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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타이어 노동자들 투쟁(1994년 6월)
1994년 금호타이어 노동자들 투쟁의 배경
금호타이어 노동자 10여 명은 1993년 12월 28일부터 1994년 1월 8일까지 노동조합 정상화와 조합원 최소한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농성자 전원이 8~11kg씩 몸무게가 줄고 혈압이 떨어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지만 회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농성자들은 단식투쟁을 정리하면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각오로 제2의 결사 투쟁을 결의하고 본사 상경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지난한 투쟁에도 1994년 임금인상·단체협약 협상에 임하는 회사측의 태도와 조합원에 대한 대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노조에 대한 회사측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회사는 노조 사무실쪽의 남문을 봉쇄했다. 회사는 “중문을 새로 만들어서 남문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노조로부터 조합원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게다가 현장에 예전에는 없었던 공고가 나붙었는데, 바로 “방위산업체이기 때문에 근무자 이외의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임단협 갱신투쟁 과정에서 현장순회를 강화하려는 노조 집행부와 대의원의 일상활동을 방해하려는 의도다. 교섭위원들의 정문 출입조차 봉쇄했는데, 6차 교섭을 위해 봉고차를 타고 교섭장으로 가던 교섭위원들을 막고 20여 분 동안 정문에서 대기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회사측의 행태는 조합원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고, 1994년 임단협 갱신투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원인이 됐다.
임단협 쟁점은 최저생계비·노조활동·임단협체결권
당시 금호타이어는 노동자들이 일요일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다. 총매출액이 1989년 약 3,200억에서 1990년에는 5,000억, 1991년에는 6,400억, 1992년에는 8,200억, 1993년에는 8,800억으로 놀랄 만큼 성장했다. 또 1993년에는 ‘수출 5억불 탑’을 수상했으며, 국내 타이어업체 최초로 ISO인증을 획득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회사가 이렇게 발전하는 동안 현장 노동자들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무수한 산업재해, 교대근무의 열악함으로 발생하는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노조는 1994년 임단협에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요구했다.
회사는 정상적인 노동조합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간부가 현장을 순회하는 것도 관리감독자들이 가로막았고, 노동조합 공고문도 찢어버렸다. 조합원이 직접 선출한 지부장을 해고하는 징계위원회에 노동조합은 참가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조합은 △노조활동 보장 △징계위원회 노사동수 구성 △해고자 원직 복직 등을 요구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노조 간부 17명이 불법쟁의, 선동 및 배후조정, 업무방해 등의 사유로 해고)
한편 1987년에 노동조합 선거를 직선제로 바꾼 이후 7년 동안 위원장이 무려 8번이나 교체됐다. 노조 위원장 임기가 3년인데도 평균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임단협 과정에서 회사가 직권조인을 강요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노동조합은 직권조인 강요 없이 총회를 통해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할 것도 주요한 요구로 내세웠다.
[금호타이어노동조합 1994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투쟁 목표와 요구안]
○ 1994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목표
- 각종 수당과 실질임금 상승을 통한 생계비 확보
- 조합원 복지 증진과 휴일, 휴식 시간 확대
- 인사 경영 참여와 조합활동 보장
-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을 통한 조직력 강화
○ 1994 단체협약 주요 요구안
- 조합활동보장 : 대의원·상집 등 노조 간부의 노조활동 보장과 조합원 교육시간 확보
- 입사와 동시에 조합 자동가입 : 조합원 범위를 수습과 업무직·여사원까지 확대
- 퇴직금 누진제 : 근속 연수에 따라 누진 수 가산해 지급
- 무주택 융자 확대 및 사원주택 500세대 건립
- 징계위 노사동수 및 해고자 전원 원직 복직
- 임금 테이블(직군·호봉급) 조정
- 근속수당·가족수당 등 현실에 맞게 조정
1994년 단체교섭의 전개
노조는 4월 9일부터 단체협약안을 마련하기 위해 조합원 설문조사, 여론 수렴을 위한 현장 순회, 조사 출장 등을 시작했다. 4월 28~29일 간부수련회와 5월 2일 상근자 토론, 5일 운영위와 상집 심의를 거쳐 5월 6일 대의원회의에서 단체협약 개정안을 최종 확정했다.
5월 9일 노조는 회사측에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요청하고, 13~15일 단체협약 개정안 설명회를 열었다. 교섭은 16일과 19일로 예정되었으나, 회사측은 준비가 안 됐다며 두 번 다 일방적으로 연기해 버렸다. 다시 잡은 23일도 회사측 요청으로 연기해 25일에야 겨우 1차 교섭이 이루어졌으나 상견례에 그쳤다. 27일 2차 교섭에서는 조합원 총회의 최종 결정권을 둘러싸고 위원장의 체결 권한에 대한 인정 여부를 놓고 난항을 겪었다.
