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레터 [한내] 2008년 12월호 : 함께 읽어요
『세계의 꿈꾸는 자들, 그대들은 하나다』
박수정 지음. 이학사 펴냄. 2008
.jpg)
다른 말을 쓰지만 삶은 같다
가난하고 고단하지만 꿈을 버리지 않고 삶의 질곡을 이겨나가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로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던 작가 박수정이 이번에는 남미의 이웃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지은이는 남미의 8개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쿠바,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90여 일 동안 여행하며 여느 유명한 관광지를 방문하고 숨은 맛집, 멋집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버스로 국경을 넘고 변두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남미의 땅내와 사람들의 살내를 맡았다.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의 화려한 발자취를 좇기보다는 남미 보통 사람들의 작고 소박한 삶을 따라가며 가난하지만 꿈꾸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희망을 확인했다.
지은이는 남미에 새겨진 식민과 강제 노예 이주라는 아픈 역사를 더듬고, 60~80년대 남미 땅을 할퀴고 간 독재 정권의 학살과 납치, 실종 흔적을 따라 걸으며, 지금도 그 상처로 아파하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싸우고 저항하는 사람들, 가난과 소외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나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지만 이들이 처한 문제는 곧 우리 자신의 문제와 다르지 않으며, 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곧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다. 그래서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발전노조에서 문화를 담당하는 지노는 이렇게 외친다. “세계의 꿈꾸는 자들, 그대들은 하나다!”라고.
남미의 꿈꾸는 자들을 따라간 여정
이 책은 보통 여행기에서는 만나기 힘든 여정을 보여준다. 제의 연극을 연구하는 단체 ‘나무닭움직임연구소’가 2007년 체 게바라 사후 40년을 기념하는 연극을 준비하는 첫걸음으로 계획한 여행에 동행하게 된 지은이는 2006년 9월부터 50일간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칠레 산티아고, 볼리비아 라파스, 쿠바 아바나, 페루 비야 엘살바도르를 이들과 함께 여행하고, 40일간 페루 아야쿠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북부를 혼자 여행했다. 나라 간 이동 시에는 거의 대부분 버스를 이용했으며, 각 나라에서 주로 찾고 만난 사람들은 사회?노동?문화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다.
첫 방문지인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는 산타카타리나 연방대학 학생들이 만든 문화예술모임인 에스피랄, 산마을 솔 나센치, 아동청소년교육공동체인 아팜, 발전노조, 흑인여성공동체가 속한 몽트 세라 성당을 방문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토요일 저녁마다 어리고, 젊고, 늙은 아나스타시아 딸들이 성당에 모인다. 미사에서 신부님은 “우리 공동체는 희망을 갖고 한 발 한 발 걸어왔다. 마음속 눈을 감지 말라. 세상에는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거리에는 이름을 잃은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고통 받는 어린이들이 있다. 희망을 갖고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저항하자, 변화시키자”고 말했다. 몽트 세라 성당을 오르는 길처럼, 가파른 길에 놓이고, 가파른 길을 오르는 삶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 삶들, 외따로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한데 모이면 조금은 앞이 보일 것이다. 언덕길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더디더라도. - ?꿈꾸는 자들, 그대들은 하나다: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중에서
아르헨티나에서는 70년대에 군사독재 정권하에 실종된 이들의 유가족 모임인 5월 광장 어머니회와 5월 광장 어머니회 설립자노선, 바호 플로레스에 있는 볼리비아 노동자 공동체를 방문했다.
