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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우리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다-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이야기(3)_이재성(4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12-20 조회 1655
 

최능진은 이승만 집권 후 빨갱이로 몰려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중에 풀려났다가 다시 이승만 정권 하에서 비밀스런 군법회의에 의해 처형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들이 최필립 현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최만립 전 대한마이크로전자 사장이다.

  우리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다 -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이야기(3)

  이재성(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200094일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일석 최능진에 대해서 국가의 사과법원의 재심 수용등을 주문하는 결정을 내렸다. 최능진(1898~1951)은 민족주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일제 때 옥고를 치루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 경무부 초대 수사국장을 역임하며 친일 경찰과 대립했다. 결국 경찰 조직에서 쫓겨나 이승만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정치공작으로 후보 등록이 취소당했다. 최능진은 이승만 집권 후 빨갱이로 몰려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중에 풀려났다가 다시 이승만 정권 하에서 비밀스런 군법회의에 의해 처형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들이 최필립 현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최만립 전 대한마이크로전자 사장이다. 그리고 최필립 이사장의 아들은 조선일보의 기자로서 평기자로서는 드물게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회원 자격이 있는 유력한 인물이다. 가족사의 굴곡은 잠시 접어두자. 다만 최만립의 업적과 대대로 이어지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하나의 신화가 되어 역사에 기록되는 동안 대한마이크로전자 노동조합은 세 차례나 무참하게 파괴되어 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대에 걸쳐 미국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각 계의 기득권 세력이 된 집안 남자들의 이야기 뒤에는 어떤 사연들이 있을까.

 
출처: 최만립 자서전,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p. 14

설명: 타원 안에 있는 인물이 최만립 사장(왼편)과 정주영 회장(앉은 사람)이다. 이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올림픽유치대표단이 1981930일 서울이 차기 개최지로 결정된 후에 서울올림픽 서약서에 차례로 서명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시민들에게 부지불식중에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상징조작, 이미지 정치이다. 이는 기억기념에 대한 노동계의 무관심과 큰 대조를 보인다.

1987년 초여름에 대한마이크로 1차 노조의 총무부장이었던 조현숙은 회사 근처를 오가면서 후배 노동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숙은 김미령 등 몇몇 후배들을 새로운 노동조합 결성의 주체로 조직했다. 김미령과 조현숙은 서로 아는 사이였고 김미령은 1984년 노조 결성 당시에도 언니와 함께 대한마이크로에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김미령의 언니는 1차 노조의 한국노총 위원장실 점거농성에도 참여할 만큼 적극적인 조합원이었다. 다만 한 집안에 자매가 모두 위험한 활동을 하는 것을 만류한 언니의 제안으로 김미령은 노조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새롭게 노동조합을 준비하던 이들에게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기간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교육과 단련의 시간이었으며 86일에는 노동자 29명이 모여 노동조합 복구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1차 노조가 이미 해산신고가 되어 있어서 이들은 95일에 노동자 54명이 모인 가운데 새로운 노조 결성식을 개최했다. 대한마이크로의 제 2차 노조의 출범이었다. 노동자대투쟁의 여파 속에서 노조는 상근자 두 명을 인정받았고, 조합 사무실을 사용하도록 용인되는 등 파업 없이도 노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임금인상 요구 역시 여렵지 않게 관철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대한마이크로 노조는 결성 직후부터 지역 내 민주노조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인천에서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전후로하여 한독금속, 남일금속, 태연물산, 대한마이크로, 신광기업, 서울조구, 대흥기계, 코스모스전자, 진성전자, 대흥기계 등 100여 개의 신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9882월에 16개 노조 60여 명이 참가한 인노협 준비위결성 공청회가 열였고, 316일에는 12개 노조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노협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여기에서 태연물산 박인숙 위원장, 코스모스전자 김해숙 위원장, 그리고 대한마이크로 김미령 위원장이 인노협결성에 대한 일정과 조직안을 제출했을 만큼 김미령 위원장은 그 중심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결성과정은 몇몇 그룹들 간의 논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1988327일에 인노협이 출범하였다. 초대 의장은 황재철 한독금속 노조 위원장이었지만 그는 88년 말에 스스로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조직 내 헤게모니를 둘러싼 정파간 대립 속에서 비교적 중립을 견지하던 황재철 의장은 활동에 한계와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1989년에 들어선 제 2기 지도부는 인노협 부의장이었던 최동식 남일금속 노조 위원장이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이목희 씨를 중심으로 인노협 출범 전부터 형성되어있던 지역 네트워크는 이후 한국노동연구소을 중심으로 공식화되어 인노협 주류를 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의 강력한 탄압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했던 인노협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것이었다. 최동식 의장을 비롯하여 지역 운동가들이 계속 구속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인노협은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198911월에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역시 일일 파업을 전개했고 회사 측에서는 위원장과 간부들을 징계위에 회부사고,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조치를 발표했다. 노조는 반발하면서 1129일부터 철야 농성을 시작했다. 김미령 위원장 등 노조 간부 네 명이 해고를 당했고,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하는 조합원 80여 명에 대해 출근을 막았다. 사 내에서는 조합원들에 대한 조합탈퇴를 강요했다. 19851차 노조에 대한 탄압 방식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결국 회사는 1220일에 노조원들에 대한 집단해고를 감행했다.