5월 29일, 6월 2일, 9일, 10일까지 3~6차 교섭도 체결권 시비가 이어졌다. 이토록 회사의 지연 전술로 교섭에 진전이 없자 노조는 6월 7일 상집에서 적극 투쟁을 결의하고 6월 8일 대의원대회에서 참석 대의원 60명 중 55명의 찬성으로 쟁의발생을 결의해두었다. 노조는 다시 13일로 교섭을 요청했으나 회사측이 거부했고, 15일 7차 교섭 역시 노조 부위원장 징계위 회부 문제와 체결권 시비로 난항을 겪었다.
단체교섭을 지연하는 데 조합원의 분노가 누적되자 회사는 조합원들의 분위기를 위축시키기 위해 정광채 노조 부위원장을 ‘명령불복종’, ‘불법 선동’ 등의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징계위는 별관 3층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징계 철회를 외치며 달려온 300여 조합원들의 항의와 원천봉쇄로 열리지 못했다.
6월 16일 8차 교섭은 사측이 “임단협이 완전히 합의될 때까지 조합원 선동과 행동지침 등 투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정서를 요구하며 “이 문제가 선행되어야만 교섭에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진전 없이 끝났다. 21일 9차 교섭은 생산량과 이후 일정 문제로, 24일 10차 교섭은 생산량과 총회 문제로 결렬됐다. 노조는 24일 ‘1994 단체협약 갱신투쟁 승리를 위한 출정식’을 열어 이후 투쟁을 결의했다.
파업 돌입
6월 24일을 전후해 회사 주변에 경찰 배치가 목격되고, 관리자들은 공공연하게 ‘폐업’ ‘직장폐쇄’ 운운하며 악선전으로 조합원을 자극했다. 6월 24일 오후 10차 교섭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생산 활동을 거부했다. 그러다 트럭 7대 분량의 주요한 서류와 집기가 회사에서 반출되는 것이 목격됐다. 노조는 ‘예정된 파업 찬반투표를 통한 파업 돌입’과 ‘불법 파업 강행’ 중 결단을 내려야 했다.
25일 오전 1,500여 명의 조합원이 모여 노조의 결단을 기다리며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11차 교섭이 결렬됐다. 드디어 오후 2시 파업선포식을 열었다. 곡성공장 조합원 600여 명도 자체 집회를 한 뒤에 송정공장으로 이동했다. 조합원들은 공장 안으로 속속 집결해 규찰대와 선봉대, 정당방위대를 중심으로 각 출입문을 통제했다.
한편 현장은 관리자들이 전부 나가고 이사급 이상 10여 명만 본관에 잔류해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언론은 “대검찰청의 보고에 따르면 노동조합에서 관리자들을 감금, 폭행하고 있어 공권력 투입이 불가피하다”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금호타이어노동조합 파업 선언문]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 더 이상의 억눌림은 우리 노동자를 벼랑으로 모는 것이다. 다 함께 떨쳐 일어나 당당하게 외치고 온몸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투쟁의 한길로 힘차게 나서야 한다. 우리에게 몰아치던 탄압을 저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자 이제 가자! 투쟁의 깃발 높이 들고 완전 승리의 그날 향해 총단결 총투쟁으로!
그동안 거짓 선전과 기만적인 술수로 조합원의 분열을 획책하면서 억압적인 노동 통제와 저임금으로 우리 조합원들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해 왔는데 이제는 3,500 조합원이 하나로 단결하여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굴레를 깨고 정당한 자기의 몫을 투쟁으로 쟁취해 내는 전진하는 노동자로 우뚝 서자! 패배와 굴종, 억압과 착취의 세월을 깨고 1994 단체협약 완전 쟁취를 위해 3,500 조합원의 이름으로 1,000만 노동자의 투쟁 의지로 총파업을 선언한다.
1994년 6월 25일
(주)금호노동조합 위원장 장영렬
26일 오전 도경 회의에서 ‘새벽 4시를 기해 공권력을 투입’하기로 결정됐다는 도청 출입 기자의 제보가 들어왔다. 집행부는 오후 5시에 기자회견을 열어 KBS, MBC, SBS 방송 3사와 언론사가 참여한 가운데 ‘언론의 오보에 대한 시정, 파업의 배경, 현재 진행과 이후 교섭 촉구와 협상 재개를 통한 조업 의사’를 밝혔다. 기자회견 도중 헬기 정찰이 계속되고 대표 이사, 전남도경, 시장 등의 명의로 ‘불법파업’이라는 내용의 선전물이 살포됐다.
