 두 분의 고희연이 열렸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주 그리고 1991년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모였다. 어머니의 고운 목소리, 아버지의 굵고 안정된 노래가 내내 울렸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