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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노동조합 결성과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
⦁ 시기 : 1987년 1월 22일 ~ 8월 28일
대우조선노동조합 결성투쟁
1976년 대우그룹이 대한조선공사로부터 인수한 대우조선은 1980년 이후 계속되는 생산물량 증가로 노동자 수가 크게 증가하여 1985년에는 3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985년 이후 세계 조선산업의 전반적인 퇴조로 무리하게 진행된 과잉 중복투자의 시정이 불가피해지자 경영합리화란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감원, 해고, 징계를 대대적으로 진행시켜 1987년 초에는 그 수가 16,000여 명으로 줄었다. 임금상황도 점점 악화돼 1985년 임금 동결, 1986년 1.7% 인상, 1987년 3% 인상에 그쳤고, 육지와 동떨어진 관계로 물가가 20~30% 비싸 해고라도 당하면 방이 빠질 때까지 전세보증금을 손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87년 1월 22일,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투쟁은 군 입대 예정이던 노동자를 중심으로 ‘상고문’이라는 유인물 수천 장이 대우조선 공장 안과 기숙사 등에 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유인물은 절망하고 있던 현장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준 동시에 결단을 촉구했다. 이어 2월 24일 ‘상고문2’가 현장에 수천 장 뿌려지면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상고문2’가 다시 현장에 뿌려지자 회사측은 주동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고, 구영명 등 20여 명을 부서 이동시키고, 계열사로 전보발령을 내는 등 즉각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또한 최은석 백순환 등 3명을 해고함에 따라 현장 노동자들은 해고방지를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이 절실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4월 20일부터 4차례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무전기와 차량을 갖춘 총무부 인사기강요원과 운동선수들을 동원하여 결성식 참가를 폭력적으로 저지하고, 거제 전역의 전화를 불통시킴으로써 연락을 차단했다. 또 참가할 것 같은 노동자들을 출장·파견 등으로 분산시키는 방해공작까지 자행했다. 나아가 금속노련 또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회사측에 정보를 제공해, 노동조합 결성은 실패하고 16명의 해고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해고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해고자복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현장 동료들에게 배포하는 등 노조결성의 필요성과 해고의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선전했다. 8월 들어 노동자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해고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을 위한 끈질긴 노력이 다시 구체화되자 회사측은 관련 예상자들을 출장·파견 조치하는 등 저지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길을 더 이상 잡을 수는 없었다.
1987년 8월 8일, 인사조처를 당한 중기공무관리부 이상용이, 제12타각실 옆 소조립 외업반 쪽 250톤 크레인 상부에서 “민주노조 결성” “임금인상”을 외치자 순간적으로 3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용기를 얻은 그는 크레인에서 내려와 담당부서 관리자들의 저지를 뿌리치고 공장안을 돌기 시작, 몇 분쯤 후에는 벌써 지게차·중장비 기사까지 합세해 3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삽시간에 대오는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어느새 동원된 지게차와 트레일러를 앞세우고, 행렬은 사내 도로를 달려 종합운동장으로 집결해 결의를 다진 후 각종 차량을 앞세우고 정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결국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옥포 시가지와 충무의 신아조선까지 진출해 차량시위를 벌였다.
8월 9일, 노조 결성식에서 이상용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보고대회를 통해 △임금 50% 인상 △상여금 600% 지급 △가족수당과 근속수당 지급 △해고자 복직 등 13개 요구사항을 확정했다. 이날도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국도를 점거했고, 10일 새벽에는 전경과 투석전을 벌여 20여 명이 부상하기도 하였다.
8월 10일,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상용이 부사장을 비롯해 유수언 부장 등 관리자를 만나고 온 뒤, “외부세력이 마산에서 인원을 동원하여 침투하였다” “해고자들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해 노동자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0일 오후에는 46명의 부서별 대표를 새로 뽑아 양동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노조결성 준비에 들어갔으며, 1,500여 명은 농성을 이어갔다. 노동조합 어용화 공작이 실패하자 회사측은 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 휴업을 공고하지만, 8월 11일 새벽 비상계획부 2층 사무실에 40여 명의 부서대표들이 참석하여 노조 결성식을 갖고 양동생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오전 10시에 출발한 200여 명의 대표진이 신고증을 받기 위해 해가 질 때까지 군청 앞에서 투쟁한 결과 오후 6시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증을 교부받을 수 있었다.
