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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잊혀진 노동사, 아리아악기 사건 _ 김원 (37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1-14 조회 1676
 

외부의 지원이나 연대를 밪지 못했던 아리아악기 투쟁은 '인질사건'으로 지금도 78년 신문 사회면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인질극 외에 다른 선택이 존재했을까......

 잊혀진 노동사, 아리아 악기 사건

  김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78년 겨울, 신문지상에는 아리아악기 사건, 인질극 등의 제목으로 사회면 기사가 실렸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 보면, “社員(사원)5, 副社長(부사장)집 침입 低賃(저임暴力(폭력)불만 人質劇(인질극)”(동아일보), “아리아樂器(악기) 副社長(부사장)집서 人質劇(인질극)”(경향신문) 혹은 나폴레옹 코냑 등을 마시며 벌였던 인질극처럼 기록돼 있다. 당시 전자오르간 등 악기를 수출하던 성장업체였던 아리아악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인질극이란 낯선 용어가 신문에 등장했을까. 그들은 술을 마시며 칼을 휘두르고 고용주와 그 가족을 위협한 범죄자였을까. 70년대 노동사에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아리아악기 사건을 통해 한국노총과 민주노조 운동 사 사이에서 잊혀진 70년대 비조직적 저항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1978121일 오후 730분경 대구 아리아악기주식회사 정구웅 부사장 집에 5명의 노동자들이 찾아와 가족들을 인질로 납고 농성을 벌였다. 인질극을 벌인 노동자들은 연합노조 경북서지부 아리아악기 분회장 정재종, 부분회장 기능공 권탁, 조합원 박두환, 이상열 등 5명이었다. 이들은 이날 부사장인 정구웅의 집으로 찾아가, 1)회사 전자과장의 즉각 교체, 2) 임금 50% 인상, 3) 악기부품의 즉시 공급, 4) 자격증을 가진 기능공의 우대, 5) 공구의 개인별 지급 등을 요구했다. 부사장이 요구를 거절하자 이들은 준비해 간 과도를 꺼내 부사장에게 5개항의 조건을 수락하라고 위협하였다. 부사장은 완력으로 노동자들을 제압하려 하려다가 손에 상처를 입고 탈출하여 강도가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이윽고 2백여 명의 경찰관이 출동하자 아리아 악기 노동자들은 가족들을 안방에 가두고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들은 경찰에게, “들어오면 식구들을 모두 불을 질러 죽여 버리겠다고고 위협하였다. 경찰의 자수 설득에도 이들은 부사장을 들여보내라고 요구하다가 회사 전표, 경리장부 등 서류뭉치를 경찰에 건네주고 탈세로 치부한 악덕기업주를 처벌하라고 외쳤다. 경찰과 대치한 상태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날인 122일 새벽 4시경 노동자들은 부사장 정구웅이 나타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는 약속과 부사장도 아울러 구속한다는 경찰의 약속을 듣고 경찰에 자수했다.

왜 그들은 그리로 갔는가

아리아악기 주식회사는 1961년 설립되어 전자오르간과 리드 오르간을 생산하여 교회에 납품하여 연간 30만불을 유럽등지에 수출하는 회사로 78년 당시 종업원 130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아악기 대표는 서울 여의도 어느 교회의 장로인 하태봉이었고 부사장 정구웅도 대구 남문교회 집사였다. 장로와 집사가 회사 고용주인 곳에서 인질극이란 신문기사 타이틀은 왠지 낯설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나자 사측은, “일부 불량 종업원들의 일시적 충동이 빚은 결과라고 해명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인질극이라고 불렸던 사건은 극심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폭행이 난무하는 노동조건 아래에서 누적된 노동자들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이었길래 노동자들은 부사장 집에까지 갔을까?


