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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노조연합의 개혁방송법 쟁취 파업투쟁(1999년 7~10월)
대중언론의 주요 매체인 방송은 한국에서 역대 정권의 언론 통제수단으로 활용됐다. 군사정권의 선전도구였던 방송에 대한 비판은 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방송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노태우 정권이 민영방송 설립을 위해 방송법을 개악하고, 김영삼 정권도 재벌과 언론사를 위성방송에 참여시키기 위해 통합방송법을 제출하는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 장악을 위한 법 개정이 시도됐다.
김대중정권 통합방송법 개정안에 반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98년 3월, 정부 여당은 통합방송법 개정 방침을 밝혔다. 방송개혁국민회의 등 9개 언론단체는 민주적 통합방송법 개정 단일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1998년 8월 12일 확정한 통합방송법안은 방송위원회의 독립성 훼손, 정권의 방송 장악, 외자 및 재벌의 방송시장 진입 허용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KBS, MBC, KBS 계열사 방송위원회 노조로 구성된 방송노조연합은 9월 7일 ‘방송개혁 11대 과제’ 실현을 위해 방송인 서명과 방송법안 관련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1대 과제는 △방송청문회 실시 △외자·재벌·신문사의 위성방송 진입 저지 △국회 공개청문회를 통한 방송위원 선임 △방송정책 결정권 방송위원회 귀속 등이었다.
언론단체와 방송노조의 반대에 직면한 정부 여당은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법안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자문 기구로 방송개혁위원회가 탄생했다. 1999년 초 방송개혁위원회에서 통합방송법안이 나왔지만, 방송법은 기약도 없이 표류를 거듭했다. 법안의 연내 제정이 무산될 상황이었는데, 2000년에는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에 법안 상정조차 불투명했다.
더는 방관할 수 없게 된 방송노조연합은 7월 7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방송위원회 독립성 보장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 선임 시 인사청문회 구성 △재벌신문·외국자본의 위성방송 진입 금지 및 상업방송 소유지분 제한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정부 여당이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자 방송노조연합은 7월 13일 새벽 6시를 기해 방송법 개악 저지를 위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파업·농성투쟁으로 법안 수정했지만 한계도…
파업이 완강히 진행되고 각계각층의 지지와 성원이 잇따르자 정부 여당은 그제야 협상에 나섰다. 7월 25일 방송사 노조들은 국민회의 문화관광위원회와 협상을 통해, 방송위원과 KBS·MBC 사장에 대한 사전인사검증장치를 마련키로 하고 28일 오전 6시 파업을 중단했다. 25일 협상 결과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이 임명하기로 했던 방송위원회 위원장·부위원장·상임위원들을 호선한 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는 것 △KBS 사장 제청 기준 및 사유 관련 방송위 규칙을 만드는 것 △MBC 사장은 방송진흥위 정관에 규정을 두도록 권고하는 것 등이었다. 국민회의도 이 같은 내용을 정부 여당 안에 추가시킨 뒤 8월 2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통합방송법안은 정치권과 KBS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임시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KBS노조 현상윤 위원장 등 6명의 간부가 뉴스 진행 방해, 불법파업 및 폭력시위 혐의로 구속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방송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10월 1일 출범, 통합방송법의 조속한 관철을 위해 범국민서명운동·단식농성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한 결과 10월 30일 마침내 방송법안이 통과됐다.
통합방송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독립기구인 방송위원회에 방송정책권이 부여됐고, 종합유선방송과 중계유선방송 기관도 방송위원회로 일원화됐으며, KBS 이사회 이사 11명은 방송위 추천을 거치게 됐다. 하지만 노조 측에서 주장했던 핵심 쟁점인 △방송위 구성이나 방송편성위원회에 노조 참여 △재벌·외자의 위성방송 진입 금지 △상업방송 소유 지분 제한 등은 추후 과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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