8월 12일 오후 새로 결성된 노조는 △임금 7만 원 인상 △상여금 600% 지급 △가족수당과 근속수당의 지급 △사무직과 기능직의 차별 철폐 등 13개 요구사항을 다시 확정하고, 노동자와 가족 등 3,000여 명이 회사 5개 출입문을 통제한 채 농성을 계속하며 협상을 촉구했다. 8월 13일, 윤영석 사장이 농성장에 나와 노조 설립을 인정한다면서 16일까지 휴무할 것을 결정하면서 15일 오전 10시에 협상을 하겠다는 약속만 하고 돌아갔다. 이에 회사측의 무성의한 태도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14일부터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해고자들이 <소식지 1호>를 발간하여 지원에 나섰지만, 회사측은 15일과 16일 양일간의 협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휴무를 17일까지 연장했다. 8월 17일에도 회사측에서 협상을 거부하자 농성노동자들은 본격적인 가두투쟁에 나섰다. 18일의 차량시위에 이어, 19일에도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가두투쟁과 차량시위를 계속했다.
8월 20일,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좌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6차례에 걸친 협상이 진행돼 노조측이 14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했지만, 노동자들은 이 합의안을 전면 거부했다. 발표된 합의안은 ‘기본급 1만원 인상, 불황수당 5,000~3만 원 지급’ 등이었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비해 너무도 미흡한 결과였다. 이로써 협상은 결렬되고 회사측은 무기한 휴업을 단행한다.
8월 20일, 회사의 오만한 태도에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노동자들은 김우중 화형식을 거행하며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 후, 22개 부서별로 1,350명을 선정한 뒤 30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서울 대우본사로 올라가 투쟁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6개 중대를 증원하는 등 긴장감을 조성하며 무력진압을 경고했고, 각지에서 동원된 12개 중대 1,500여 명의 전경이 장승포에서 옥포 구간 도로를 차단한 채 집회가 끝난 후 행진하는 시위대열에 무차별 최루탄을 난사했다. 그러나 최루탄에 아랑곳없이 새벽 3~4시까지 옥포사거리에서 시위가 계속됐다. 시민들도 노동자들 편에 섰다. 옥림아파트 지역에서는 현수막을 쓰라며 아기 기저귀와 입술연지를 던져주었다.
8월 21일, 강경탄압과 그에 따른 불상사가 예견되게 하는 치안본부의 특별지시가 내려졌다. 치안본부는 21일 오후 전국 시도경찰국 대공과장 및 정보과장 연석회의를 열고 좌경세력 척결을 위한 방안을 시달했다. 또 위장취업자 및 노사분규 개입 외부세력 색출, 수배자 검거 촉진, 사회 각 분야의 좌경세력 척결 등을 강력히 지시했다. 이날 회의에서 치안본부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노사분규와 관련, “노사분규를 불순목적에 악용하려는 배후조종 및 선동세력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들 불법 집단사태 유발 및 사회질서 파괴행위자들에 대해 강력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8월 22일, 꼬박 밤을 지새운 투쟁대열은 단체교섭이 열리고 있는 옥포관광호텔 앞 사거리로 3,000여 명이 집결했다. 2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도 회사 간부와 면담하겠다며 호텔 안으로 진입,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지만 오후 1시 30분 교섭팀은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대열은 분노로 술렁이기 시작했고, “호텔로 들어가자”는 강력한 요구와 이미 담장을 넘는 노동자들이 속출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퍼부어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바닷가까지 쫓겨 갔던 노동자들이 다시 옥포관광호텔로 진입을 시작하자 경찰서장은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조합원들은 평화적 시위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돌멩이를 모두 버리고 20열 종대를 갖추어 오리걸음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대오는 ‘10보 전진, 휴식, 10보 전진, 휴식’으로 서서히 호텔에 접근해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경찰은 최루탄과 사과탄을 난사하여 옥포관광호텔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바로 이때 한 노동자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독재자와 독점재벌의 충실한 하수인,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이 노동자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이석규, 스물한 살, 대조립부 외업반. 아스팔트 위에는 신발 한 짝이 나뒹굴었다. 그는 인근의 약국으로, 외과병원으로 헤매다 대우병원으로 옮기던 중 오후 3시30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돈도 필요없다. 이석규를 살려내라” “병원으로 가자. 이제 임금인상은 필요없다”며 대우병원 영안실로 모여들었다.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이제 대우조선 노동자 전체가 분노와 슬픔을 한꺼번에 나누게 된 것이다.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
옥포 대우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이석규열사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영안실과 옥상 등에 각목으로 무장한 8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했으며, 영안실 4개문을 용접 땜으로 봉해버린 후 ‘이석규열사 사망 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대책위원회에는 노조 집행부 6명, 일반노동자 7명, 주민대표 2명 등 총 15명의 대책위원이 참여했다. 8월 22일, 이소선 어머니, 이상수, 노무현 변호사 등이 도착하여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장례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유족으로부터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아 이석규열사를 ‘민주노동열사 이석규’로, 장례를 ‘국민장’으로, 장지를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결정했다.
