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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화학노조 파업투쟁과 공권력 침탈
시기 : 1991년 5월 12일 ~ 6월 6일
태평양화학주식회사 개요
태평양화학주식회사는 화장품(탐스핀, 에버그린, 스템Ⅲ, 순정, 미스쾌남 등), 가정용품(치약, 비누, 세제류), 식품(설록차, 태평양 알로에, 파낙스디, 인삼드링크제, 인삼엑기스) 등을 제조했다. 생활과 밀접히 연관된 제품의 제조, 가공, 매매, 무역을 목적으로 1959년에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설립해 1990년 말 수원, 대전, 안산, 김천의 제조공장과 서울 등 지역본부를 포함한 8개의 국내영업소, 미국 등에 11개 해외 현지법인을 두고 있는 국내 화장품업계 최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계열사로는 태평양제약㈜, 태평양패션㈜, 태평양장업㈜, 동방기획㈜, 태평양돌핀스㈜, 태평양물산㈜, 태평양증권㈜, 태평양프랑세아㈜ 및 11개의 현지법인이 있으며 태평양종합산업㈜, 태평양금속㈜, 태평양상사㈜, 장원산업㈜가 있었다.
태평양화학은 1973년 4월 30일에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수차례의 유무상증자를 통해 1991년 말 자본금 납입금은 510억 480만 원이었다. 태평양화학의 경영분석 결과, 매출액이 240억 원 증가하고 매출 총이익이 200억 원 증가하여 영업이익이 총 464억 원으로 1989년보다 145억 원이나 증가했다.
그런데도 회사의 경영능력 부족으로 당기 순이익은 감소했으며, 1989년보다 특별이익이 86억 감소하고 영업외 비용(지급이자)은 37억 증가했다. 결국 노동자들만 헌신적으로 일한 덕에 매출액, 매출 총이익, 영업이익이 대폭 증가해 1989년보다 떨어지기는 했으나 당기 순이익 65억 원이라는 흑자를 보았다.
1991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요구
태평양화학노동조합은 1987년 8월 16일 노조 결성과 동시에 파업에 돌입해 임금인상 및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전개, 8월 22일 신고증을 교부받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탄생한 태평양화학노조는 1988년에도 임단협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1991년 3월 6일에 ‘1991년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 갱신투쟁’을 시작했다.
노조는 기본급 정률 25% 인상, 상여금 연간 700% 지급 등 6개 임금요구안과 퇴직금 가산제, 쟁의 중 일방중재 삭제 등 49개조 93개 항의 단체협약 요구안, 부당해고자 원직 복직 등 9개 일반 요구안을 가지고 회사측과 교섭을 시작했다.
노동조합이 요구한 임금인상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1991년 2월 현재 물가가 20% 상승하고 전․월세값이 30% 폭등해 1990년의 임금 9% 인상이 물가, 주택, 전․월세값 상승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둘째, 1989년 영업이익이 319억에서 1990년 464억으로 145억이나 증가한 반면 인건비는 1989년 571억에서 1990년 554억으로 감소했고 노동자 수는 1,000여 명이 자연감축돼 노동강도가 훨씬 높아졌다. 셋째, 국내 화장품 업계 중 최고기업인데도 임금은 동종업계 4위로 타 회사에 비해 15%나 낮다. 넷째, 1990년 판매비 중 광고선전비 268억, 판매촉진비 208억으로 총 496억 원이 지출됐는데 인건비는 기본급, 수당, 퇴직금 상승분을 포함한 총액이 554억 원으로, 광고 선전비가 인건비의 89.5%를 차지하고 있다. 다섯째, 회사는 567억 원을 영업과 관계없는 유가증권, 출자금 등으로 투자하고 있는데, 이는 생산과 영업을 활성화하는 데 투자해야 하며 증가하는 이익은 노동자에게 지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노조는 1991년 3월 6일 교섭을 시작하여 17차 교섭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4월 27일 쟁의발생을 결의하고 4월 30일 쟁의발생을 신고했다. 이어 5월 8일 수원공장에서 18차 교섭을 진행, 임금 9.5% 인상, 가족 양육수당 중 육아수당 5,000~7,500원, 초등학생 수당은 8,000~1만 원 인상에 합의했으나 단체협약 17개 조항, 일반요구안 5개, 임금요구안 5개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5월 9일 사측의 요청으로 열린 19차 교섭에서 회사측의 불성실하고 기만적인 태도에 항의하여 교섭을 결렬시키고 퇴장했다.
파업투쟁의 전개
5월 10일 전국 비상임시총회를 지부별로 열어 ‘1991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경과보고 및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총투표자의 91%가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노조는 5월 12일부터 지부별로 파업투쟁에 돌입해 21일까지 지부별로 회사 내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구사대와 관리자들은 호시탐탐 파업농성 대오 파괴를 노리고 있었다.