가난하게 사는 지금, 바호 플로레스는 공동체를 만들어 산다. 빈민연합을 만들고, 다른 조직과 연대하고, 라디오 공동체도 만들고, 사회문제에도 적극 참여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자유나 평등, 평화에 눈 돌릴 틈이 없다고 외면하거나 다른 사람한테 맡길 일이 아니다. 누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한테 절실한 건 자유이고, 평등이고, 평화다. 돈 있는 자들은 돈으로 가짜 자유나 평등, 평화를 사기라도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그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서 진짜 자유와 평등, 평화를 찾아야 한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기억, 진실, 정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에서
칠레에서는 사회문화개발센터와 만나 파업 중인 소테오 델 리오 공립병원 노동자들과 섬유의류노동조합연맹을 만나고, 무용가 파트리시오 분스테르의 장례식 행사와 “빅토르 하라, 세상을 노래한다” 전시회와 개막식을 보았다. 산티아고 남쪽에 있는 엘 보스케 마을 주민사회교육공동체인 엘 보스케 문화 센터와 레구아 마을의 민중방송인 라디오 공동체 라 벤타나와 그 외 지역 단체도 만났다. 그리고 칠레 원주민 문화를 보존하고 이어나가는 풍습 문화 센터가 있는 오히긴스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볼리비아에서는 예술생산자공동체(콤파)와 만나 가난한 마을에서 예술을 꽃피우는 그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국가 해방을 위한 체포?실종?희생자 가족협의회(ASOFAMD)를 만나 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독재 정권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쿠바에서는 아바나 미르마르에 있는 문화의 집에 머물며 그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산타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 기념관과 박물관을 다녀왔다.
체 게바라가 잃어버린 동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이야기를 쓴 작은 책이 있기에 보았더니 아저씨가 비닐봉지를 하나 가져온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하는데, 아저씨는 그 책과 내가 미라마르에서부터 들고 와 땀으로 다 젖어버린, 문학교육센터에서 받은 잡지 세 권과 저 아래에서 산 체 일기책을 담는다. 그냥 가져가라며. 순간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먼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볼을 내밀면서 “그라시아스[고맙다]!”라고 한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왜 아저씨가 하는지. 눈시울이 아려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알카에토레 아저씨. 이제 얼마 안 남은 아바나대학을 향해서 위로 걸어 올라가다 계속 뒤돌아보았다. 아저씨, 따뜻한 눈빛. 그래서는 안 되는데, 가난한 사람한테 이렇게 빚을 지면 안 되는데.
길을 걷기를 잘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걷는 것. 혁명 광장을 찾아 길을 걷다가 그 길을 포기했지만 혁명 광장에 가야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있는 곳 그 어디든 느끼고 배울 것은 스며 있다. 3시간 40분을 걷는 동안 내 나름대로 쿠바를 만난다. - ?사람, 사람들: 쿠바 아바나? 중에서
페루에서는 수도 리마의 변두리인 비야 엘살바도르에서 일주일간 개최된 제3회 문화연대포럼에 참여해 가난한 마을에서 풍성하게 펼쳐지는 문화?예술 공연과 전시들을 만났다. 이 마을은 모래벌판에 세워진 마을인데 주민들이 활동가들과 연계해 가난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진보적인 활동을 펼쳐내는 곳이다. 가난한 마을에 극장이 있고, 그 극장의 배우들은 페루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진지하게 공연하고, 어린아이부터 늙은 할머니까지 스스럼없이 극장을 찾아와 공연을 본다. 아무도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누구나 손에 우유깡통이든 스파게티 면이든 더 가난한 노인들을 도울 물품을 한 가지씩 품에 안고 온다. 그 문화연대포럼 중 한 행사로 열린 사진전시회에서 센데로루미노소(빛나는 길)와 정부의 20여 년에 걸친 대항으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만난 뒤 그 학살이 처음 벌어진 현장인 페루 아야쿠초를 찾았다.
페루 아야쿠초에서는 페루 납치?체포?실종자 가족 국가협의회가 마을에 만든 기억 박물관을 방문해 그 학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이들과 함께 학살이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는 지역을 버스로 더듬고 스페인을 최후로 몰아내 남미 해방을 완결 지었던 키누아에 가보았다.
마리벨이 어느 사진 앞에서 내게 말한다. 센데로 루미노소 조직원들을 잡겠다고 나선 군인들이 농민 집에 들이닥쳐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아이들이 늘 보던 ‘아버지 목을’ 칼로 베었단다. 마리벨이 오른손을 쫙 펴 손날을 세워 ‘목을 베는 모습’을 해 보이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훔쳐내도 소용이 없다. 마리벨이 이야기를 멈추고 조용히 나를 본다. 이제까지 마리벨이 한 이야기를 알아들었다고 느낀 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었나 보다. 마음에 무겁게 하나씩 들어찼던 건 눈물이었나 보다. 나는 그만 꺽꺽 운다.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는데, 무척 서럽고 억울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어댄다. 단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에 1980년 광주가 머리를 치고 들어오고, ?눈까마스?에서 읽은, 날마다 비행기에서 바다로 내팽개쳐진 사람들이 떠오르고, 비야 엘살바도르에서 에드문도와 크리스티나, 프레디가 보여준 연극 한 장면이 되살아났다. 검은 비닐 자루 속에 꽁꽁 갇혀 오랜 시간 죽어 있던 사람들이 비닐을 뚫고 나오던 장면. -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 페루, 아야쿠초? 중에서
콜롬비아에서는 문화의 집의 활동과 전통춤 경연대회가 열리는 시골 타비오를 방문하고 반정부군과 정부군의 격돌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사는 보사 지역을 방문했다.