이날 오후 3시 광노협은 비상운영위원회를 열어 금호타이어와 관련한 각 현장 선전 작업과 노조별 성명서 발표, 사업장별 간부 결의와 조합원 1인당 라면 2개 이상 모금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이와 함께 공권력 투입 시 노조별 항의와 함께 6월 27일 오후 2시 전남도경 항의방문, 7월 1일 국민대회 등을 벌이기로 했다. 회의를 마치고 ‘금호노동조합에서 드리는 글’ 1만 부를 광주 시내과 터미널, 금호 사원아파트 등지에 배포했다.
6월 26일 오후 11시 공권력 투입설이 임박한 가운데 12~1시 사이 노조 장영렬 위원장과 신호식 부위원장, 김옥진 조직부장, 3명에게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고 64명으로 검거 전담반이 편성됐다. 6월 27일 새벽 1시, 경찰의 중재로 27일 12시까지 위원장과 사장이 교섭하기로 합의하고 공권력 투입은 일단 유보됐다.
이에 따라 파업지도부는 오전 9시에 회의를 한 뒤에 10시 30분부터 송정리에 있는 호텔에서 회사측 김명 송정공장 생산담당 이사와 노조측 최명선 사무국장, 류금 교육부장이 참여한 가운데 실무 교섭을 시작했다.
노조는 파업 동안의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고, 퇴직금 누진제에 합의한다면 바로 정상조업에 복귀하고 교섭을 재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민형사상 책임은 반드시 묻겠으며, 특히 파업 돌입 시 회사 관리자에 대한 폭행은 반드시 처벌해야 하며, 퇴직금누진제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교섭은 결국 결렬됐다.
실무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본관 앞에서는 ‘파업을 계속 강행할 것인가’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벌여 조합원 3,364명 중 2,269명이 투표에 참여, 2,197명(97%) 찬성, 72명 반대로 파업을 계속하자고 결의했다. 6월 27일 오후 회사 박정구 부회장은 노조의 요구안을 수용할 수 없다며 ‘선 조업 후 교섭’ 입장을 고집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노조는 언론사에 ‘교섭 결렬에 대한 입장’을 알렸다.
한편 교섭 시 위원장과 부위원장에 대한 신변이 보장되지 않자 조합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노동부, 근로감독과장, 감독관들은 신변보장을 약속했지만, 경찰과는 합의가 안 된 상태였다. 이날까지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노조 간부와 조합원은 장영렬 위원장, 정광채 수석부위원장, 최명선 사무국장, 신호식 곡성지부장, 이삼자 대의원(교섭위원), 김옥진 조직부장, 정두희 해고자(광해협 부의장), 배현수(선봉대, 노조 위원장 선거 때 장영렬 위원장에 앞서 민주후보로 선출됐으나 회사에서 징계위에 회부하는 등 사퇴압력을 가함으로써 후보에서 사퇴) 등 8명으로 이후 제2지도부까지 포함돼 있었다.