5월 23일은 일방중재가 들어올 예정이었으나 회사의 요청으로 21차 교섭이 진행됐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대전과 수원에 있는 조합원이 서울로 결집해 본사 파업농성장에는 약 1,100여 명의 조합원이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날의 교섭 역시 이견의 폭이 너무 커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계속 정상조업만 요구할 뿐 교섭에는 불성실한 자세로 일관했다.
5월 28일부터 공권력의 탄압이 본격화됐다. 위원장 외 10명이 노동부로부터 고소 사건 출석요구서를 받았고 5월 30일에는 용산경찰서로부터 업무방해 고소·고발 건으로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또한 수원공장은 관리자와 구사대 100여 명이 정문을 봉쇄한 데 맞서 조합원 38명이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조윤호 조직국장 외 3명이 다쳐서 각각 2주 진단을 받았다. 5월 31일에는 회사측 구사대 500여 명이 파업농성장을 침투하려고 시도하는 등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6월 1일 교섭에서는 요구사항 중 일부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완전한 타결에 이르지는 못했다.
6월 2일에는 30여 명이 본사 건물 앞에서 파업지지투쟁을 전개하자 경찰은 대오를 해산시키며 태평양화학 앞마당에서 농성하는 조합원에게 최루탄을 발사했다. 이때 조합원 15명이 연행되고 몸싸움 과정에서 8명이나 다쳤다. 이날 밤 9시경, 회사는 구사대와 청부폭력배 수백 명을 동원해 농성장에 난입했으며 전경차 4대를 배치했다. 밤 10시 30분경 남성 조합원 30여 명을 포함해 400여 조합원이 10층에 집결해 대비했다. 구사대와 폭력배들은 1층을 장악했고 본사 건물 밖에는 경찰력이 증강 재배치됐다.
이어 6월 3일 새벽 4시에는 경찰병력이 또다시 갑작스럽게 강화되고 공권력이 건물 지하 주차장까지 진입했다가 30분 후에 퇴각했다. 오전 10시 구사대 500여 명이 난입해 건물 9층까지 장악했고, 오전 11시 30분부터 10층 농성장을 침탈할 것이라는 정보가 나돌았다. 노동자들은 제 2거점을 명동성당으로 정하고 파업투쟁 체계를 즉석에서 개편하는 등 만반의 채비를 갖췄다. 이날 유통조합원 100여 명과 유통 남자직원 50여 명이 합류해 파업투쟁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오후에는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지원방문이 있었고, 6월 4일 오전에는 장석화 의원과 장기욱 의원 등이 지원방문했다. 이처럼 지지·지원 세력이 확대되며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자 회사측은 6월 5일부터 “불순세력이 개입했다”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파업농성장 공권력 침탈
6월 5일 수원에서 고용상 지부장 직무대행이 조합원들을 모아 놓고 “이념적인 정치투쟁으로 가고 있다, 불순세력 개입으로 사태를 어렵게 한다, 조업해야 한다”고 사측의 논리를 선전하며 조업 재개를 주장했다. 유통지부장도 수원지부장과 유사하게 조업을 유도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은 직무대행의 태도가 곧 위원장에 대한 반기이자, 회사측과 함께 현 파업투쟁을 파괴하려는 분열책동의 일환이라고 분개했다. 노동자들은 본사 진입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출정식을 거행했다. 700여 명의 조합원이 본사 10층 농성장을 사수하고 있었으며 명동성당으로 집결한 조합원은 재진입을 시도하는 등 전국 2,700여 명이 파업에 동참해 높은 단결력으로 탄압에 맞서 저항했다.
결국, 6월 6일 파업현장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이수홍 위원장 등 6명이 구속됐고, 7월 15일에는 파업을 주도했던 노조 간부와 주동적인 노동자 30명을 해고하는 등 60여 명을 징계했다. 7월 25일에는 해고자에 대해 7월분 급여, 상여금, 하기휴가비를 줄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7월 30일에는 해고자 30명 가운데 임경미 본사지부 쟁의부장 등 10명에게 ‘불법 노동쟁의로 인해 회사에 끼친 손해에 대한 1차적 조치로 퇴직금 및 잔여임금의 50%를 가압류한다’는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노조는 8월 7일 회사의 퇴직금 가압류 조치에 항의하는 지원을 요청하며 연대투쟁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나서 각 지역과 단체에 선전홍보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그리하여 홍콩에 있는 ‘아시아 기독교 여성위원회’에서 여성노동자회를 통해 투쟁기금을 보내왔고 범국민대책위, 전노협, 기타 단위노조 차원에서 지원연대 투쟁이 펼쳐졌다. 해고된 조합원들은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생활하며 홍보·조직활동을 전개했고 노조 비상대책위원회(황영선 위원장 직무대행)는 지원 단체들과 연대해 불매운동을 계속했다.
