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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기억하는 인물
..... 모택동과 한국전쟁(1)_이영민 (103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7-10-20 조회 1019
 

연재를 시작하며

 

이번 달부터 모택동과 한국전쟁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을 항미원조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195010월부터 한국전쟁에 수십만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참전하였습니다. 미국과 휴전협정을 맺은 당사자기도 합니다. 지금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문제로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60여전 전의 일을 다시 돌이켜 볼 필요가 있을까요? 중국이 왜 북한과 혈맹관계가 되었는지, 모택동을 비롯한 당시 지도부가 북한에 대하여, 그리고 한국전쟁에 대하여, 또 미국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중국에게는 한국이 어쩌면 북한보다도 더 골치아픈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 대한 언급이 그다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괴뢰로 표현되어 있고 중국군에게는 매우 쉬운 상대이며, 한국군의 방어구역은 미국을 비롯한 UN군의 허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0년전과 현재를 대비하여 읽는다면 흥미도 있을 것이고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왜 저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저도 번역하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작은 책 한권 분량이지만 1년이나 10회 정도로 싣도록 하겠습니다. 지루한 분은 읽지 마시구요. 몇 명이라도 읽으신다면 중국어 돌팔이가 애써 번역한 보람이 있겠습니다.

    

 

원저자 방선지(逄先知), 리지에(李捷) 공저.

- 방선지(1929년 산동 출생) 중공중앙 서기처 정치비서실 근무, 중공 중앙 사무처 비서실 근무, 중공 중앙 정치연구실 연구원, ‘모택동과 그의 비서 전가영(田家英)’ ‘모택동의 독서생활을 썼으며 모택동 선집등 중요 문헌 편집에 참여했다.

 

- 리지에(李捷, 1955년 산동 출생) 잡지사 사장, 중국 사학회 회장, 중국 공산당 16-17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중공당사를 연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사, 모택동의 평화사상, 중국 특색사회주의 이론을 연구했다. ‘신중국에 대한 모택동의 공헌’ ‘모택동 전기등 여러권을 저술했다.

 

중국 중앙문헌출판사 2010102, 201264

 

번역: 이영민 (철도노동자, 철도노조 실무간부)

 

 

<1>

 

 

모택동과 한국전쟁 (1)

 

60년 전, 195010,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 중앙은 항미원조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다. 중국 인민들이 수행할 항미원조의 서막을 연 것이다. 전략과 배짱, 그리고 기백이 필요한 결정이었다. 현대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방침이기도 하였다.

 

신중국이 장기간 전란에서 겨우 벗어난 시기였다.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으며 새로 태어난 인민정권은 아직 기반을 굳히지 못하였다. 서방국가들의 봉쇄에 직면하였고 각 방면으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상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득의양양하던 미국이었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미국에 대항할 상대는 없었으며 중국의 힘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중국 인민지원군과 조선 인민군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작전하였다. 빈틈없이 무장한 적과 사력을 다해 싸워 마침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한 UN군과 정전협정 서명을 이끌어 내었다.

 

 

예기치 않은 전쟁

 

평화를 사랑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항미원조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 1950625, 한국전쟁이 폭발하였다. 순식간에 전 세계 인민들의 시선이 동북아의 한반도에 쏠렸다.

 

보름전, 66일부터 9일까지 중국 공산당은 7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은 국가 재정경제의 기초를 호전시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서면보고를 통해 국제 정세를 총체적으로 예측하였다. 그는 전 세계 공산당이 일치단결할 때 평화민주역량을 키울 수 있다. 그래야 더 큰 발전을 얻을 수 있으며 새로운 세계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제기하였다. (2)

 

