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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1994년 7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투쟁의 배경
1994년 들어서 김영삼 정부가 ‘무쟁의 원년’을 선포했다. 현대중공업 역시 정부 시책에 발맞춰 ‘무쟁의 원년 달성’이라는 목표 아래 현장 중심의 노무관리 정책을 펴는 한편 각종 교육과 행사를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측은 산업재해 사망 건을 비롯한 각종 현안 교섭에서 ‘보충협상이라는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 ‘무기력한 노동조합임을 인식시키겠다’는 전략 아래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술 더 떠 3월 27일 백형록 대의원과 조돈희 조직쟁의실장이 각각 집에서 괴한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서울경찰청 보안국으로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는 임단협을 앞두고 노조 핵심 간부를 구속해 노조를 압박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회사측은 구속 사건에 대해 “현장 내에 ‘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혁사노)가 관련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에 이갑용 노조 위원장은 4월 19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국가보안법 자체가 외국에서 간섭할 정도로 악법이며, 혁사노 조직 자체가 작년에 완전 붕괴했음에도 우리 동지를 구속한 것은 명백히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구속자 후생비 지급이 참석대의원 142명 중 찬성 128명, 반대 1명으로 통과됐다. 임시대대에서는 노조 간부와 조합원이 하나로 뭉쳐 단체교섭을 진행할 것을 결의했다.
4월 20일 1994년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노사 교섭팀의 첫 대면이 있었다. 노조에서는 이갑용 위원장을 비롯한 구영식 수석부위원장 등 교섭위원 14명이 참석했고 회사측은 김정국 사장 등 교섭위원 11명이 참석했다. 이날 노조는 상무집행위원회를 열어 그동안 검토해 왔던 임금인상 요구안을 확정했다. 조합원 평균 부양가족 수 3.6인(본인 포함)을 기준으로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울산지역 7개 시장과 2개 백화점을 대상으로 식료, 피복, 교통, 보건위생비 등 총 267개 품목을 조사하고 1994년 예상 물가상승률 5.9%를 고려한 요구안이다. 또 1988년에 임금협약을 체결하면서 변경했던 임금인상 시기(6월 1일)를 1994년부터는 일반직·기능직에 3월 1일부터 적용할 것을 요구했으며, 시급제를 월급제로 전환할 것도 요구했다.
4월 29일 종합운동장에서 15,000여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1994년 현대중공업노조 임단협투쟁 출정식’이 힘차게 열렸다. 조합원들의 요구가 드높았지만, 회사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5월 3일까지 5차 협상이 진행되면서도 단체협약안에 관한 검토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6차 협상에서 겨우 단체협약안 전문을 검토했으나 교섭은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김광웅 조합원의 죽음과 진상규명 투쟁
본격적인 임금협상 돌입을 앞둔 5월 14일 14시 20분경 12안벽 H861호선에서 작업 중이던 도장1부 김광웅 조합원(45세)이 쓰러졌다. 신음하고 있는 김광웅을 담당 반장이 발견해 해성병원으로 후송했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김광웅 조합원은 H861호선에 올라가서 동료 4명이 홀드 안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는 중에 스프레이 기계(에어펌프)를 보며 호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1시간 정도 작업한 뒤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홀드 내부의 작업 과정을 확인하려 했던 김광웅 조합원(안전모 착용)은 보강재를 딛고 서서 상체를 구부려 해치 커버와 해치 코밍 틈 사이를 들여다보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 이후 회사 안전관리실 보고서에는 “해치 커버가 닫혀 있는 상태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재해자의 과실과 부주의로 인해 높이 1m도 안 되는 곳에서 실족 사망한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노동조합 산업안전보건부와 도장부 대의원들은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추적조사를 벌이고 작업자들의 진술과 전황을 토대로 노사 합동 현장검증을 시행했다. 조사 결과 사고 당시 해치 커버가 열려 있었고, 작업 진행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재해자가 취했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실제 김광웅 조합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다른 데 있었다. 시신을 검안한 해성병원 의사가 노조 간부에게 “뇌의 손상으로 사망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니 부검이 필요하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또 회사측 보고서는 “실족하면서 뒤로 떨어져 뇌에 심한 충격이 가해져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1m도 안 되는 높이에서 평평한 철판 위에 떨어진 시신의 가슴 부위 상처(흉부좌상)와 등 쪽 허리 부위의 밀린 듯 찍힌 깊은 상처가 의문이었다. 1m도 안 되는 높이에서 떨어질 때 가슴과 등 쪽에 상처를 입힐만한 구조물은 주위에 없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사고의 진상을 정확하게 밝히라고 나섰다. 또 비가 오고 있었음에도 무리하게 작업을 강요, 강행시켜서 일어난 사고이므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조합은 19일부터 집행부 철야농성, 25일부터 대의원 철야농성을 벌이면서 정문 피켓시위, 작업복 갈아입지 않고 각 부서 대의원 주도 추모집회 개최, 조선 부문 집회와 전 조합원 중앙집회 등을 벌이면서 투쟁해 나갔다. 그러나 회사는 사고원인 규명 의지는 없었고, 무성의로 일관하라 뿐이었다. 급기야 5월 22일 협상에서 권영철 총무부장은 “상부에 보고는 안 했지만 1억 3,700만 원 이상 줄 수 없다. 죽은 사람 잘못이다”라는 발언을 해 유족과 조합원들을 분노케 했다.
