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사랑 민주
상진이 보아라.
불볕더위, 태풍 장마에 홍수 다시 태풍 그러다가 장마, 마치 무슨 순환을 하듯 되풀이되는 하늘의 심술에 대처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에 대한 한없는 동정심이 일어난다.
많은 생명이 바람에 날려가고 비 속에 사라져갔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무리들은 바람도 비도 피해버리는지 아직도 땅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슬프구나.
상진아, 그동안 몸 건강히 잘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나도 너의 염려 덕택에 잘 있단다. 편지가 늦어서 미안하다. 너희 집에 전화 하니까 국번이 바뀌어서 되지 않더구나. 며칠 전에 종영이가 와서 다시 알려주더라. 종영이도 요즘 학교 다니면서 나름대로 다른 일을 하고 있나봐. 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던데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더라.
여름휴가(하기야 너는 업자니까 항상 휴가지만)는 잘 보냈는지? 내 생각인데 아마도 네 마누라 후보(?)와 어디가서 뭐하다 왔겠지.
나는 뭐 애인이 없어서 놀러는 가지 못했지마는 그래도 7박 8일 동안 열심히 뭐하다 왔다. 7월 28일부터 8월 4일까지 우리 원정대 훈련과 함께 또 지리산 등반학교 조교로서, 남자, 여자, 계곡으로 바다로 놀러가는 사람 부럽지 않게 보람 있게 보냈다. 남들 계곡에 발 담그고 요사스런 여자의 손목잡고 있을 때 나는 뜨거운 바위벽에 매달려 있었거든. 네가 생각해도 조금은 가엾다는 생각이 들지? 그러니까 아가씨 안 명 소개 해줘라. 아니면 네 동생도 가능하다. 불쌍한 여자 한 명 내가 구제해 줄게.
상진아, 요즘은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민주”라는 말을 알까 의문이거든.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위에서 민주를 외치고 주장하는 자칭 똑똑한 나리들도 자기들이 말한 “민주”가 무엇인지 잘 모르나 봐. 지켜지고 행해지는 게, 우둔한 내가 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지금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사분규. 나도 대한민국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벌써 12일째 철야농성 중이야. 말이 12일이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은 엄청나다. 가진 자인 회사의 갖가지 기만과 술책, 흑색선전, 또 경찰을 앞세운 공포분위기 조성, 참 우스운 일은 양같이 순한 나도 졸지에 불순한 폭동세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좋은 말로 좌경세력이라나.
상진아, 그렇지만 말이다. 여기 있는 주식회사 통일 노동자들은 한치도 동요하지 않는단다. 오직 지금까지 사람 취급 받지 못한 한을 되씹으며 진정한 노동자를 위한 세상이 올 때까지 온갖 위협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기로 했다. 그때가 언제인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내일이 될지, 아니면 낙엽이 떨어질 때인지, 아니면 흰 눈이 올 때인지는 몰라. 그렇지만 우리는 승리의 그날까지 싸울 것이다. 너도 지켜봐 주어라. 우리 주식회사 통일의 노동자들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있을 때까지.
그리고 기도해줘. 너는 세례까지 받은 교인이잖아. 네 친구인 내가 그 승리를 위해 싸우게. 그리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거야. 상진아, 그럼 이만 줄인다. 시간 있으면 마산 한번 내려와라. 너희 부모님께도 안부 전해주고.
안녕
==================
이 글은 형성사 편집부가 1987년 11월에 엮은 ㈜통일 노동자들의 투쟁기록 [이제는 주장할 때가 되었다] 중 한 꼭지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낙엽에게 희망을은 노동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낙엽을 의인화시켜 쓴 우화다. 2장 그날은 농성 중 노동자들의 심경을 쓴 글들이고 3장 아버님, 일을 저질렀습니다는 자신들의 정당한 입장과 주장을 자기와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 아내, 친구, 애인에게 알리고 설득하려고 쓴 편지글을 모아놓았다. 4장 1천만 노동자들에게 드리는 글은 고용주와 농성에 참가지 않은 동료들에게 쓴 글이고 5장 통일노동자들은 왜 일어섰는가에는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을 정리해놓았다. 노동조합은 파업 농성 프로그램으로 조합원들의 심경을 담는 글, 편지 쓰기를 배치했던 것 같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분출에 힘입어 많은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물을 출판하였다. 형성사 편집부는 이 책 앞머리에 아래와 같은 글을 실었다.
“1987년 여름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던 이땅의 노동자들의 함성 그것은 ‘노사분규’가 아니라 이제까지 한 번도 말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꿈과 사랑이었습니다.
이글을 쓴 사람들은 모두 ㈜통일의 노동자들로서, 하늘마저 노하여 태풍과 홍수가 이땅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지난여름, 경남 창원의 거대한 공업단지 한 모퉁이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고용주와 맞서 싸우면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웅크리고 엎드려 절망하며, 분노하벼, 그들이 토해놓은 희망입니다.
이 글들은 신문이나 자료집, 성명서를 통해 만난 왜곡된 모습이 아닌 끈끈한 땀을 흘리며 뜨거운 숨을 내뿜는 진실한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문장이 다소 어색하고 투박하더라도, 맞춤법을 고친 것 외에는 원문 그대로 실었습니다. ......”
편집부의 글처럼 노동자들의 글은 투박하고 감정적이며 다소 과장되기도 하지만 농성장에서 느끼는 갈등을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써 의미가 있다.
* 1987년 7월에는 태풍 ‘쎌마’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기상청은 태풍이 한반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사전 준비를 하지 않았던 탓에 345명에 달하는 사망·실종자와 1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