공권력 투입 공방
6월 28일부터 공권력 투입이 기정사실로 되면서 노조와 경찰의 공방이 치열해졌다. 11시경 경찰병력 400명이 정문 앞으로 전진 배치되어 정문과 중문 사이를 차단하는 한편 공장을 빠져나가는 조합원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날 낮 12시 MBC 뉴스에서는 “공권력 투입은 현장 내 인화물질 때문에 신중히 검토 중이며 금호타이어노조에서는 학생들과 연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박정구 부회장과 노조 위원장의 ‘선 조업, 후 협상’에 관한 전화통화 내용도 보도됐는데, 이는 통화가 끝나기도 전이어서 회사측이 미리 각본을 짜서 언론에 흘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저녁 7시경에는 300여 명의 조합원 가족들이 가족대책위 집회를 열어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6월 28일 저녁 10시경 공권력이 송정리역 쪽으로 이동하더니 포크레인 2대로 공장 담을 허물고 들어왔으며 이 과정에서 4곳에 불이 붙었다. 29일 자정부터는 벽을 부수어 놓고 병력을 계속 증강해 정문 쪽으로 이동하자 시민들이 막고 항의하며 저지했다. 조합원들은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으며 1시간 정도 대치 후 일부만 남고 병력이 철수했다. 공장에 모인 조합원은 2,600명 정도였고, 가족들 150여 명은 운동장 앞에 모여 집회를 했다. 5시 이후 다시 공권력 투입 기미가 보였다. 5시 40분에 대구 대우기전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뒤 6시 38분경 페퍼포그가 정문 본관을 향해 자리 잡고 소방차와 병력이 정문 바로 앞으로 배치됐다. 영광통 굴다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위 테니스장 쪽에서는 경찰이 “빨간 옷 입은 조합원 무조건 연행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포크레인과 함께 나타났고, 바리케이드들은 곳곳에서 불타고 있었다. 노조는 선무방송을 통해 “공권력이 투입되면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 모든 책임은 김영삼 정권에게 있다”고 포고했다. 6시 50분경 정문 쪽에서는 포크레인 작업을 시작했고 전경들이 돌격 태세로 들어갔다. 곧 정문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페퍼포그가 직격탄을 쏘며 진격해 들어오자 가족들이 모여있던 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진격이 시작된 지 8분 만에 40개 중대 5천여 명의 경찰병력이 전부 공장으로 진입했고 노동자들은 본관과 연구소 건물로 피신했다.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가 다쳐 구급차에 실려 나갔으며 7시 44분경 정두희 씨가 연행됐다. 8시 20분이 지나자 공장의 90% 이상이 전경에게 장악됐고, 다수의 노동자가 연행되거나 다쳤다. 지도부와 조합원들은 공장을 빠져나와 제2집결 장소인 전남대로 이동했다. 경찰은 노동자들을 연행하면서 땅에 엎드려 신발을 모두 벗게 하고 손발을 허리띠로 결박하는 등 마치 전쟁포로처럼 취급해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했다. 파업투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출근 거부투쟁
6월 30일부터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은 공권력 투입과 무자비한 진압에 항의하며 성실 교섭을 촉구, 전 조합원 출근 거부투쟁을 벌였다. 조합원들은 회사 출근을 거부하고 전남대로 집결했다. 연일 계속되는 출근 거부투쟁에는 많은 조합원과 가족들이 참여했고, 광주지역 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출근 거부투쟁 첫날 1,200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지도부는 비상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오후 4시 노학연대 집회를 열었다.
7월 1일 조합원 1,200명이 참석하여 과별 토론회, 운동장 단합대회(축구, 배구, 소프트볼), 5.18광장 노학연대 집회를 열었고, 가족대책위 10명과 조합원 300명은 도청 앞에서 ‘신공안탄압 분쇄 및 공권력 규탄 시민집회’를 했다. 가족대책협의회는 도청에 모여 유인물 5,000부를 배포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했고 규탄대회를 마친 뒤 우체국 앞에서 시위하고 충장로, 화니백화점, 광주은행, 천변, 한일은행으로 행진했다. 규탄대회를 마치고 전남대로 복귀한 뒤에는 송정공장 압출반 신복섭 대의원 외 34명이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7월 2일에는 조합원 1,300명이 전남대에 모여 가족 장기자랑, 조합원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일요일인 7월 3일에는 과별 야유회를 하고, 4일 월요일에는 1,688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노래배우기(전남대 총학생회 노래패), 부서별 토론회 및 휴식(대자보 작성) 등을 진행하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MBC 오창규, KBS 문병주, 전남의보 박병진, 광주신용금고 김국신, 화니백화점 강거두, 조선대병원 김춘수, 전남대병원 김종원, 기독병원 김숙심 등 단위노조 위원장들의 지지방문이 이어졌고, 구속노동자 변호사로 유남영 변호사를 선임했다.
한편 회사는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 내용은 △조합원 31명 업무방해로 고소·고발 △공장 정상조업에 대한 노조의 강경일관 투쟁은 불법파업이며 지역경제 악화 및 시민 불편 초래 △직장 복귀 촉구, 조업 재개 후 협상 △퇴직금누진제는 지불능력 없다 △징계위원회 노사동수는 회사 고유의 경영권에 관한 것이므로 단체협약 사항 아니다 △해고자 복직은 사법부 결정을 존중, 개정의 뜻이 뚜렷한 자에 한해 선처 △야간 수당 100% 요구는 근로기준법에도 명시되어 있으나 선진국에서도 지급하지 않고 있으므로 들어줄 수 없다 △7월 2~7일 정상화하고 조업에 복귀한다면 임단협 교섭해서 연행자 411명 석방 요청, 구속자는 개정의 뜻이 뚜렷한 자 선별 석방 요청 등이다.
