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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사 노동자들의 투쟁
⦁ 시기 : 1987년 8월 14일 ~ 9월 10일
서울 구로구 독산동에 위치한 무극사는 서울과 경기지역 40여 개 대학과 일반 노트시장을 70~80% 점유하고 있는 노트, 리포트용지, 수첩, 원고지 생산업체였다. 현장은 월 10만 원의 저임금과 종이먼지로 가득한 작업환경에 따른 직업병, 생리휴가는커녕 생리수당조차 없는 가혹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사장 주상봉의 노사관 역시 “노조의 간섭을 받으면서까지 회사를 운영하기는 싫다”라든가 “나이 어린 사람들과 얘기할 수 없다”는 등 봉건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무극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서울지역 제조업 노동자 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특히 투쟁의 과정 역시 노조설립, 위장폐업, 외부연대투쟁, 민주당사 농성, 무극노트 불매운동 등 거의 모든 방법이 동원돼 장기적이고 완강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4월 5일 ‘청솔회’라는 축구모임이 결성돼 이 모임을 중심으로 회사문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인간관계를 다져오던 노동자들은 8월 14일 6월 민주화투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을 보면서 구체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8월 16일, 27명이 참가한 가운데 투쟁결의대회를 개최했다.
8월 17일, 오전 8시 30분 회사마당 정리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머리띠와 유인물을 배포하고 투쟁에 돌입해 △임금 일당 1,500원 △월급 5만 원 △보너스 400% △여성 생리휴가 △법정 공휴일 유급휴가 △중식 무료제공 △수요일·토요일 정시퇴근 등의 요구조건을 가지고 사장과의 교섭을 시작했으나, 터무니없는 대응으로 협상은 결렬됐다. 무극사 노동자들이 투쟁에 돌입하자 주변 노동자들은 담 너머로 빵과 우유를 던져주어 사기를 높였다. 농성은 장기자랑, 개인소개, 여러 가지 놀이, 교육 등으로 채워졌고, 녹음기에 구호와 성명서를 녹음하여 아침, 점심, 저녁시간에 틀어놓기도 했다.
8월 18일, 계속되는 농성 속에서 교섭이 계속돼 밤 12시 보너스 150%, 일당 800원 인상, 월급 2만 원 인상 등의 내용으로 교섭을 마무리 짓고 협상대표들을 중심으로 노조 준비위를 결성해 노조설립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8월 19일 아침 8시경 사장이 폐업신고를 통보했다. 중간관리자인 노트부장과의 교섭결과가 사장에게 통보되지 않았다며 재교섭을 요청해 일당 700원으로 하향조정해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보복금지에 대한 합의사항은 누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 교섭타결 후 회사측의 위장취업자 문제, 반장급에 대한 공개퇴사 요구 등 보복조처가 시작됐다.
한편, 노동자들은 8월 30일 내부적 패배감에도 불구하고 21명이 노조를 설립하고 9월 1일에는 4명이 더 참여한 가운데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사장은 일방적으로 생산을 중단하고, 부서별로 노동조합 결성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라고 지시했지만 모두 이를 거부했다. 이날 사장의 요구에 따라 오후 6시 전 사원이 참여한 가운데 공개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회에서 사장이 ‘전태일열사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투쟁속보를 읽으며 “대학 출신자들에게 배후세력이 있다” “간섭받기 싫다” “노동운동의 상징을 만들기 싫다” “어린놈들하고 어떻게 마주앉아 대화하는가”는 일방적 발언 끝에 사라지자 분노한 비조합원 전원이 노조에 가입했다.
회사측은 9월 3일 폐업을 통보했고, 노조측은 9월 4일부터 무극사 노트를 사용하지 말자는 불매운동에 돌입했다. 9월 5일 폐업공고가 부착됐으나, 확인결과 폐업이 아닌 부동산 임대업으로 업종을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모두 위장이었다. 회사측은 관리직을 동원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 12시 이후 생산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9월 10일, 노동조합 설립신고증이 나왔지만 회사측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이날 이후 민주당사, 청와대 민원실, 남부지청, 노동부 관악사무소 등에 고발하고, ‘민주헌법쟁취 노동자공동위원회’ 주최의 사례발표회에 참가하는 등 연대투쟁 강화로 투쟁중심을 옮겼으며, 이에 따라 민주당사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총재실 점거를 놓고 당시 민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사업장간의 의견대립 등으로 농성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여성단체와 함께 불매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사측은 신제품을 내놓고 생산을 전면 재개함으로써 투쟁은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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