게다가 그동안 벌여온 13차례의 단체교섭, 3차례의 임금교섭, 4차례의 고 김광웅 조합원 산재처리에 관한 교섭, 그 어느 것에서도 회사는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이제 더는 협상만 진행하고 있을 수 없었다. 집행부 철야농성 8일째, 대의원 철야농성 2일째인 5월 26일, 신관 5층 회의실에서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대의원 216명 중 181명(83.8%)이 참석한 가운데 92.27%(167명)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노동쟁의 발생을 결의했다.
노조는 곧바로 산업재해 예방대책과 성실 교섭 촉구를 위한 상경 투쟁을 전개했다. 대의원·소위원 300여 명이 계동 사옥, 정부 합동민원실, 과천 정부종합청사, 민자당사 등을 방문했다. 상경투쟁단은 정세영 회장과 면담하는 한편 탄원서를 정부 종합민원실, 민자당, 노동부 등에 접수하며 관계자들에게 대책을 호소했다. 민자당의 한 관계자는 “사측이 주장하는 추락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강한 의문을 제기했고, 노동부 관계자도 “사고 경위에 대해 검찰에 재조사를 요구하고, 사체에 대한 의문점은 전문 기관에 의뢰해 다시 확인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세영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는 대의원·소위원들에게 어떤 전무가 “과거와 같이 (상경투쟁) 하면 국민이 옛날처럼 좋게 보지 않는다” “이번 일은 누군가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 “장례를 먼저 치러야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5월 28일 자 <인사저널>을 통해서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상경투쟁은 무모한 집단행동”이라고 매도했다.
5월 27일, 김광웅 조합원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또 한 조합원이 숨지고 말았다. 4월 27일 오전 7시경 야간근무를 마친 뒤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다 갑자기 쓰러졌던 의장3부 기술관리1부 김길헌 조합원이 끝내 사망한 것이다. 사측은 5월 28일 밤 고 김길헌 조합원 유족과 장례비 850여만 원(평균임금 128일분)을 포함한 보상금 1억 4,500만 원, 별도 소요비용 명목으로 300만 원에 보상 합의했다.
현대중공업 단체협약 제97조 장례비 지급에 관한 조항은 “회사는 조합원이 업무상 사망한 경우에는 평균임금 150일분의 장례비와 장례에 관한 편의시설을 지원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고 김길헌 조합원의 경우 장례비가 1,100만 원인데, 사측이 유가족을 속여 120일분만 보상금으로 지급한 것이다. 노조가 유족에게 규정을 알려줘서 유족이 회사측에 150일분을 요구했으나 사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얼버무렸다.
집행부 철야농성 12일째, 대의원 철야농성 6일째인 5월 30일, 노조는 사측이 고 김광웅 조합원 보상문제와 협상에 성의만 보인다면 쟁의행위를 위한 조합원 투표를 연기할 수 있다는 뜻를 밝히고 대의원 철야농성을 잠시 중단했다. 회사는 현장 조합원들의 강력한 항의와 대·소위원 전원의 헌신적 투쟁에 밀려 노동조합에서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광웅 조합원이 숨진 지 18일만인 5월 31일, 겨우 사측과 보상문제를 마무리했다. 내용은 △보상비 1억 4,500만 원, 장례비 1,000만 원, 기타 위로금 500만 원과 퇴직금과 상해보상보험금은 별도 계산 △아파트 분양 관련 계약관계 계속 유지 △자녀 학자금은 1995년부터 노동부 산재 장학금으로 대체 지급, 자녀 학교 졸업 후 취업 알선 등이다. 고 김광웅 조합원은 6월 2일 오전에 발인, 장례를 치르고 고향인 전북 임실 선영에 모셔졌다.