7월 5일 화요일에 파업 참여 조합원은 2,010명으로 늘었다. 아침 집회에서 부서별로 대자보를 작성해 시내 전 지역에 부착하기로 하고, 지부장은 전날 회사측의 기자회견 내용을 발표하며 그에 맞선 투쟁 결의를 다졌다. 이후 단체협약요구안 설명회를 하고 퇴직금누진제와 각종 수당 인상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한 뒤 부서별 토론회를 실시했다. 가족대책위도 모임을 해서 단협 과정에 대한 설명과 노래배우기, 상호 연락체계 수립, 부상자 병문안을 진행하고 호소문을 배포했다.
7월 6일 수요일 투쟁에는 1,927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노조는 시의회 의원들과 면담을 통해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고 교섭을 요구했다. 기자 간담회에서는 “노동조합과 합의 없는 조업 정상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지를 밝히고, “41명 구속·수배·고소·고발 취하와 전근대적인 노무관리 개선 및 박정구 부회장 면담”을 요구했다. 이어 시장과 노동청장을 만나 노사교섭 장소 마련, 46명 고소·고발·구속·수배 해제, 퇴직금누진제, 중졸에서 고졸 임금으로 상향 조정을 요구했다. 이날은 빛고을 노동상담소장의 교육, 오후 가두 집회와 행진도 진행했다.
7월 7일 목요일은 2,122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UR에 관한 교육, 영화 <파업전야> 감상 등을 진행했다. 오후 집회에서 위원장은 “실무팀을 구성해 교섭창구를 열자”는 회사쪽 제안에 대해 “대화는 계속하자. 교섭창구를 열되 공개 원칙으로 한다. 조합원들은 승리하는 그날까지 하나 된 투쟁을 전개하자”고 연설했다. 이날은 회사가 밝힌 정상조업 시작일이었지만 조합원들이 출근거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상조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7월 8일 금요일에는 조합원 참여가 2,466명으로 늘어 산업재해 예방에 관한 부서토론, 산업안전재해 강의 등을 진행했다. 9일 토요일에는 2,349명이 참여한 투쟁이 계속됐고, 회사측과 실무교섭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7월 10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실무교섭이 진행됐다. 회사측은 ‘가족수당․근속수당 조정, 무급․유급으로 곡성 벽지수당과 연․월차 수당 조정’과 함께 임금 15% 인상을 최종안으로 제시했고, 노조는 “사측 안은 수용할 수 없으며, 노조측 요구안은 11일에 제시하겠다”고 했다. 7월 11일 월요일은 조합원 참석 인원이 2,554명이었다. 오후 2시 실무교섭에서 회사는 최종안을 고수했고 노조는 임금 관련 사항이 아닌 단체협약부터 교섭하자고 제안했으나 회사측 거부로 또다시 결렬됐다.
7월 12일 화요일은 조합원 2,168명, 13일 수요일에는 2,532명이 출근 거부투쟁에 참여했다. 과별로 윷놀이, 바둑, 족구, 축구 등 단합대회를 하고, 회사측 제시안에 대한 반박 대자보를 써붙여 시민들에게 홍보했다. 집회 때 지부장은 “파업 20일째인 7월 14일 회사가 정상조업을 하겠다고 회유·협박하는데, 이에 흔들리지 말고 출근 거부투쟁에 적극 동참해서 단체협약 투쟁 승리하고 당당하게 출근하자. 6월 29일을 절대로 잊지 말자”고 당부했다.
7월 14일 목요일은 회사측이 복귀하라고 통보한 날이었다. 회사측의 “오늘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히겠다”는 협박에도 3,200여 명이 전남대로 출근했다. 이에 회사에서는 복귀 시한을 다시 20일로 연장 공고하고 안내문을 발송했지만 조합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7월 16일 토요일에는 조합원 2,700여 명이 참여해 부산 노동자문예창작단의 <바리케이트> 공연을 관람했으며, 휴일 이후 18일 월요일에 2,000~2,100명의 조합원이 결집했다. 이날은 STEP 부서(검사과, 제품과, 연구동, 생산관리과, 수송 등)가 집단적으로 출근해서 조합원들을 자극했다. 그 영향으로 동력이 감소했는데, 노조가 조합원 설득작업을 했음에도 STEP부서에 대한 노조의 관장력이 약하고, 그동안 진행된 실무교섭의 성과가 미비한 탓에 조합원들의 기대치가 총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귀 시한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고, 김일성 분향소 설치에 대한 조사로 학교가 어수선한 가운데 오전부터 전남대 일원에 헬기 정찰이 시작됐다. 20일 새벽 공권력 투입에 관한 설이 계속 나돌아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가족대책위는 쟁의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주막을 열었다.