이 예측에 따라 회의는 당의 주요 당면 임무를 확정하였다. 그것은 국가 재정경제의 기초를 호전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회의는 또 1950년에 일부 병사를 제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614일부터 23일까지 전국 1차 정치협상회의 2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7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결정한 경제회복 방침에 따라 부서를 정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이 바라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한반도 사태에 대하여 신속하게 반응하였다. 그 반응은 북한은 물론 중국까지 겨냥한 것이었다. 627일 미국은 해군과 공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의 영해와 영공을 침입하고 조선 인민군을 공격했으며 북한 도시를 맹렬하게 공습하였다. 동시에 제 7함대에 대만해협에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중국영토인 대만에 침입 점거하여 중국인민의 대만해방을 저지하였다. 30일 미국은 육군에 한국전쟁 참전을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미국의 침략군 탱크가 한반도의 대지를 뭉개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대만과 한반도, 관계도 없는 두 지구를 연계하기 시작했으며 심각한 군사적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전략적 고려에 따라 중국과 북한 양국의 내정에 간섭했던 것이다. 미국은 냉전이 시작된 뒤 줄곧 이 두 지구를 공산주의 확장을 억제하는 교두보로 간주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영토인 대만을 자신들의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27일 발표한 성명에서 공언하였다. 북한이 공격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공산주의는 이미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독립 국가를 전복시키고 있다. 지금은 무력을 사용한 침범과 전쟁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 부대가 대만을 점령하는 것은 태평양 지역의 안전에 직접적 위협이 될 것이다. 미국의 군대가 합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3)” 미국은 직접 대만 문제에 끼어들어 중국 인민의 조국통일사업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대만해협 양안의 중국인들이 지금까지도 나뉘어 지내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신속하게 반응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1950628일 중앙인민정부 위원회 제 8차 회의에서 엄숙하게 선포하였다. “전국이 전세계 인민들과 단결하여 충분히 준비하자. 미 제국주의의 어떠한 도발도 물리쳐야 한다.” “트루먼은 금년 15, 성명을 내어 대만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미국은 중국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일체의 국제협정을 훼손하고 있다.”(4)

 

모든 일은 충분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 77UN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UN군 사령부결성을 통과시켰다. 8일 맥아더를 UN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 하루 뒤, 모택동과 중공 중앙은 몇 개 군을 동북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압록강 강변에 배치하여 동북 변경을 강화하였다. 77일과 10일 중앙군사위원회는 모택동의 제의에 따라 주은래가 주재하는 두 차례 회의를 소집하였다. 국방강화를 강구하고 동북 변방에 배치한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서였다.

 

13일에는 중앙군사위원회가 동북 변방을 보위하기 위한 결정을 하였다. 모택동은 그날 결정에 동의한다. 그대로 집행하라.”며 재가했다. 얼마 후 하남 등에 주둔하던 전략예비대 제 13병단(38, 39, 40군을 관할)에 더해 제 42(당시 이미 동북에 있었다.)과 포병 제 1사단, 2사단, 8사단등 모두 255천명으로 동북 변방군을 편성하였다. 이 군대를 안동(현재의 단동), 집안, 본계에 배치하였다. 8월 상순에는 동북 변방군 편성이 완료되어 집결 훈련을 시작했다. 96, 50군을 다시 동북 변방군에 편입시켰다. 이것은 멀리 내다본 전략적 결정이었다.

 

6년 후 모택동은 이시기의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우리는 우선 3개 군을 이동시켰다. 그 후 2개 군을 증강하였으며 모두 5개 군을 압록강변에 배치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제국주의가 3·8선을 넘는 것에 대비하였다. 비로소 우리는 출병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면 적이 더 빨리 넘어왔을 것이다.”(5) 그후 모택동은 여전히 애석하다는 투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5개 군밖에 없고 화력도 약했던 것이 아쉽다. 7개군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주(6)

 

한국전쟁이 폭발한 뒤 모택동은 사태 발전에 대하여 이미 여러 착상들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 나쁜 국면에 대하여도 예측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군이 조선 인민군 측후방 해안에 상륙하는 것이다.- 19508월 조선 인민군은 한반도 남단 낙동강까지 미군과 한국군을 밀어붙인 뒤 교착되어 있었다. 이때 모택동은 전쟁이 지구전이 될 것이며 미국이 전쟁규모를 날로 확대시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84, 중공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만약 미제가 승리하면 득의양양하여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우리는 조선을 돕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도와야 한다. 우리는 지원군 형식으로,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7)

 

그 첫날, 모택동은 총참모장 대리 섭영진(聂荣臻)의 보고를 읽고 있었다. 보고서는 파견한 군대중 고사포 부대가 북한쪽에 진입하여 압록강 대교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모택동은 즉시 재가하였다. “동의한다.” 모택동의 재가는 중국 인민지원군이 순조롭게 출병하는데 중요한 결정이었다.