태평양화학의 교섭 기피와 노조 탄압
회사는 단체협약의 독소조항을 악용해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노사자율보다 공권력에 의존해 강압적으로 교섭을 끝내려는 악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노조는 교섭을 통해 사측과 합의하고자 최대한 노력하다가 교섭 68일 만에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파업으로 인한 손실이 엄청나다고 하면서도 파업돌입 10일 후에야 교섭 재개를 요청해왔다. 이는 단체협약 64조 ‘10일 파업 후 노사일방이 중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후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면서 노조의 투쟁력과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요구를 묵살하려는 의도였다. 단체협약 64조는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파업) 정신에 위배되며 노동쟁의조정법에도 반하는 조항이므로 노조는 이 조항을 삭제하거나 쌍방중재요청으로 갱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법률에 명시된 노동관계법을 전면 무시하고 공권력 투입을 통해 폭력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사측은 강압적 방식으로 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짓밟고 노조가 항복하기를 강요한 것이다.
또 회사는 구사대를 구성하고 조합원의 대부분이 여성인 점을 악용해 기회만 되면 폭력을 행사했다. 1991년 5월 30일 1차로 경기·서울지역 관리자 300여 명을 동원해 파업장 침탈을 시도했다가 여의치 않자 5월 31일 전국에서 과장급 이상 관리자를 동원해 500여 명의 구사대를 조직, 사주해 농성장 난입을 재시도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강고한 단결과 투쟁으로 좌절, 퇴각한 뒤 본사 농성장 주변을 에워싼 채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난입할 기회를 노렸다.
5월 30일 수원공장으로 출근시간에 방문한 조합원 38명을 정문에서 이유 없이 가로막고 100여 명의 관리자를 앞세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앞서 5월 20일에도 파업농성자 대부분이 수원공장에서 열리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본사 파업장으로 떠난 뒤에 농성장을 지키던 10여 명의 조합원을 감금한 채 모두 구속시키겠다는 등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총회를 끝내고 조합원들이 파업농성장으로 돌아오자 사측은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관리자 100여 명을 동원해 파업농성장 출입을 가로막았다. 이에 조합원들과 관리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며 충돌하던 중 김명옥 조합원이 실신하여 중앙대 부속병원 응급실로 후송되기도 했다.
회사는 이수홍 위원장 등 노조간부 11명을 고소·고발함으로써 노사문제를 대화로 풀자고 강조했던 태도는 기만임을 스스로 드러내기도 했다. 파업 기간에 가스와 전기, 물까지 전면 차단하는 바람에 노동자들은 결국 휴대용 가스레인지나 버너로 라면을 끓여먹는 등 고작 하루 2끼니 정도로 버텨야 했다. 이는 단체협약 66조에 명시된 ‘파업 시 회사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조항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회사는 노조가 공권력 투입 협박, 간부 고소·고발 등에도 전혀 동요 없이 일사불란한 단결력과 조직력으로 파업을 유지하자 5월 30일에는 관리자 300여 명, 31일에는 500여 명을 모아 놓고 사장이 직접 나서서 노조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당시 외친 구호로는 “회사와 관계없는 윤명선이 물러가라”, “조합원 감금 농성 불법투쟁 즉각 중단하라”, “불매운동 웬말이냐, 회사를 살리자, 회사는 우리 모두의 것, 노조는 각성하라” 등이었다. 온갖 흑색선전으로 파업참가 조합원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전보와 전화를 하게 해 현장에서 끌어내는 방법, 부모님을 동원해 면회한 뒤 대동 귀향하는 방법, 해당 부서 과장·부장을 동원해 해고 협박 등 비열한 책동을 일삼았다.
한편 회사는 노조가 단체협약 개시 후 90여 일 동안 성실한 자세로 교섭해 온 것과는 달리 파업 전부터 교섭을 기피했다. 교섭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쟁점타결에 무성의하고 불성실하게 응했다. 5월 23일 22차 교섭 이후 교섭을 계속 미루는 등 노조의 교섭 요청도 거부한 채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8일만인 6월 1일에야 교섭을 요청하는 듯했지만, 조속하게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노협 등의 지원연대 투쟁
‘태평양노조 파업지지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는 전노협을 비롯한 총 21개 단체로 구성됐다. 대책위는 태평양화학노조가 연대회의 소속의 수도권 대기업노조라는 점 때문에 연대회의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진영의 진출을 저지하려고 정권과 자본 차원에서 탄압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태평양노조의 투쟁은 단위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이 아니라 관과 기업이 결탁한 대기업노조 탄압에 대한 대응투쟁이었다.
대책위는 항의공문 발송, 항의 성명서, 투쟁지지문 작성과 배포 등을 전개했다. 또 태평양화학 제품이 판매되고 있는 각 노동조합이나 학교 매점에 설치된 판매대를 철수시켜 사측에 타격을 가하는 등 대대적인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지노협들은 지역지부의 일정과 함께하며 투쟁을 지원했고, 여성단체나 여성조합원들을 중심으로 판매대 철수운동에 결합해 항의규탄 투쟁을 벌였다. 전노협은 2차례(1991년 8월 14일, 9월 14일)에 걸쳐 항의 공문을 발송하는 등 태평양화학노조의 투쟁을 지원, 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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