파업 26일째인 20일은 회사가 제시한 3차 복귀 시한이었다. 헬기로 복귀를 강요하는 회사 선전물이 살포되고 있는 가운데 마창노련의 세일중공업, 한국중공업, 웨스트전기 노조 등 지지방문단이 도착해 지지 대자보와 지원금을 전달했고 가족대책위는 구속자를 면회했다. 이날 송정공장 쟁의부장 이종민, 기획실장 허용대에 대한 사전구속영장발부가 추가됐다.
7월 21일 목요일에는 조합원 동력이 급격히 떨어져 1,000~1,200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금호타이어 공권력 침탈 규탄과 노동운동 탄압 분쇄를 위한 광주지역 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었다. 아시아자동차 노래패 새벽빛의 노래와 율동 공연, 로케트전기노조 위원장과 조합원들의 지지 노래, 금속노조 조합원들의지지 발언 등이 이어졌다. 집회에는 대우캐리어, 아시아자동차, 로케트전기, 금성알프스민주노조추진위원회, 금속노조 등의 조합원들이 참석했다.
언론에서는 복귀율 55%를 얘기하고 있었지만, 실제 회사 출근과 전남대 출근이 비슷한 숫자였다. 회사에서는 출근하는 조합원들에게 매일 2만 원씩 현금을 지급했고, 매일 2시간씩 교육을 진행했다. 노조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21일 현재 타이어 원자재 배합은 관리자들이 직접 하고 있으며, 송정공장의 경우 매일 타이어 4만 본 생산하던 것이 5천 본가량 생산하고 있으며, 그마저 절반 이상은 불량품이었다.
7월 22일 금요일 오전에는 전남대 학생들과 체육대회를 진행했다. 마침내 오후 5시, 6백여 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진행한 퇴근집회에서 위원장이 복귀 결정을 내렸다. 위원장은 “단체협약 갱신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노조는 계속적으로 투쟁을 할 것이다”라는 결의를 밝히고 23일 오전 11시 기자회견을 했다.
광노협 금호타이어 수습대책위 구성
광노협은 금호타이어노조의 파업이 종결된 이후 회사측의 탄압을 방지하고 사태의 조석한 해결을 촉구하며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수습대책위는 기자회견에서 △339여 명에 이르는 연행자에 대한 조속한 석방 △금호노조의 정상화를 위해 현재 집행부 대다수에 대한 구속·수배 해제, 대화와 교섭을 통한 노조 정상화, 1994년 단체협약 체결 △(주)금호의 전근대적인 노무관리 방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한편 광주지역 민간운동단체와 시의회에서도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광주직할시의회, 천주교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청년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농민회, 가톨릭노동사목, 가톨릭대학생연합회,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가톨릭공동선실천협의회), 광주YWCA, 광주전남기독교사회운동연합, 농민목회자협의회, 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 광주인권위원회, 기장광주노회교사위원회, 무등노동문제상담소,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광주전남준비위원회, 지선스님, 법일스님, 불교인권위원회, 대학생불교연합회, 빛고을노동법률상담소, 광주노동건강상담소, 광주노동자문예운동단체연합, 민중정치연합광주시지부, 청년노동자회,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 일사랑자주여성회, 야학인연합회, 여성노동자회, 광주민주청년회, 민중학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라남도연맹, 전남여성농민회, 진보정당추진위원회 광주시지부, 전국교직원노동조합광주지부 등이 연명했다.
현장복귀 이후 회사와 공권력의 탄압
노조가 25일부터 조업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하고 복귀 지침을 내리자 회사측은 언론보도를 통해 “노사관계 개선에 주력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현장 복귀 이후 고소·고발 등 온갖 탄압을 가했다. 7월 23일까지 무려 25명을 구속하고 152명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46명 고소고발, 8명 공식 수배 등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다.
7월 15일 공권력이 전남대를 침탈할 때 이석행, 설동윤은 연행되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맞기도 했다. 한생남(26. 교육부장), 모한종(26. 쟁의부장), 김옥현(29. 대의원), 김영만(25. 조합원)은 7월 21일 저녁 9시경 전남대에서 승용차로 운암동 쪽으로 가다가 신안교에서 모두 영장없이 연행됐다. 이들은 경찰로 추정되는 6명에 의해 자가용 3대에 실려 운암시장 입구 놀이터 근처 여관 2층으로 끌려가 새벽 1시 30분까지 가혹행위와 조사를 받다 동부서 근처 아시아나장 506호로 옮겨 같은 행위를 당하고 22일 아침 8시경에야 동부 경찰서로 옮겨졌다.