파업투쟁 전개
6월 10일 현대중공업노조 전 조합원은 17시 퇴근 후 잔업을 거부하고 일산해수욕장에서 열린 현총련 주최 ‘6월 민중항쟁 계승과 1994년 임단협 갱신투쟁 승리 결의대회’에 참여했다. 현총련 이갑용 의장은 조합원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회사에서 “오늘을 계기로 공동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대의원간담회에서 중앙쟁의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6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 22일 분과 쟁의대책위 출범식과 중앙집회를 열었다. 쟁의행위 찬반투표가 23일로 예정된 가운데 회사측은 “누구를 위한 쟁의인가, 예비된 음모에 경악한다”는 제목으로, 전노대 회의자료와 결정사항을 게재하며 “회사는 쟁의를 위한 쟁의, 전국 투쟁을 엄호하기 위한 투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번영이냐? 몰락이냐? 표결권을 가진 조합원, 바로 여러분의 선택인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다.
이러한 압박에 굴하지 않고 노조는 23일에는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72.2%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이어 24일 3시간 부분파업을 시작으로 28일까지 5~6시간 부분파업, 6월 29일~7월 1일 전면파업을 벌였다. 노동조합은 40차례의 단체협약 협상, 25차례의 임금협상을 진행했지만 타결 기미가 보이지 않자 7월 2일부터 9일까지 부분 파상파업을 진행했다. 7월 8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조문 파동이 심각해지자 노동조합은 7월 12~16일 정상 조업에 들어갔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모든 언론이 집중된 가운데 6월 중순 이후 전지협 파업으로 촉발된 노동자 투쟁에 대한 언론 보도도 일순간에 파묻혀 버렸다. 중앙쟁대위는 “자본과 정권은 김주석 사망이 몰고 온 정세 변화를 악용하고 있다”며 “유연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조합원의 단결로 정세를 타개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직장폐쇄에 맞선 투쟁
7월 20일 오후 3시, 41차 단체협약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시각에 김정국 사장은 기자회견을 했다. 김 사장은 “쟁의로 인한 매출 손실, 대외신용도 하락, 그리고 노조의 투쟁 목적이 제2노총 건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협상 진전이 어렵다고 판단해 무기한 직장폐쇄 조치를 취한다”며 “직장폐쇄 중에도 협상은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노동부 노사정책실장은 현대중공업 사태가 장기화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노동조합에 전달했다. 한 노동부 관계자는 “직장폐쇄 후에도 진전이 없을 시는 긴급조정권 발동이 불가피하다”고도 발언했다.
사측의 직장폐쇄에 대해 노조는 전 조합원이 모여 집회를 하고 조합원 5백여 명이 LNG선을 중심으로 철야농성에 돌입하는 한편 노조 사무실 주변에 천막을 치는 등 전면투쟁을 준비했다. 21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현 상황의 긴박함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통한 해결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며 “지금이라도 정부와 사측이 직장폐쇄를 철회한다면 우리 노동조합은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7월 21일 전면투쟁 돌입을 선언한 노동조합은 “전 조합원은 매일 아침 정상 출근해 중앙 지침에 따라 투쟁할 것”을 조합원 행동지침으로 내렸다. 또 “직장폐쇄가 철회되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 휴가파업은 없고 LNG 및 골리앗 점거투쟁과 매일 출근집회를 1994년 임단협 갱신투쟁 승리의 날까지 지속한다”는 전면투쟁의 원칙을 발표했다.
22일부터는 전 조합원이 2교대(격일제) 천막 철야농성에 돌입했고 조합원 가족들도 투쟁에 동참해 회사 안에서 야영을 했다. 연일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아침 집회를 열어, 회사가 교섭하자면서도 ‘누구를 위한 파업인가?’ ‘그렇게 판을 깨도 되는 겁니까?’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해서 교섭 결렬의 책임이 마치 노동조합에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행태를 규탄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7월 24일 노동조합은 시한부 교섭에서 단체협약 갱신 요구안 중 상당 부분을 양보해 60여 개 조항을 타결하고 안전조치, 업무상 재해보상, 퇴직금누진제 등 19개 쟁점 조항에 대해 수정안을 내면서 타결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회사는 △휴일중복 처리 1995년 1월 1일부로 폐지 △일방중재안 신설 △명휴 폐지 △노조 전임자 수 1,000명당 1명, 전임자 임금도 조합비로 지급 등 개악을 고집했다. 게다가 “더는 단체협약 교섭에서 내놓을 것이 없다” “해고자 부분은 단체협약에서 논의할 사안이 아니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날 협상이 결렬된 후 노동조합은 국·실장단 회의, 대의원간담회 등을 잇따라 열어 회사가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려 하는 한 협상에 의미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장기 투쟁 태세로 들어갔다.