8월 23일, 아침 8시에 실시된 사체부검에서 확인된 이석규열사의 사망 원인이 4개의 최루탄 파편이 오른쪽 가슴을 뚫고 들어가, 그 중 2개의 파편이 오른쪽 폐에 박혀있고, 나머지는 관통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이 파편 때문에 흘러나온 피가 오른쪽 폐 기능을 완전 상실케 해 호흡기능이 정지함에 따른 산소부족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이날 장례절차를 확정하기 위해 열린 장례실무위원과 노조 집행부 간의 연석회의에서는 이석규 열사의 장례를 7일장으로 하되 ‘전국민주노동자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되, 묘지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모란공원’으로 합의했다.
8월 24일, 특전사 소속 육군소령이 친척이라며 유족대표 자격으로 나서, 장지를 남원의 선산으로 하고 가족장으로 하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측에서도 이를 격려하기에 이르렀다. ‘장례위원연석회의’에서는 장례식을 다시 ‘민주국민장’으로 하되 5일장으로 최종 결정했다. 또한 이 연석회의에서는 단순한 장지문제가 아니라 이석규열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살인자 처벌, 정부의 공식사과, 피해보상’ 등의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장례절차에 관한 유족, 회사측과 장례위원회의 의견 대립이 3일째 계속되는 가운데 24일 밤 노조집행부는 회의를 소집해 △살인경찰 즉각 구속과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즉시 파면 △당국의 공식사과 및 최루탄 사용 중지 △피해자 보상 △회사측의 휴업조치 철회 △애초에 요구한 14개항 즉각 수락 △노조탄압 중지 등의 요구를 장례식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웠고, 이러한 조건들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발표되자 정부는 “사체를 볼모로 사용하는 노동쟁의”라는 비난을 퍼부으면서 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한 재야인사와 노동운동단체들을 ‘외부 불순세력’이라고 매도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언론 취재를 금지하는 등 격렬히 항의했다. 8월 25일, 3,000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순국 경과보고 제2차 국민대회’를 2시간에 걸쳐 개최하고 경찰 폭력사례 폭로, 강연, 웅변, 사례 보고, 노래 배우기, 입장 발표 등으로 꾸며진 대중집회를 열어 투쟁의지를 다져나갔다. 한편 이날 밤 열린 장례위원회 운영위원회에서는 앞서 요구한 14개 요구 중 ‘임금인상 3개항’의 선 타결 후 장례절차 협의, 장지는 광주 망월동으로 한다는 2개항을 다시 제시하고, 위로금은 김우중 회장의 재량에 맡기기로 하는 전격적 타협책을 제시했다.
8월 26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진행된 회사측과의 교섭에서 임금인상액은 양자가 제시한 중간선인 45,000원으로 결정됐다. 또한 장례식에는 회장을 포함한 전사원이 참석하되, 장례준비는 노조집행부에 일임하여 국민장으로 치르며, 장지는 회사·유족·노조 3자가 합의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7일장에 합의했다.
한편 정부는 대우조선 사태와 관련 치안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외부불순세력의 침투에 대해 발본색원하겠다는 강경방침을 고위당정회의에서 결정했다. 김정렬 국무총리는 26일 오전, 대우조선 사건과 관련한 기자간담회에서 “쟁의 진압과정에서 근로자 1명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대단히 가슴 아프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러나 “외부세력이 개입하여 전통적인 장례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영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고 나섰다.