한생남과 모한종은 심한 폭행과 물고문을 당했다. 김영만은 담뱃불로 지지고 송곳으로 찌르며 폭행당했다. 김옥현은 담뱃불로 지지고 송곳으로 찌르며 폭행 후 22일 새벽 2시 20분경 어린이대공원 훼미리랜드로 데려가 사시미칼로 위협하며 전남대에 있는 노동조합 집행부에 거짓 전화를 하게 했다. 유상열(38. 해고자)씨는 25일 새벽 1시 30분경 담장을 넘어 집으로 침입한 경찰에게 폭행당하며 납치돼 계림동 부근 여관으로 끌려가(봉고 1대, 승용차 1대) 여관에 감금됐다. 이후 심하게 맞으며 조사 받다가 새벽 4시 30분경 풀려 나왔다. 경찰은 이불을 씌워 놓고 무차별적으로 짓밟고 무릎 사이에 봉을 끼워 놓고 폭력을 행사하며 파업과 사노맹, 남총련 관계 등을 추궁했으며 40cm 정도의 칼로 위협하며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정광채(42. 부위원장)씨는 26일 21시 30분경 전남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식칼을 든 괴한에게 린치당했다.
김상진 광노협 의장 폭행사건
김상진 광노협 의장은 8월 8일 류재수(광주동부경찰서 소속) 형사가 삐삐로 연락을 해와서 류재수 외 2명과 송원전문대 안에서 만났는데, 금호타이어 파업과 수배자에 대해 질문하며 협박했다. 수배 중인 금호타이어 신호식 곡성지부장의 거처를 물으며 “금호 이 새끼들 때려죽인다. 거처를 알려주어야 광노협 식구들이 살아난다”고 협박했다.
8월 9일 김상진 의장은 소식 없이 지내던 국민학교 동창, 백제가든 사장 김재호가 연락을 해와서 백제가든에서 대우캐리어 조직부장 천윤필과 함께 만났다. 김재호와 만나보니 다른 자리에 류재수가 앉아 있었다. 김재호는 금호타이어 신호식 곡성지부장의 거처와 노동조합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동부서 류재수 형사하고는 형님·아우 하는 사이로 나를 통해서 설득하려고 한다. 동부서가 실적이 없다. 동부서 쪽으로 성과를 돌리면 좋지 않겠냐. 신호식 씨를 비롯한 수배자들을 자수하게 하라”고 권유했다.
15분 뒤 김재호가 또 다른 국민학교 동창이라고 소개하며 최영춘을 합석시켰고 몇 분 지나 김상진 의장과 최영춘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김재호는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비웠고 말다툼을 하던 김상진과 최영춘도 바로 화장실 통로로 갔다(화장실 뒤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 이 통로는 식당 홀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언쟁이 들려 천윤필이 가보니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잡고 다투고 있어서 이를 말리고 잠깐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가보니 김상진 의장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이후 김상진 의장을 남강병원으로 옮겼다. 2시 30분경 전남도경 형사가 찾아왔고 3시경까지 최영춘은 검은 승용차 안에서 도경 형사와 같이 앉아 있었다. 이에 김상진 의장 아버지와 매형이 항의하자 상무대파출소에 가서 동부서 형사가 지휘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4시경 아버지와 매형이 파출소에 가보니 조사를 받고 있지 않았으며, 김재호는 제주도로 갔다고 말했다.
광노협은 이 폭력사건이 수배자 검거를 위한 무리한 실적 위주의 수사 속에서 경찰이 주도해 폭력배를 동원한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류재수가 실적이 없다며 계속 협박해왔던 점 △그의 주선으로 17년 만에 국민학교 동창인 김재호와 술자리가 마련된 점 △사건이 발생했던 식당에서 김재호를 만날 때 류재수가 식당 안에 있었다는 점 △김재호의 발언 중 류재수를 위해 금호타이어 수배자 거처를 알려달라는 부탁이 주요 내용이었다는 점 △김재호와 이야기하던 중 15분 만에 폭행 당사자인 최영춘이 나타났다는 점 △피해자의 부상 정도가 단순한 말다툼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흉기에 의한 상처로 그 상태가 심각하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김재호는 시간을 끌었고 사건 이후 제주도로 도망쳤다는 점 △화장실은 뒷문으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라는 점 △병원으로 옮긴 직후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는 도경 형사들이 곧바로 나타났던 점 △폭행 당사자인 최영춘을 곧바로 조사하지 않고 도경 형사들이 한 시간 정도 차 안에 같이 있었다는 점 △피해자의 아버지와 매형이 보는 앞에서는 최영춘에 대해 조서를 받지 않았다는 점 △금호타이어 파업과 관련하여 조합원과 해고자들에 대해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폭행을 가했던 점 등이 판단의 근거였다.