직장폐쇄에 따른 전면 투쟁 돌입 8일째인 7월 28일,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은 노조 창립 7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노조는 1993년까지 7월 21일을 창립일로 기념해 왔으나, 이날은 1987년 노사협의회가 한국노총 조직부장 이진우의 도움으로 노조설립 신고서를 제출한 날일 뿐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역사와는 사실상 상관없는 날이다. 따라서 노조는 7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조의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조합원들이 최초로 대운동장에 집결해 투쟁을 시작한 1987년 7월 28일을 노동조합 창립일로 정하고 파업 기간 중 첫 기념식을 치른 것이다.
7월 30일에 회사는 7월 28일 노조창립기념행사에 참여한 최은석 대우조선노조 위원장, 백윤선 한라중공업노조 위원장, 손봉현 현대정공노조 위원장 등 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 임원들과 이정선 현대중공업노동자가족협의회 회장까지 4명을 제3자개입금지조항 위반으로 울산지방노동사무소에 고발했다.
8월 1일 노동조합은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 일동’ 명의로 회사 고문인 울산 동구 정몽준 의원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공개질의서에서는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이자 고문인 당신께서 순수한 회사대표로 복귀한 후, 노조의 대표인 위원장과 함께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회사와 노동조합의 장래를 논의하고 바로잡아 주시길 바란다”며 “하지만 이와 같은 노동조합의 순수한 제의와 제안을 묵살하고 회사고문 역할과 동구지역 국회의원 역할을 포기한다면 우리 2만 2,000 조합원과 8만 현대중공업 가족 모두가 발 벗고 나서 당신의 낙선 운동과 퇴진운동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 날(8월 2일) 저녁에는 종합운동장에서 정몽준 의원 퇴진을 위한 동구 주민결의대회를 열었고, 8월 4일에는 매일 아침 출근투쟁을 전개해 온 조합원 가족들이 정몽준 의원 사무실에 항의 방문했다.
직장폐쇄에 따른 전면투쟁 돌입 15일째인 8월 4일 오후 6시 30분, 종합운동장에서 9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994년 임단투 승리를 위한 조합원·가족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문화행사로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됐는데, ‘노래마당’의 노래공연, 풍물패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 처음 등장한 10m 크기(12개, 지단별 1개씩) 대형 사자탈놀이, LNG선을 비유한 ‘물위의 궁전’이라는 극 공연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조합원이면서도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일부 직·반장을 동원한 사측의 분열 공작과 교섭 태도를 규탄하고 투쟁 결의를 다졌다.
8월 5일에도 사측은 교섭을 통한 해결 의지는 전혀 없이 노조의 항복만 요구하면서 조합원들의 분열 공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부 역시 사태 해결은커녕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하고 고소·고발 취하를 막으며 철저한 노조 말살을 유도하고 있었다. 중앙쟁의대책위원회는 “우리를 억압해 오던 인간들이 추방된 해방 공간에서 마음껏 해방감을 만끽하도록 합시다! 사측 직장폐쇄 조치로 마련된 현재의 해방 공간에서 일상생활과는 색다른 놀이문화를 활성화시켜 올바른 노동자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노동자 의식을 파괴해 왔던 자본가의 문화인 향락성 오락을 근절시켜 나갑시다”라며 건전하고 생산적인 파업 문화를 제안하고 다양한 놀이계획을 알렸다.
전면 투쟁 27일째인 8월 16일, 사측이 “17일 0시부로 직장폐쇄를 해제한다”고 통보했다. 중앙쟁의대책위원회는 △직장폐쇄 철회 환영 △현재의 농성 유지(골리앗, LNG선 사수)하며 협상 재개하되 최대한 이른 시일 내 사태 해결 △현재 설치된 바리케이드 모두 철거 △17일 오전 10시 협상 요구 공문 발송 등의 입장을 밝혔다.
