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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1980년 5월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이여! _ 안태정(115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9-05-28 조회 2048
 

아, 1980년 5월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이여!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사람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시민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무장봉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무릇 사건의 명칭은 사건의 실체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건의 ‘주체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이름들은 ‘민중’이나 ‘시민’에 의해 전개된 민주화운동, 항쟁, 무장봉기 등으로 규정되어 주체와 목적이 애매모호해 보일 뿐입니다. 명칭만을 볼 때는, ‘자본주의 계급사회와 계급투쟁 관계’를 가리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당시 광주를 비롯한 이 땅의 사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자본계급이 대다수의 노동계급 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계급사회였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지역적인 범위에서나마 일시적이지만, 광주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전복시키는 것을 지향하여 이 땅의 역사에서 자발적으로, 최초로 노동계급의 ‘국가권력’을 형성했던 혁명적인 계급투쟁이었습니다. 때문에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실체를 그나마 잘 드러낼 수 있는 명칭은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주체는 거의 절대적으로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확인할 수 있는, 기동타격대, 사망자, 부상자, 구속자 등의 계급구성을 보면, 각각 약 86,7%, 95.6%, 95.1%, 83.5%가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등의 임금 노동자들과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을 하는 가사노동자, ‘학생노동자’ 등의 비임금 노동자들로서의 노동계급이었고, 나머지의 대부분도 프롤레타리아화한 영세 자영업자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자본계급에 의해 착취와 억압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광주노동계급은 ‘노동계급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하여 쟁취돼야 한다’는 명제를 실천하게 됐습니다.

 

‘해방’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소극적 의미의 해방(emancip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적극적 의미의 해방(liberation)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채호 선생도 1923년 <조선혁명선언>에서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미의 해방, 즉 ‘파괴와 건설’을 함께 쟁취할 때, 우리 인간은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노동계급도 없고, 착취와 억압을 하는 자본계급도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협동적인 사회’에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 5월 광주노동계급은 이러한 두 가지 의미의 ‘해방’을 이루려고 투쟁했습니다.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5.18 전후로 광주노동계급이 대동단결해서 전개한 ‘노동계급해방투쟁’을 통해서 5월 21일 자발적으로 노동계급의 혁명군대를 조직하여, 오후 5시 30분, 자본계급의 파쇼군대를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시켰던 때까지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이후 형성된 ‘해방광주’에서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22일 최고의사결정기관의 역할을 한 ‘해방광주집회’를 창출하고, 5월 25일 오후 10시, 집행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건설해서, 27일 새벽 미국제국주의의 사주 등으로 침략해 온 자본계급의 파쇼군대와 싸웠지만, 역부족으로, 노동계급의 혁명군대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때까지입니다.
 

-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의 전개과정 일지 개요 -

 

1980년 5월 15일: 10여만 명의 노동자가 서울에서 시위
1980년 5월 16일: 광주에서 노동자들이 횃불시위
1980년 5월 17일: 자본계급의 파쇼권력이 계엄령을 제주까지 확대, 제7특수여단 광주 파견
1980년 5월 17일: 자본계급의 경찰이 전국적으로 ‘활동가’ 검거 실시
1980년 5월 18일: 자본계급의 공수부대가 전남대학교 점령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학생노동자들’이 공수부대와 충돌, 시내 진출, 전투 발발
1980년 5월 19일: 광주의 다양한 노동자들이 궐기 시작, 자본계급의 파쇼군대 증원, 탱크와 화염방사기 사용
1980년 5월 20일: 오후 6시 39분경 택시와 버스 등의 운수노동자들이 200대 차량으로 시위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 50분 자본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선전기구인 MBC 방송국 화재
1980년 5월 20일: 자본계급의 파쇼군대가 광주역에서 첫 발포, 2명 사망
1980년 5월 21일: 오전 4시 30분경 자본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선전기구인 KBS 방송국 화재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 10분 자본계급의 수탈기구인 세무서 화재
1980년 5월 21일: 노동자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수십 대 차량 징발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자본계급의 파쇼군대가 금남로에서 발포
1980년 5월 21일: 노동자들이 총기 등을 징발하여 노동계급의 혁명군대인 ‘시민군’을 결성, 오후 3시 20분 대응사격.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형성, 이 땅에 ‘이중권력’이 형성되어 대립투쟁 시작
1980년 5월 21일: 오후 5시 30분, 노동계급의 혁명군대가 자본계급의 파쇼군대를 도청에서 물리치고 ‘해방광주’ 형성
1980년 5월 22일: 시위가 목포, 나주, 화순, 해남 등 전라남도 전역으로 확산
1980년 5월 22일: ‘해방광주’에,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계급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어용적이고 투항적인 위원들과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위원들로 구성된 노동계급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도청에 등장, ‘해방광주’에 ‘이중권력’이 형성되어 대립투쟁 시작
1980년 5월 22일: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해방광주’에 최고의사결정기관으로서 최초의 ‘해방광주집회(10만 명 이상 참여)’ 개최
1980년 5월 22일: 미국제국주의가 백악관 미팅에서 ‘해방광주’를 진압하기로 결정
1980년 5월 23일: 10만 명~15만 명이 참여한 ‘해방광주집회’ 열림
1980년 5월 23일: 자본계급의 비밀군사 첩보원이 노동계급의 어용적 투항적인 ‘지도자’의 묵인으로 도청의 다이너마이트 뇌관 제거(자료에 따라서는 24일 밤) 
1980년 5월 24일: ‘자유민주주의적’ 자본계급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노동계급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어용적이고 투항적인 일부 위원이 ‘해방광주집회(10만 명 참여)’에 사보타지 시도
1980년 5월 25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일부’가 총기 5,000정 중 4,500정 회수
1980년 5월 25일: ‘해방광주집회(5만 명 참여)’ 열림
1980년 5월 25일: 오후 10시, 노동계급의 독립적 혁명적 집행기관으로서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건설됨
1980년 5월 26일: 오전에 3만 명과 오후에 3만 명(자료에 따라서는 5천여 명)이 참여한 ‘해방광주집회’ 열림
1980년 5월 27일: 미국제국주의의 사주 등으로 자본계급의 파쇼군대가 노동계급의 혁명군대를 진압하고 ‘해방광주’를 다시 점령 지배


