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산행기
우리 형님 까르마 구릉
정용재(노동자역사 한내 발기인)
두 달 전 3년 만에 다시 히말라야에 갔습니다. 3년 전에는 히말라야가 주는 자연의 위대함에 취해서 온통 산만 보다 왔습니다. 40여 일을 아무 생각 없이 산만 타다 왔습니다. 그 유명한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랑탕 3대 트래킹 코스를 섭렵하고 왔습니다. 와서는 지인들을 만나 ‘히말라야 가봤냐,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고 잘난 척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3년 만에 다시 히말라야를 갈 기회를 접하니 고민이 생겼습니다. 지난 번 놓쳤던 히말라야 사람들이,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1일 동안 안나푸르나를 중심에 두고 원형으로 산군 200여 킬로미터를 탔습니다. 함께 동행한 형님이 있었습니다. 까르마 구릉. 나이 45세에 저 같은 ‘저질 체력’을 도와주려고 현지에서 포터 직업을 가지고 있는 형님입니다. 10Kg 정도 되는 제 짐을 지고 긴 여정동안 저를 도와준 형님입니다. 거기도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적 계약관계가 이루어져서 하루 10달러를 수고비로 주고 함께 한 분이었습니다.(그래봤자 이리 떼이고 저리 떼여서 21일 동안 노동력의 대가로 100달러밖에 못 가져가더군요. 현재 환율로 일당 7천원이네요).

형님과의 첫만남부터 당황했습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이틀 후 8시간동안 로컬버스를 타고 베시사하르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어디선가 ‘미스터 정’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생김새로는 삼촌뻘 되는 분이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제가 내리는 모습을 보며 불렀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버스정류장에서 3시간을 기다렸다더군요. 여정 내내 나이든 노인네를 모시고 내가 고생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적잖게 당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산행 첫날부터 형님의 고생을 종일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불평 한 마디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어느 길로 가야 지 모를 때 ‘미스터 정! 이 길입니다’ 하시며 저에게 길을, 아니 히말라야를 보여주셨습니다.
형님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산행 내내 매일같이 술을 드시더군요. ‘락시’라는 네팔 소주를 매일같이 권하였습니다. 술 땜에 웃지못할 일도 많았지요. 한 번은 4,500미터 고지대 마지막에 있는 산장 주인과 대낮에 술 먹고 싸우더니만 짐 싸고 내려가자 하길래 얼마나 황당했던지, 결국 제가 나서 사정사정 형님과 산장주인을 화해시키고야 말았습니다. 보름째인가 신고 계시던 신발을 잃어버렸을 때는 또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런데도 평소 주변에서 보던 짜증나는 술주정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형님에게 술은 하루의 피로를 풀고 마무리하는 의식 같아 보였습니다.
4일째 산행을 마치고 산장에서 형님과 찐한 술자리를 했습니다. 콩글리쉬 몸짓 발짓을 해가며 형님의 인생사를 들으니 참 기구하더군요. 여덟 살 난 아들을 홀로 어렵게 키우고 있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포터 일 중에는 어린 아들을 마을 사람들이 돌봐주며 키운다고 합니다. 형님 아이뿐만 아니라 네팔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직까지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정규 교육과정은 고사하고 펜, 공책도 제대로 없어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삶을 어릴 때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님의 삶이 짠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의 삶의 고통이 조금씩 다가왔습니다. 저개발국가라는 우리 가치판단이 우습긴 하지만 네팔이라는 나라 특히 도시나 촌에서 생계수단이라고 하는 것이 농사일과 온갖 허드렛일뿐이고 한 달 통틀어 버는 수입이 우리나라 돈으로 5만 원이 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실업자들도 눈에 띄게 많습니다.
12일짼가 5,504미터 쏘롱라를 넘는 최고 힘든 산행을 마치고 묵티나트에서 다시 형님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도중 형님이 물어보더군요. “미스터 정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아니 이게 웬 뜬금없는 질문인가 해서 “저는 돈 많이 벌고 싶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하면서 운동권 철학을 되지도 않는 영어로 설명하다가 다시 물어봤습니다. “형님은 돈 많이 벌고 싶은가 봐요?” 하니 “노!!! 나는 하루에 두 끼 먹고 락시 두 잔이면 인생에 아무 불만 없어요” 하더군요. 아 사람의 생각이 이럴 수 있구나, 누구는 대책 없는 낙오자 삶이라고 비웃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최 이해 할 수 없는 그 인생관과 가치관.
매일같이 형님에게 배웠습니다. 경외와 존경이 담긴 자연에 대한 태도, 자연 속에서 이루어진 삶의 기술과 호흡조절, 선입견 없이 저 같은 타인에게 대하는 태도, 형님은 그야말로 히말라야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더 많이 나눌 걸 하는 아쉬움이 밀려오지만, 다시 만날 지 또 모르겠지만, 저에게 뭐라 구체적으로 깨우쳐주지 않았지만 인생의 선배였습니다. 산행 도중 정말 죽을 고비를 두세 차례 넘길 때 제 생명을 구해준 은인, 한국 김치를 너무나 좋아한다던 까르마 구릉 형님이 히말라야에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