85, 모택동은 동북군구 사령관겸 정치위원 고강(高岗)에게 전문을 보냈다. 동북 변방군이 한달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9월 상순 작전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818일 다시 고강에게 전문을 보내 930일 이전에 변방군의 준비를 마치라고 요구했다. 뒤이어 총참모장 대리 섭영진이 건의했다. 9병단과 제 19병단을 진포(津浦),룡해(陇海) 철도 연선지구에 나누어 배치, 협동작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95, 모택동은 중앙인민정부 위원회 제 9차 회의에서 지적하였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한국전쟁이 지구전화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판단이었다. 모택동은 미국의 군사상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여 개괄적으로 제기하였다. “장점이 하나고 단점은 셋이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하나의 장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철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3개 약점이 있다. 그래서 장점 하나, 단점 셋이라고 한 것이다. 3개 약점이란 첫째 전선이 너무 긴데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까지이다. 둘째, 수송로가 너무 길다. 두 개 대양으로 떨어져 있는데 태평양과 대서양이 그것이다. 세 번째로 전투력이 너무 약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택동은 결코 적을 가볍게 보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발언속에서 미제국주의가 제멋대로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그는 그렇게 한다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원자탄을 쓴다면 장기화될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보다 길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중국인민은 전쟁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 희망은 싸우지 않는 것이지만 그들이 우리를 때린다면 우리도 부득이 때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 것으로 치고 우리는 우리 것으로 친다. 그들이 원자탄을 쓴다면 우리는 수류탄을 던질 것이다. 그들의 약점을 잡고 쫓아가 때려 최후에는 그들을 패배시킬 것이다.”(8)

 

이런 극단적인 발언은 모택동의 기세를 말해준다. 어떤 적과 어떤 곤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혁명적 기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택동은 최악의 가능성을 대비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자 비교할 수 없는 강국인 미국과 직접 겨뤄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출병할지 안할지는 미국이 삼팔선을 넘을 것인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미제국주의가 간섭해도 삼팔선을 넘지 않는다면 우리도 관여하지 않는다. 만약 삼팔선을 넘는다면 우리도 반드시 참전할 것이다.”

 

915, 한국전쟁에 급속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미군 7만명이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였다. 한반도 남부 낙동강에 있던 조선 인민군 주력은 퇴로를 차단당했다. 앞뒤로 적을 맞아 조선 인민군은 전략적 후퇴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918, 중국의 북한 주재대사 예지량(倪志良)이 전문을 보내어 보고했다. 내용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 말한 최근 전황 및 장기작전 준비상황등이었다. 20, 주은래는 예지량에게 전문을 보내 김일성에게 중공 중앙이 보는 한국전쟁에 대한 견해를 전달하도록 했다. 모택동은 이 전문을 읽은 뒤 수정하였다. 전문의 내용은 우리는 당신 -김일성을 지칭한다.- 의 장기작전에 대한 견해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조선 인민군과 인민들의 영용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적이 인천 방면에 병력을 증강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 목적은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 한반도 교통을 남북으로 토막내려는 것이다. 그 폭이 삼팔선에 이를 것이다. 인민군은 반드시 삼팔선 이북을 사수해야 하며 지구전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자력으로 버티며 장기간 분투해야 하는 문제를 고려하기 바란다. 총방침으로 어떻게 주력을 보존하고 적을 각개격파하여 섬멸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전문을 보내어 구체적으로 제의하고 설명했다. “이 제안들은 친구,동지의 입장에서 제기하는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9)