1980년 5월 21일 노동계급이 ‘무장’하여 노동계급의 혁명군대인 ‘시민군’을 조직함으로써 광주에는 자발적인 노동계급의 ‘국가권력’이 형성됐습니다. ‘군대’는 국가권력의 핵심기구입니다. 이때부터 이 땅에는 자본계급의 파쇼적 국가권력과 광주노동계급의 혁명적 국가권력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이중권력’이 형성되어 승패를 가름하는 계급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5월 21일 오후 5시 30분, 광주노동계급의 혁명군대가 승리하여 광주를 자본계급의 파쇼권력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광주노동계급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노동계급 내부적인 요인 세 가지를 위주로 말하겠습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관건인 것은 광주노동계급이 대동단결하여 궐기했다는 것입니다. 5월 19일부터 광주의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려는 자본계급의 파쇼군대의 만행에 맞섰습니다. 둘째로 광주노동계급이 자본계급의 파쇼군대와의 투쟁과정을 이끈 것은 자발적 ‘의사결정과 집행의 일치’를 통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투쟁력을 통일시키고 단결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셋째로 광주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국가권력’을 형성하여, 즉 노동계급이 무장한 혁명군대를 조직하여 자본계급의 파쇼군대와 맞장을 떴다는 것입니다. 맞장을 뜨지 않고서는 승리의 가능성조차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광주노동계급의 혁명적 주체역량을 한층 더 강화시켰고, 나아가 자본계급의 무력기구 내부가 일정하게 분열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광주경찰과 광주지역 군대의 ‘미온적’ 대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승리는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의 편으로 왔습니다.


(김정인, 김정한, 은우근, 정문영, 한순미 지음, 『너와 나의 5.18』, 오월의 봄, 2019, 80쪽).

 

나아가, 5월 21일 오후 5시 30분 이후, 광주노동계급이 쟁취한 ‘해방광주’는 어떻게 작동됐을까요? 정치적 권력기구로서의 최고의사결정기관과 집행기관이 따로 만들어져서 ‘해방광주’를 움직였습니다. 의사결정기관은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전부 7회 개최됐습니다.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민주광장’에서 열었던 ‘해방광주집회’에는 최대 인원 15만 명(23일), 최소 인원 3만 명(26일, 자료에 따라서는 5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해방광주’의 도청에는 집행기관으로서 5월 22일에 ‘자유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지들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어용적이고 투항적인 노동자들과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로 이뤄진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나타났고, 25일 오후 10시에는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의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건설됐습니다. 이렇게 ‘해방광주’에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계급의 권력체 등과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체가 대립 투쟁하는 ‘이중권력’이 형성되어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미국제국주의의 사주 등으로 침략해온 자본계급의 파쇼군대와의 싸움에서 노동계급의 혁명군대가 패배함으로써, ‘해방광주’가 다시 자본계급의 파쇼권력에게 점령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원영수 옮김, 『한국의 민중봉기』, 오월의 봄, 2015, 299쪽).

 

그러면 1980년 5월 ‘해방광주’는 자본계급과의 싸움에서 왜 패배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내부적 요인 세 가지를 위주로 말하겠습니다. 첫째는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체가 ‘해방광주’를 분열 약화시키는 ‘이중권력’ 상태를 종식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지들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해방광주’의 권력을 노동계급의 ‘무기회수’라는 무장해제를 통해서 파쇼권력에 넘기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또, 노동계급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어용적이고 투항적인 자들도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권력을 파쇼권력에 넘기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한편 최고의사결정기관인 ‘해방광주집회’를 주도하던 비조직적인 권력형태의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5월 25일 오후 10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과 결합하여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는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을 조직적으로 성립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방광주’에서의 ‘이중권력’ 상태를 끝장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체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계급의 권력체 등의 ‘해방광주’ 외부의 파쇼군대와의 반동적 내통을 차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원영수 옮김, 『한국의 민중봉기』, 327쪽).