1978년 1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기록에 따르면 아리아악기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견습공이 15,000~25,000, 숙련기능공은 20,000~45,000원이었다. 심지어 7-8년 근속자의 경우도 35,000원 수준이었으며 10년 근속자도 45,000원 정도였다. 더군다나 사측은 임금인상 시기 회사에 고분고분한 노동자만 골라 2,000~3,000원 정도 더 얹어주는 방식으로 노동자 간의 차별대우를 했고, 노조 간부 14명에게는 전혀 임금인상을 해주지 않았다. 더욱이 사측은 일요일은 무급휴일로 처리해 왔으며 월차와 연차휴가를 주지 않고 연장 근로수당 마저 지급하지 않았다. 또한 정전일에는 휴무라도 60%의 휴업수당을 지불해야 함에도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정전후의 추가 작업은 대체근무로 여겼다. 197741일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면서 퇴직금을 일할(日割) 아닌 월할(月割)로 계산하여 20여만원을 떼어 먹었으며 퇴직금을 청산하여 퇴직금누진제를 막기도 하였다.
노동조건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업장에는 분진(粉塵)이 많아 방진마스크가 없으면 일하기가 어려운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 수도를 끌어들이지 않아 지하수를 먹다가 배탈이 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밖에도 부속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았지만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고통이 가해져서 노동자들은 항상 전전긍긍해 했다.
노동조건 이외에도 작업장내 일상적인 폭력은 관행화됐고 기독교 기업이란 명목으로 강제적인 시간외 노동을 강요했다. 아리아 악기는 사장 하태봉이 여의도 교회 장로, 부사장 정구웅이 대구 남문교회집사로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해 간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매주 월요일 마다 30분씩 일찍 출근시켜 강제로 예배를 보게 하였다. 1977년에는 노동자들의 종교를 조사하여 가톨릭 신자에게는 봉급인상 등 노동조건에 차등대우를 했다. 이처럼 사측은 기독교 신앙전파보다는 오히려 예배시간을 통하여 노동자들이 사측의 명령에 순종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을 강요하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노동자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이용했다. 이처럼 저임금, 열악한 작업조건, 폭행, 비인간적 대우 때문에 1975년 한해 노동자들이 집단사표를 낸 것만 해도 4차례나 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과 사측의 대응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 맞서 아리아악기 노동자들은 불평이나 집단사표 등 개별적 방식이 아닌, 단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19777월부터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1977813일 목공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정하면서 정재종을 분회장으로 선출하여 연합노조 경북서지역지부 아리아악기분회로 등록했다.
분회장 정재종은 군경유가족으로, 19771월 원호처의 취업명령을 받고 입사하였다. 그는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였으며 5, 6회 이상 전 조합원을 모아 회의를 하면서 노조의 활동상황을 조합원에게 알렸다. 노조설립 과정에서 아리아악기에 수년간 근무하면서 노동자의식을 고취해오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회사동료들과 만나며 조직화를 진행했고, 노조 결성 때 회계감사를 맡았다.
노조 결성 이후 사측은 노조의 협상 요구에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체협약 자체를 지키지 않았다. 사측은 분회장을 해고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분회장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원호대상자이기에 해고시킬 수 없자 돈으로 그를 매수하려고 했다. 사측은 50만원을 봉투에 넣어주며 노조해산을 조건으로 분회장을 매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100만원까지 제시하기도 했고 심지어 나중에는 그를 빨갱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분회장 정재종은 사측뿐만이 아니라 정보부, 원호처에도 불려 다니며 여러 곳에서 시달림을 받았지만 오히려 중앙정보부에서는 분회장에게 잘못이 없고 아리아 악기의 노동조건이 너무 열악해서 이를 개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분회장에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측은 단체협약에 의해 197710월 임금을 10% 인상하기로 했지만 노조활동을 한 14명에게는 인상을 해주지 않는 등 단체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1977117일에는 전자과장이 노동자 3명을 기관실로 데려가 다른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쇠파이프로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합원들이 이에 항의하자 부사장은,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군대에서 맞아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냐라는 망언을 일삼았고, 분회장이 수도를 끌어 달라고 요구하자 욕설을 해서 노동청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사장은 그 정도 욕설로 고발을 했다고 도리어 분회장을 정신이상자로 취급했다.

연이은 폭행과 결단

사측과 지부장, 조합원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19781월에 전자과장이 작업

 
 
아리아악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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