한편 직장폐쇄 동안에 현총련 산하 노조 간부 400여 명은 현대중공업 정문에서 사측의 기만적인 직장폐쇄 철회와 성실교섭을 촉구하는 집회와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전노대는 현대중공업 투쟁에 전국의 노동자들이 함께할 것을 호소하는 임금인상 투쟁 대자보를 제작해 소속 노조에 배포했고 8월 25일에는 대표단이 현중노조를 방문하기도 했다.
직장폐쇄 철회 이후
직장폐쇄가 철회된 첫날인 8월 17일, 노동조합이 문제 해결을 위해 양보해서 단체협약안 쟁점 중 6개 항에 합의했지만, 사측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사측의 협박성 경고장 남발과 관리자들의 회유 협박 전화가 계속되던 8월 18일, 이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한 김금열 조합원이 농약을 먹고 신음하다 발견돼 해성병원으로 옮겨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중태에 빠졌다. 회유와 협박으로 김 조합원이 농약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회사측인데도 통합 8차 임단협 교섭에서 김 조합원이 소속된 부서의 담당 중역은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 조합원들을 분노에 떨게 하였다.
8월 23일 통합 협상에서 회사는 임단협 최종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고소·고발 취하에 대해서는 회사 이름으로 직접 고발한 8건만 취하하고, 개인이나 하도급 소장들이 고소·고발한 건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1994년 현대중공업 임금협상 사측 최종 제시안은 △정기임금인상 45,500원 △호봉승급분 25,500원(18,500원+7,000원), 7,000원은 승차권 제도 없애고 일률적 기본급화한 분 △가족수당분 11,687원, 근속수당 247원, 특수직무수당 1,785원, 지역·복지수당 5,000원(3,000원+2,000원 추가 제시분) △상여금 700% △일시금 50만 원 △휴가비(하기) 25만 원(하기) △휴가비(추석, 구정) 17만 원(15만원+2만원 추가 제시) △성과금 전년도 매출액 달성시 100+α 등이다.
8월 25일 임시총회에서 사측 최종안이 55.4%로 가결됐다. 노동조합은 62일간의 기나긴 파업투쟁을 전개하느라 가족과 떨어져 지낸 조합원들을 위해 26일부터 31일까지 휴일을 제외한 5일간의 정기 휴가를 결정했다. 그런데 사측은 ‘26일 조인식을 하지 않으면 생산성 향상 격려금 50만 원을 지급할 수 없다’, ‘휴가비를 15만 원만 지급하겠다’는 등의 수작을 부리면서 휴가를 떠나서 조합원이 없는 26일에 조인식을 하자며 시비를 걸어왔다.
탄압에 맞선 노동조합 사수투쟁
휴가가 끝난 9월 1일에 전 조합원이 15시에 작업을 종료하고 ‘1994년 임단협 조인식’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임단협 마지막 실무협상 때 느닷없이 불거져 나온 상여금 지급률 문제가 조합원의 분노를 샀다. 7~8월 사측의 직장폐쇄로 발생한 ‘무노동 무임금’을 노동조합으로 떠넘기며 상여금을 삭감하는가 하면 대의원·소위원을 비롯해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한 조합원들에게 상여금을 차등 삭감 지급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실무협상 마무리 과정에서 “정부정책 때문에 당장 전부를 지급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보전해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뒤집고 정부 핑계를 대며 발을 뺀 것이다.
이에 9월 1일 63차 중앙쟁의대책위의 결정에 따라 부위원장단이 현대중공업노조를 대표해 2박 3일 상경투쟁에 나섰고, 노조는 9월 2일 사측에 협상 재개 공문을 발송했다. 서울로 올라간 부위원장들은 9월 2일 국회 노동위 홍사덕 의원을 만나 “9월 10일 개최되는 정기 국회에서 현대중공업 문제가 다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답을 얻었다. 또 각 정당과 김말룡 의원 등을 만나 진상을 알리고 9월 5일 새벽 울산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사태 해결을 위한 지도부의 노력에도 사측은 상여금 차등 지급 등 약속사항에서 발을 뺌으로써 노사 신뢰의 원칙에 따라 실무협의를 했던 노조 집행부를 궁지로 몰아갔다. 이 기회에 노동조합을 파괴하겠다는 음모를 꾸며 또 다른 투쟁을 부른 셈이다.
