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⑫ 원태조 박성호 열사 투쟁 파업현장 공권력 침탈에 분신으로 항거 1990년 1월 전노협이 건설되고 난 뒤 민주노조에 대한 지배세력의 공격은 더욱 강화됐다. 1990년 8월 말, 안산지역에 있는 금강공업이 파업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 공권력이 침탈했다. 공권력을 막아내기 위해 원태조, 박성호, 정만교 동지가 휘발유를 온몸에 뿌리고 저항하던 중 경찰이 다가와 라이터를 뺏으려고 하는 사이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두 동지가 쓰러졌다. 이 사건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이 빚은 ‘미필적 고의’였고, 원태조, 박성호 동지는 70% 이상의 화상으로 중태에 빠졌다. 지역에 공투위가 꾸려졌다. 경기노련 의장이 구속돼 있었으므로 사무처장인 내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가두 투쟁과 병원 사수투쟁이 매일 진행됐다. 공투위 동지들은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전술을 논의하고 평가를 해가면서 지역의 결의를 모아 투쟁의 파고를 높여나갔다. 분신 일주일 째 원태조, 박성호 동지가 위독해지자 한강성심병원으로 거점을 옮겼다. 투쟁본부는 거점을 두 곳으로 분산했다. 1990년 여름 장마는 지루했고 연일 퍼붓는 폭우는 세상을 집어삼킬 듯했다. 영등포역에서 영등포시장을 거쳐 한강성심병원 가는 길은 온통 비에 잠겨있었다. 영등포시장을 지나는 길은 보이지 않고 온갖 오물들이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영등포시장은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고 헤엄치듯 한강성심병원을 향해 물길을 헤집고 나아갔다. 온몸을 둘둘 감은 붕대 속에 갇힌 동지들 몸은 퉁퉁 부어있었고, 치료시간이 되면 비명이 병원을 찢을 듯했다. 화상 치료는 진물이 말라붙은 딱지를 매일 깎아내고 그 위에 알코올로 소독을 하는데, 그 통증은 의식이 가물거리는 화상 환자에게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열사투쟁 와중 경찰 사망으로 수배자 신세 9월 11일, 병세가 악화된 박성호 동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동지들의 죽음을 공권력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고 가투를 결정했다. 일요일 안산 라성호텔 사거리 가투는 노동자들과 경찰병력의 공방 속에서 장시간 투석전, 화염병 투척으로 한 치의 양보 없이 진행됐다. 경찰병력이 라성로터리를 점거하고 휴식하는 사이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에서 일제히 화염병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북쪽에 유지하고 있던 투쟁 대오가 밀려오자 당황해서 일제히 직격탄을 쏘기 시작했다. 이때 남쪽에 있는 백골단이 “공격 앞으로” 외치며 투쟁대오를 향해 달려가던 중 지휘하던 경감이 푹 쓰러졌다. 금세 경찰백차가 쓰러진 경감을 싣고 갔다. 온종일 벌어진 가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은 최루가스 냄새가 진동했다. 라디오 뉴스에서 경감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집에 들어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날 집에 들어간 경기노련 간부들은 일제히 체포됐고 그들에게 씌운 범죄혐의는 ‘상해치사’였다. 그날부터 나는 상해치사 혐의로 수배돼 숨어다니며 활동하는 신세가 됐다. 철저한 보안 속에 비밀리에 활동 이어가 당시 노동자에게 ‘수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활동을 막으려는 탄압의 일종이기 때문에 수배 중에 체포되는 것은 수치와도 같았다. 그래서 보안에 민감해야 하고, 자신을 지켜내며 활동하기 위한 노력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필요했다. 활동을 안 하고 깊이 숨어있으려면 수배 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소독’이라는 걸 늘 염두에 둬야 하고, 회의에 참석하면 다른 동지들까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회의 장소와 시간을 미리 정하거나 공개할 수 없었고, 모든 것이 비밀리에 진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 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을 병행해야 했으므로 외진 곳에서 지부 간부들과 비밀리에 만나 조합 활동을 평가하고 대책을 수립하며 투쟁의 결의를 모았고, 지역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