8월 27일 새벽, 기본급, 주거수당, 현장수당 각 1만 원 인상 등 17개항의 합의내용이 알려지자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집행부를 성토했다. “20일간의 투쟁을 기본급 5,000원 인상으로 바꿀 수 없다” “장지는 결단코 남원행이 될 수 없다” “이석규 열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해명과 사과 한마디 없다”며 노동자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이러한 와중에 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의 의견은 물론 노동자들의 의견조차 반영하지 않은 채, 노조측은 장례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장지문제는 노동자들은 “광주로 간다”고 결정했고, 유족대표로 나선 이청수를 중심으로 한 유족들은 “남원으로 간다” 하고, 그리고 20일 시위 때 구속된 노동자들의 가족들은 “구속자 석방 없이 운구할 수 없다” 하여 의견이 팽팽히 대립되고 있는 사이에, 우려했던 대로 김우중 회장, 양동생 위원장, 유족 3자가 장지를 남원으로 결정했다. 장지가 남원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은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집행부에 대한 불신을 갖게 했다. 이들은 노조사무실로 몰려가 항의했고, 뜯었던 영안실을 다시 봉해버리는 등 강력한 집단행동을 불사하며 장지 결정 철회를 주장했다. 결국 노조집행부는 장례식 당일인 28일 새벽 1시경 장지를 광주 망월동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 28일, 오전 7시부터 영결식이 시작됐다. 오전 11시 노동자, 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의 애도 속에서 발인하여 운구행렬이 대우조선 운동장으로 가고 영결식이 거행됐다. 오후 3시경, 회사버스 26대와 관광버스 2대 등에 나눠 탄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이석규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옥포호텔 앞 도로에서 잠시 노제를 지낸 뒤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독재정권이 그간 해왔던 짓으로 보아 시신이 탈취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거제도와 충무를 연결하는 단 하나뿐인 육로, 거제대교를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긴장한 가운데 탈 없이 거제대교를 넘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잠시 휴식 후 다시 출발했다. 고성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맨 앞 초상화와 사진을 실은 차가 통과하고 이어서 영구차와 만장을 실은 타이탄이 통과함과 동시에 15톤 덤프트럭이 튀어나와 도로를 차단했다. 좌우는 논바닥이었고, 도로는 완전히 봉쇄됐다. 시신탈취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어 주변 야산에 잠복해 있던 2,500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와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이 타고 있던 차와 이석규열사의 동문인 광주직업훈련원 출신들이 타고 있던 2대의 버스 창문을 깨고 문을 강제로 연 뒤 집단구타를 가하며 강제 연행했다. 이어 1·2호차에 타고 있던 노동자들을 하차시키고 유족 3명을 태운 채 2개 중대 300여 명이 탄 6대의 전경버스로 호위하여 남원으로 시신을 탈취, 밤 9시경 남원의 선산에서 폭우를 뚫고 매장했다.
시신을 탈취당하고 2시간 동안 항의하던 노동자들은 옥포로 돌아와 옥림, 주공, 능포지역 등 3개조로 나누어 시신탈취 상황을 알렸고, 밤 10시경 노동자, 가족, 주민 등 3,000여 명이 사내 운동장에 모여 경찰의 탈취극을 규탄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직후 전국적으로 몰아친 노동운동 대탄압 속에서 정치권력의 반민중성과 폭력성을 폭로하는 가운데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극복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긴 채 투쟁은 막을 내렸다.
한편 장례식이 거행된 8월 28일 6시를 기해 전국 주요 도시를 비롯한 18개 지역에서 일제히 개최될 예정이었던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추모대회’는 5만여 경찰의 원천봉쇄로 성사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됐다. 추모제와 관련하여 총 933명이 연행됐으며, 이 중 64명이 형법 158조 ‘장례식 방해’ 및 노동쟁의조정법(제3자개입),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 이소선 어머니 등 30여 명에 대한 내사와 함께 10여 명을 수배 조치했다. 또한 대우조선에서도 이미 해고되었던 3명 외에 7명을 추가 구속하고, 몰래 잠입한 거제경찰서 형사계장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살인미수를 적용하여 구속하기도 했다.
⦁ 참고자료
- 대우조선노동조합, <함성호외>(옥포호외 1~함성호외 398까지의 축쇄판)
- 이석규열사추모사업준비위, <천만 노동자의 가슴속에 너를 묻는다>(1988,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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