사측의 노조파괴 공작에 노조 집행부는 뼈를 깎는 자성으로 선도투쟁을 결의했다. 이갑용 위원장은 투쟁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사측에 항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현장 동력 강화를 위해 9월 6일부터 목숨을 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사측은 직·반장 등 조합원들을 회유·협박해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하고, 고소․고발을 취하하지 않는 등 노동조합 파괴 공작을 폈다. 파업투쟁에 적극 참여했던 조합원에게 투쟁 이전에는 문제 삼지 않던 ‘자격증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사무실 청소나 하라”고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시비를 걸고, 옆 동료와 얘기하는 것조차 “물든다”며 막는 등 현장 내 탄압이 거세졌다. 회사는 22,000여 조합원 중 13,000여 명이 투쟁에 적극 동참하고, 설계직을 비롯한 비생산직, 현장의 관리 감독직 조합원은 극히 일부만 투쟁에 참여했다는 점을 이용해 노동자 간 갈등을 일으키려 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 세력을 형성하겠다는 사측의 공작은 노조의 조직력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1994년 임단협 합의안 찬반투표 이후 회사측 공작으로 노조 탈퇴 신청자 수가 10월 4일 현재 3,987명이었다. 그러나 11월 8일 9대 위원장 선거에서 탈퇴신청서를 냈던 조합원 대부분이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사측 공작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이번 투쟁을 통해 그동안 현장을 장악해 들어오던 직·반장을 포함한 공조회을 모두 깨버리고 투쟁 조직으로 재편했으며, 투쟁이 정리된 이후에도 현장 민주화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와중에 현대중공업 반장 대표라 자처하는 장헌중 반장(소조립부) 외 14명은 9월 6일 10시 시청 5층 중앙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이갑용 위원장의 목숨 건 단식투쟁이 10일째로 접어든 9월 15일, 확대간부회의와 중앙쟁의대책위회의 그리고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많은 토론을 벌인 결과 “16일과 17일에 위원장이 사장과 직접 만나 지난 13일 사장이 위원장에게 제시한 안보다 후퇴한 내용이 아니라면 추석 전에 투쟁을 마무리하자”는 위원장의 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장과의 협상에서 8월분 상여금 차등 지급을 제외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갑용 위원장은 9월 16일 단식농성을 해제했다.
간부 구속·수배와 노동조합 침탈에 맞선 투쟁
10월 6일 새벽 6시경 이갑용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 노조 간부와 지단장, 현장 활동가들의 집에 울산 동부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구영식 수석부위원장 등 10명이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나머지 간부들은 주위 조합원들의 도움으로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특히 전경 2개 중대가 이갑용 위원장을 연행하겠다며 집 주위를 에워쌌다. 급히 달려온 조합원들의 도움으로 이 위원장은 집을 빠져나왔지만, 경찰은 집으로 쳐들어가 방마다 천정을 부수고 확인하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노조는 간부·조합원 강제연행에 따른 비상사태를 맞아 업무를 중단하고, 집행 간부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노조 사수를 위해 집행 간부와 대의원․소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무기한 철야농성으로 맞섰다.
현대중공업노조 간부 연행 이후 전국 민주노조 진영의 규탄 열기가 높아졌다. 전노대, 현총련, 조선노협, 전해투 등이 10월 6일 즉각 규탄 성명을 발표, “현중노조 탄압 중지 및 노조 간부 즉각 석방, 현중노조 사수투쟁에 함께 할 것”을 밝혔고, 현대중공업 침탈상황을 산하 노조와 언론사에 알리는 투쟁을 전개했다. 전노대는 10월 7일부터 수도권 지역 노조 대표자 2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탄압과 민주노총 건설 저지 음모 규탄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현총련은 7일 울산지역 비상 운영위원회를 열어 현총련 의장인 이갑용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현대종합목재노조 박성신 위원장을 선출하고 산하 노조의 공동 대응책을 마련했다. 현총련 산하 각 노조에서는 ‘노동운동 탄압 분쇄하고 민주노총 건설하자’는 내용의 현수막을 일제히 부착하고, 전 조합원 리본달기와 각 노조 소식지를 통해 현중 상황 알리기, 홍보 및 대자보 부착투쟁 등을 전개했다.
1994 임단투 때 선봉에서 활동했던 조합원들에 대해 밖으로는 구속·수배와 회사 내에서는 징계가 가해지고 있는 가운데 현중노조 업무 정상화를 위한 9대 위원장 선거가 시작됐다. 11월 8일 치른 선거에서 2만 2천 조합원의 지지를 받아 윤재건 위원장, 서필우 수석부위원장, 박대용 사무총장이 이끄는 9대 집행부가 출범했다.
참고자료
- 현대중공업노동조합, 「민주항해」 1994년 각 호
-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투쟁속보」 1994년 각 호
- 전노협, 「1994년도 자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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