베네수엘라 메리다에서는 차베스와 그의 지지자들의 물결을 만나고, 메리다의 시골 투카니에서는 차베스 정부가 실행하는 농업 정책인 미시온(미션) 사모라의 현장인 베르베레 협동조합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만난다.
브라질 북부 지역에서는 벨렝에서 도시 빈민들이 땅을 점거해 집을 짓고 사는 테노네에서 머물며, 코티주바 섬의 작은 학교의 교육도 만나고, 바닷가에 지은 마을인 바르카 마을을 방문했다.
브라질 마라바에서는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MST)의 현장인 정착촌에서 머물렀다.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벌어진 농업 노동자 학살 현장도 찾았다. MST 회원들이 농경학을 공부하는 마라바대학과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다.
글씨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가슴이 설렌다. 잃어버렸거나 빼앗겼거나 애초부터 막혀 있었던 배움을 되찾는 사람들이기에 그럴까. 조그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으로 브라질의 짧은 이야기책을 펼쳐들어 읽는 나이 든 아저씨를 본다. 저 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면 세상에 그 무엇이 아름다울까. 공책과 책 앞에 겸손하게 앉은 사람들. 붉은 깃발을 들고 먼 길을 행진하고 시위하는 모습도, 밭을 일구는 모습도, 책을 읽는 저 모습도 모두 MST이리라. - [땅을 뚫고 피어나는 꽃 : 브라질 마라바] 중에서

사진 : [꽃을 건네는 로베르토, 저자가 직접 찍었다]“너무 일을 많이 해서 모양이 바뀌어버린 손. 그 손의 주인은 길가 나무와 꽃들을 보살피고 키우는 일을 하는 노동자, 로베르토다. 금방 사라져버려 갔나 보다 했는데 한 손에 한 움큼 꽃을 들고 와서는 내게 내민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이곳을 꿈꾸기 위하여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에서 구로동 재개발 지역의 좁은 골목길, 경북의 한 산골짜기 마을의 시골길, 비좁은 영등포 골목 등, 사람들의 숨결이 밴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우리 이웃의 한숨과 눈물과 꿈을 끄집어내어 한 편의 삶의 모자이크를 완성시켰던 지은이는, 이 책 [세계의 꿈꾸는 자들, 그대들은 하나다]에서 브라질 솔 나센치 마을의 높은 산마을 언덕길, 황량한 모래벌판에 만들어진 마을 페루 비야 엘살바도르의 모래 먼지 날리는 마을길,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하는 가파르고 깎아지른 벼랑길을 따라가며 그 길을 살아온 남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삶과 역사, 그들이 꿈꾸고 만들어갈 내일을 펼쳐 보인다.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가 우리의 상처보다 얕지 않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꾸는 꿈이 우리의 꿈보다 작고 무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이 보다 더 나은 곳이 되기를 꿈꾸게 하고, 그리하여 행동하게 한다.
지은이_박수정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철학과에 들어가서는 주로 연극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구로노동자문학회에 들어갔다. 연극 외에도 노동자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 낮은 곳에 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사람들에 대한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진보 생활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과 계간지 [진보평론]에 인터뷰와 르포를, [한겨레]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연극과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싶어 한다.
지은 책으로는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아름다운 사람들, 2004)와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 사람들, 2004),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이학사, 2004)이 있다. 극단 한강과 함께 <연극 전태일>(2000)을 공동 창작하고, 극단 사다리의 전래동요 놀이음악극 <꼬방꼬방>(2004)에 작가로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