 

 


1984년에 시작된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의 역사는 199671일의 합의서로 결실을 맺었다. 80년대 인천 민주노조 운동의 새출발을 알린 1차 노조, 그리고 인노협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2차 노조, 마지막으로 신생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의 상급단체로서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 3차 노조였다. 이 한 장의 합의서에는 그 모든 역사가 농축되어 있다.


민주노조 지도부의 구속과 열정적 조합원들의 해고로 대한마이크로 노조는 큰 타격을 입었고
, 인노협 탈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지역 내 다른 노동조합들도 속속 인노협을 탈퇴하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노조만은 지켜보자는 마음에서 인노협 탈퇴’, ‘네 명 해고자 인정’, ‘간부 전원 사표 제출’, ‘출근힌 조합원에 대한 보복 금지등의 4개 조항에 굴욕감을 참으며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회사는 그 다음날부터 약속을 어기고 출근하는 조합원들을 생산라인에 배치하지 않았다. 사무실 옆 골방에 격리시키고 청소 등의 잡일만 시키면서 사고를 개조시켜야 한다며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매일같이 노동조합은 공산주의라는 내용의 교육을 하며 인노협 최동식 의장과 나와의 관계등의 주제를 주고 하루에 한 가지씩 A4 용지에 빽빽히 적도록 했다. 또한 1차 노조에서도 등장했던 입관식도 강요했다. 결국 1991520일자로 마지막 조합원이 강제사직 당하면서 노조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마이크로 노동자들은 19936월에 세 번째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노조 탈퇴 공작으로 인해서 조합원 수는 39명에 불과했다. 2기 지도부를 맡은 김명숙 위원장은 회사 측의 부당노동행위 끝에 해고당했고, 1년 간 힘겨운 복직운동을 벌이다 1995년에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이를 계기로 지역연대 투쟁이 전개된 것은 뉴스레터 46호 내용을 참조하시오)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의 오랜 투쟁이 결국 지역 연대투쟁을 이끌어 내고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된 합의로 귀결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199571일에 회사 측과 노동조합은 위원장 복직과 3개원 휴가 및 치료비 지급’, ‘파괴된 노조사무실 신축’, ‘공개 사과’, ‘민주노총 간부 고소고발 취소등을 내용으로 하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20일간 투쟁을 이끌었던 대한마이크로 노조탄압 분쇄 및 김명숙위원장 원직복직 추진 특별위원회는 조직을 대한마이크로 노조탄압 감시단으로 전환하여 활동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대한마이크로는 이낙반도체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가 최근 문을 닫았다. 그러나 최만립 회장은 건재하다. 그는 부친의 억울한 정치적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복권을 추진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신의 스포츠 외교를 부친이 몸담았던 체육교육에 대한 인연과, 부친이 추진했던 평양과 경성간 경평축구대회등의 가족사 속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그의 스포츠 외교에서의 최종 목표는 스포츠를 통한 남북통일에 대한 기여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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