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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나서다_양규헌
첨부파일 -- 작성일 2021-05-10 조회 630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나서다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안양지역에도 노동해방동맹(노해동)과 인민노련 등이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새로운 화두를 걸고 민중의 당을 만들었다. 나도 발기인으로 등록했으며 총선 후보에 관해 밤새워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에서 내가 나이도 있고 하니 총선 후보를 하는 게 좋겠다는(당시 활동가는 거의 20대 초중반) 중론이 모아졌다. 나는 완강하게 반대했고 다른 노조 간부(신아화학 안기석)를 추천 결정하면서 선거투쟁에 돌입했다. 노동조합운동이 세상을 바꾸자는 변혁운동을 자신의 과제로 설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역 내 좌파성향의 활동가들임에도 민중의 당활동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해를 못 했다. 그것은 나의 단순하고도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좌파라고 해도 정치세력화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는 이해를 못 했다.

 

1988년 2월 동숭동 대학로에서 열린 (가칭)민중의 당 창당 발기인대회 모습
  

대선 국면부터 시작된 노동자해방동맹 내부의 논쟁은 결국 봉합할 수 없는 당파성의 차이로 귀결되었다.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는 조직 중앙은 다수파가 되었고, 민중 집권을 주장하는 편집 중앙은 소수파가 되었다. 이후 민주연합전선이냐 민중통일전선이냐의 논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결국 노해동 소수파는 198841분리선언서를 내고 독자 대오를 꾸리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의 모색 끝에 19891112,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계급 전위조직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 출범을 선언했다.

 

지역 경찰에 비상이 걸린 모양이다. 몇 명씩 회사에 들어와서 내 신상명세서를 뒤지는 바람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회사에서 긴밀히 얘기 좀 하자 해서 만났는데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며, “노동운동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무슨 혁명을 하냐제발 회사와 자신을 위해서 그런 활동은 안하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하는 활동이니 상관하지 마시오.”라며 나왔다. 그 후부터 회사 내부에서 빨갱이 얘기가 나돌았고, 축구선수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반대세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소에 내가 아꼈던 고등학교 후배조차도 반대편에 서 있었다. ‘빨갱이라는 말의 위력은 인간관계, 의리라는 것조차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동자를 분열시키는데 최고의 명약이며, 노동조합 내부를 교란하는데 결정적인 수단이자 언어였다. 

 

총선 이후 민중후보진영 분열·잠적

 

지역 총선에서 노동자 후보 안기석은 총선투쟁의 성과를 모아내지 못했다. 우선 지역 활동가들이나 단체에서도 민중의 당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비판적 지지세가 강했으나 그런 지점을 뚫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아가 민주노조 내부에서도 민중후보 지지를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선거가 끝나고 후보로 나섰던 안기석은 신아화학에서 해고돼 출근투쟁에 나섰다. 그런데 민중후보 진영에 결합해서 날마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외치던 동지들이 없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해동 이후 소수, 다수로 갈라져 소수는 ND, 다수는 NL로 분리되면서 소수가 모두 수면 아래로 잠적했는데 안양지역 노해동은 대부분이 소수로 분리되어 지하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사노맹을 만들었다.

 

1988년 어느 날, 노해동에서 활동하며 총선에 집중했던 동지 몇 명이 찾아왔다. 안양에 노동자대학을 만드는데 같이 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노동해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거투쟁에 함께 했던 동지가 해고투쟁을 할 때 모두 잠적해버리고, 선거투쟁 평가는커녕 책임성도 없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노동자대학을 만드나?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만약에 안양지역에 노동자대학을 세우면 내가 불 싸질러버린다고 했다. 몇 번 더 그 동지들이 와서 의사 타진을 했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그 친구들은 울면서 돌아갔다. 그 후에 그들은 인천에 노동자대학을 세웠다. 노동자대학 설립 후에 그 동지들을 몇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 표현이 너무 과도했다고 생각했지만 미안하다고 하지는 못했다. 

 

싸우고 또 싸워야 했던 5.18 전야제

 

민주노조 활동가들은 80년대 초반에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정화위원회가 공장마다 설치되고 노동조합에 대한 감시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다. 주로 외신기자가 짜깁기한 (허접하기 짝이 없는) 광주민중항쟁 비디오테이프를 품에 넣고 믿을 수 있는 조합원들과 함께 자취방에 들어가 담요로 문을 가린 다음 광주의 상황을 흔들리는 영상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10명이 비디오를 보면 2명 정도는 광주항쟁에서 일어났던 폭력적 진압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장시간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광주가 고향인 동지들이 어설프게라도 증언을 해주었기에 사실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5.18 광주민중항쟁 전야제에 대중적으로 참여한 것은 1987년 이후로 기억된다. 대중적으로 참여했다고 해서 합법성이 보장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광주 5.18 참배를 하러 가면 망월동뿐만 아니라 광주역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서부터 외부인들을 막아섰다. 노동자들은 지역별로 열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역 등은 경찰들이 쫙 깔려 내리는 노동자들을 연행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광주역과 송정역 사이 역이 아닌 곳에 열차를 강제로 세우고 내려서 걷기도 뛰기도 하면서 대학교로 진입해야 했다.

  

사진: https://news.v.daum.net/v/20200621185100465

 

민주노조진영은 5.18 광주민중항쟁 전야제부터 투쟁에 참여하는데, 밤늦도록 경찰들과 밀고 밀리는 공방을 했다. 투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면 새벽녘에 조별로 토론하며 새벽을 밝혔다. 어느 해는 전남대에 파업전야상영을 막으려고 진입하는 공권력에 맞서 투쟁으로 영화를 사수해야 했다. 어느 해에는 조선대에 모인 노동자들을 향해 언덕 아래서 밀고 올라오는 공권력에 맞서 밤늦은 시간까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 민중의 당 : 1988년 2월 발기인 279명 등 2천여 명이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3월 6일 민중의 당을 창당하여, 최고대표위원 정태윤, 공동대표위원 송경평이 선출되었다. 민중의 당은 진보운동의 새로운 세대가 만든 만든 첫 번째 진보정당이라 볼 수 있다. 민중의 당은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최상위의 강령으로 내세웠다. 1988년 4․26총선에서 민중의 당은 16개 지역구에 후보를 냈지만 0.33% 득표율(출마한 지역의 평균 득표율은 4.3%)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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