이때 중국정부는 미군이 삼팔선을 넘을 것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929일 밤, 모택동은 주은래의 전문을 받았다. “미제국주의가 삼팔선 이북으로 진군할 것을 공개적으로 표시했다.”(10)는 것이었다. 예지량은 29일 전문을 보내 삼팔선 북쪽을 방비하는 부대가 없다, 상황이 심각하다, 적이 곧바로 평양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11)고 전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처지가 아주 위급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정무원 총리 주은래가 930일 전 세계에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중국인민들은 평화를 사랑한다. 하지만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과거는 물론, 앞으로도 침략에 대한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인민들은 외국의 침략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이웃이 제국주의자들 침략에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101일 한국군이 삼팔선을 넘었다. 같은 날 맥아더는 북한에 최후 통첩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전투를 중지하라.” 그 시각 UN군은 남한에 33만명의 병력을 집결해놓고 있었다.(12) 103일 새벽 1, 주은래는 긴급하게 중국주재 인도대사 파니카(Kavalam Madhava Panikkar 1895-1963)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미국에 강력히 경고했다. “미국 군대가 지금 삼팔선을 넘어 전쟁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고 관여할 수밖에 없다.”(13)

 

그러나 미국은 중국 인민의 역량과 침략반대에 대한 결심을 지나치게 낮게 보았다. 중국 정부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고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14) 107일 미군은 개성지구에서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밀고 올라갔다.(15) 12시간 뒤 미국이 조종하는 UN군은 한국을 통일하자.”는 제안에 동의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전쟁의 불길을 압록강변에서 중국 동북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B-29 폭격기와 다른 작전기를 띄워 중국 동북 변방도시인 안동(安东), 집안(辑安)등에 빈번한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건축물과 공장, 차량을 부수고 중국의 평민들이 폭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또 정상적으로 운항하던 화물선을 습격했다.

 

10월부터 미국은 비행기로 산동반도에 위치한 청도(青岛),연태(烟台) 등을 습격했다. 전화가 중조 국경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컸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확대시키며 기고만장했다. 중국 인민들이 힘들게 지켜온 민족독립과 안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제했다. 그것은 중국을 지키고 조선을 지원하는 것”(16)이었다.

 

형세는 이미 한걸음 더 발전하고 있었다. 예컨대 팽덕회(彭德坏)는 이시기 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했다. “미군은 삼팔선을 넘었을 때 우리가 공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각주>

1) 책의 본래 이름은 모택동과 항미원조이다. 항미원조(抗美援朝)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이다.

2) ‘모택동 문집6, 인민출판사 19996월판, 67-68

3) '트루먼 회고록2, 세계지식출판사 19651월판, 395

4) 1950629인민일보

5) 모택동이 소련 중앙대표단을 회견할 때 한 말이다. 1956923

6) 모택동이 김일성과 회견할 때 한 말이다. 19701010

7) 모택동이 중공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발언한 기록이다. 195084

8) 모택동이 중앙 인민정부위원회 제 9차 회의에서 발언한 것이다. 195095. ‘모택동 문집6, 인민출판사 19996월판, 92-94

9) 주은래가 예지량에게 보낸 전문, 1950929

10) 주은래가 모택동에게 보낸 북한군의 상황에 대한 보고. 1950929

11) 주은래가 정치협상 전국위원회에서 거행한 건국 1주년 경축대회에서 보고한 것이다. 1950930. 1950101인민일보

12)  제임스 슈나벨(Jaims·F·schnabel) '한국전쟁중의 미군2, 국방대학출판사 199012월판, 212, 213

13) 주은래가 중국주재 인도대사 파니카와 대화한 기록, 1950103

14) 제임스 슈나벨(Jaims·F·schnabel) '한국전쟁중의 미군2, 국방대학출판사 199012월판 제 215, 218

15) 제임스 슈나벨(Jaims·F·schnabel) '한국전쟁중의 미군2, 국방대학출판사 199012월판 제 221

16) 모택동이 중공 중앙 중남국, 화동국, 서남국 책임자들에게 보낸 전문. 19501019

17) 팽덕회 곁에서 근무한 이들의 진술기록. 195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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