 

둘째는 ‘해방광주’에서 초기부터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같은 노동계급의 집행기관을 수립하지 않아서 노동계급이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적’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방광주’의 권력을 파쇼권력에 넘기려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계급의 권력체와 어용적이고 투항적인 일부 노동자들의 영향력을 단절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자본계급의 권력체 등은 ‘해방광주집회’를 여는 것을 방해하여 집회 참여인원이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어들게 했고(최대 15만 명에서 최소 3만 명 또는 5천여 명으로 감소), 광주노동계급의 권력체의 핵심인 혁명군대 ‘시민군’을 해체하기 위하여 5월 25일까지 5,000정의 총기 중에서 90%에 해당하는 4,500정을 회수했습니다. 이렇게 자본계급의 ‘시민대책위원회’와 어용적이고 투항적인 일부 노동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주체역량이 최대한 약화됐을 때 자본계급의 파쇼군대가 ‘해방광주’에 침략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등이 당면과제를 ‘부르주아민주주의’ 달성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들은 26일 마지막 ‘해방광주집회’에서 7개항으로 된 <80만 광주시민의 결의>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보듯이, ‘구국과도정부 수립’과 ‘민주정부 수립’ 등이라는 ‘부르주아민주주의적인’ 목적을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해방광주’ 성립 전후의 ‘노동계급해방투쟁’의 과정에서의 요구와 행동의 일면만을 수용한 것이었지, 사적자본 접수 징발(아세아자동차의 차량 등)이나 국가자본 파괴(세무서나 KBS 방화 등)나 접수(도청이나 총기 등) 등의 의미까지 포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목적 설정은 ‘해방광주’ 내부에서 과단성 있게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계급 등을 쳐낼 수 없게 하였으며, 따라서 ‘해방광주’를 분열 약화시키는 ‘이중권력’ 상태도 종식시킬 수 없게 했습니다.

 

셋째는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이 부르주아 권력기관처럼 최고의사결정기관과 집행기관으로 분화되어 ‘해방광주’ 이전처럼 양 권력기관의 자발적인 일치를 이루지 못하여 광주노동계급의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화됐다는 것입니다. 즉 분화 된 그 틈새에서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계급의 권력기관 등이 독버섯처럼 자라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광주집회’가 최고의사결정기관일 뿐만 아니라 집행기관으로도 역할을 하여 명실 공히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계속해서 ‘해방광주집회’를 보이콧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극소수의 자본계급이 다수의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을 개별적으로 분할 지배하는 길 뿐입니다. 그것이 온갖 미사여구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되어 대의주의 정치와 삼권분립 권력체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계급의 권력체제를 극복하는 노동계급의 길은 직접민주주의 정치와 삼권일치 권력체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광주’에서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은 ‘해방광주’ 성립 이전의 투쟁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실천했던 ‘의사결정과 집행의 일치’를 계승하여 확대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즉 자본계급의 ‘정치적 전략’을 전복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해방광주’의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체가 자본계급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세계사에서 최초의 노동계급의 국가였다는 1871년 ‘파리코뮌’(3월 18일~5월 28일)에 비견되기도 하는, 이 땅에서 최초로,  노동계급의 ‘국가권력’이 1980년 5월 21일 광주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27일 새벽까지 작동했습니다. 즉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권력체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려는 자본계급의 파쇼권력과 맞서 무장투쟁을 벌여 파쇼군대를 물리쳐서 광주를 ‘해방’시켰습니다. 나아가 광주의 진정한 노동계급은 ‘해방광주’를 명실 공히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해방광주’로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해가면서까지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의의와 한계’를 함께 지닌 1980년 5월 ‘광주노동계급해방투쟁’이란 위대한 역사적 경험을 오늘과 미래의 ‘노동계급해방투쟁’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우리 노동계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크나큰 행운아임에 틀림없습니다. 1980년 5월 ‘빛고을’ 노동계급해방투쟁의 영령들이여! 당신들은 우리 노동계급해방 투쟁과정에서 어둠을 물리치는 햇빛입니다.

 

*참고문헌:

이정로,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 전환」, 『월간 노동해방문학』, 노동문학사, 1989;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원영수 옮김, 『한국의 민중봉기』, 오월의 봄, 2015;

정문영, 「5.18민주화운동, 열흘간의 드라마」, 김정인, 김정한, 은우근, 정문영, 한순미 지음, 『너와 나의 5.18』, 오월의 봄, 201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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