금호타이어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투쟁 평가
(1994년 금호타이어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투쟁에 대해 구속․수배된 집행부가 ‘조합원들에게 드리는 글’ 형식으로 쓴 평가서 中 발췌)
전국의 어느 사업장에서도 행하지 못했던 장기간의 투쟁 대오를 유지했고 그간 우리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 정도로만 알던 금호 재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금호타이어 조합원 동지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 노동자에겐 단결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 동지의 헌신적인 참여로 가능했던 한 달간의 총파업 투쟁에도 우리는 단체협약안 중에서 뚜렷하게 얻어낸 성과가 없이 일단의 총파업투쟁을 끝내게 됐다. 12대 집행부는 이 점 조합원 동지 여러분께 사죄드리며 집행부의 행동지침에 따라 엄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신 조합원 동지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새롭게 시작하자.
첫째, 민주적인 조합원의 총단결이다. 다시 시작하여 노동조합을 복구하고 금호타이어노동조합과 조합원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길은 첫째가 단결이다. 비록 회사와 자본가권력의 탄압으로 또는 가족들의 눈물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집행부의 결정이 있기 전에 복귀한 조합원들도 있지만 소수의 어용조합원을 빼면 모두가 준법투쟁과 파업투쟁, 그리고 공권력 침탈 위협 속에서도 뜨거운 동지애로 함께 했던 1994년 파업투쟁의 동지들이다. 투쟁의 선봉에 섰던 12대 집행부와 대의원을 중심으로 새롭게 건설될 비상대책위를 중심으로 파업투쟁으로 발생한 현안 해결과 1994년 임단협 갱신투쟁의 승리를 위해 단결의 대로를 다시 세워내자.
둘째, 최소한의 행동부터 조직하는 것이다. 아직도 조합원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 또1994년 임단협 갱신투쟁이 하나도 진척된 것이 없고 회사측에 의한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 등 하나도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다. 그러나 회사측의 탄압과 더불어 취해지는 일련의 유화조치는 조합원의 단결을 원천 봉쇄코자 하는 술책이고, 우리 파업투쟁의 성과이기도 하다. 회사측의 이러한 모든 것은 조합원의 단결로서 잉태된 노동조합의 힘을 확신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지도부가 구속, 수배되어 지금 당장 앞에서 이끌고 나갈 사람은 없다 할지라도 반별로 과별로 뭉쳐 조그마한 행동부터 다시 함께해나가자. 회식 자리든 면담 자리든 동료들을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투쟁하는 조합원 동지들에 대한 회사측과 공권력의 탄압 그리고 회사측의 교만한 교섭 태도에 대해 항의하고 그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자. 노동조합이 건설하는 비대위를 지지하고 비대위가 주관하는 모든 투쟁과 방침을 3,500여 조합원들의 행동지침으로 만들어 나가다.
셋째,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다. 다시 차분히 전열을 가다듬고 더욱 큰 투쟁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의원과 노동조합이 분명하게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번 파업투쟁을 통해 우리는 누가 진정으로 조합원을 위하는 사람이고 우리 과의 대표로서 올바른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다. 9월에 있을 대의원선거에 대비해 과를 대표해서 가장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합원을 추대해야 한다. 이번 파업투쟁에서 일부 어용대의원이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었던 사실을 명심하고 반 내에서의 토론을 거쳐 꼭 올바른 대의원을 추천하고 대의원에 나설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대하자. 이번 파업투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성과가 올바른 대의원의 선출에 있다고 생각하고, 조합원 모두가 단결해서 동료를 팔아먹는 어용이 아닌, 민주적인 대의원을 반드시 선출하자.
회사에 엄중하게 촉구한다.
- 사표 강요, 강제 부서이동 등 계속되는 조합원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 노동조합 폐쇄, 면담, 교섭 요구 거부 등 현 집행부의 불인정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고, 위원장이 구속되었지만 위원장의 위임을 받은 집행부 간부와의 교섭에 성실하게 응하라.
- 조합원과 노조 간부에 대한 고소·고발을 취하하고 비인간적인 손해배상 청구를 취하하라.
- 아직까지 대기상태인 조합원과 억압적인 상황에서 사표를 쓴 조합원을 전원 복귀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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