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⑩ 봉쇄 뚫고 집결한 노동자들 1988년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 전국노동자대회는 1988년부터 시작했다. 당시 전국 노동자 5만여 명이 집결한 이 대회는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던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민주노조들이 전국조직 건설로 나아가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첫 노동자대회는 전국노동법개정및임금인상투쟁본부(아래 ‘전국투본’) 주최로 진행됐다. 전국투본은 1988년 10월 6일 대전에서 결성, 11월 13일 서울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개최를 주요한 사업으로 결정했다. 첫 전국노동자대회는 예정대로 11월 13일에 노태우 정권의 탄압을 뚫고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진행했으며, 그렇게 많은 노동자가 참여한 집회는 난생처음이어서 가슴에 뜨거움이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는 1989년에도 민주노조운동의 투쟁과 열기를 모아냈다. 1988년 대회가 민주노조운동의 포문을 열었다면 1989년 대회는 전국적으로 건설된 민주노조를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이었다. 지역노조협의회(지노협)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전국조직인 전노협 건설을 구체화하는 투쟁의 장이었다. 피로 쓴 ‘노동해방’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단순하게 며칠 준비해서 치른 대회가 아니었다. ‘노동악법 철폐’와 ‘민주노조들의 중앙조직 건설’이라는 투쟁적 과제와 조직적 과제를 분명히 한 대회였다. 지역별로 공동임투를 마무리 짓기 전부터 전국노동자대회를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권역별 연대의 기운을 높이기 위한 공동임투의 성과를 모아 등반대회, 지역집회, 사업장별 토론과 연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결의를 높여나갔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연대투쟁을 통한 조직적 과제(전노협 건설)와 노동악법을 철폐하겠다는 결의를 모아내는 것이었다. 내가 속한 사업장에도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성, 민주노조 중앙조직을 건설해야 하는 필요성, 노동악법이 노동자를 억압하는 현실 등에 관해 토론하며 조합원들의 분노가 고조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11월 13일, 지역의 동지들, 공장 내 문화활동가(연우회)들과 간부들이 함께 최초의 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연세대 부근에 배치된 경찰들이 초기에는 학교진입을 방해했으나 노동자들이 예상외로 늘어난 탓에 원천봉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각 지역에서 집결한 노동자들이 각각의 구호와 노동가를 부르며 연세대 노천극장에 진입할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민주노조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 “전태일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라는 구호들이 연세대를 뒤덮고 있었다. 대회의 마지막 순서, 수십 명이 연단 앞으로 나가 대형광목에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노/동/해/방’. 배경음악은 우렁차게 흘러나왔지만 분위기는 엄숙하고도 무거웠다. 노동악법을 철폐하고 전노협을 건설해 노동해방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혈서에 담았다. 그날 전국노동자대회 참석한 5만여 명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진영 전체가 함께 쓴 역사적인 혈서라고 할 수 있다. 피로 쓴 ‘노동해방’ 현수막을 들고 여의도를 향해 출발했다. 연세대 앞 거리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고가 철길 위에서 장엄한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던 시민들도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행진을 마치고 지역별 또은 사업장별로 참석한 노동자들은 단위별로 노동자대회 평가와 함께 결의를 모았고, 그 결의들에는 비장함이 담겨있었다. 우리 사업장(대우전자부품)에서 대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은 금세 문화패활동에 참여하며 활동가가 돼 있었다.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선전선동의 장으로서 유효했고 수백 시간의 교육보다 효과적으로 노동자의식을 심어주었다. 또 노동악법 철폐, 전노협 건설, 노동해방쟁취를 대중적으로 확인하고 결의하는 장이었다. 혈서로 현수막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모습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던 철길 위와 거리의 시민들은 노동해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전노협 건설 결의한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 정권은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도 불법으로 몰았고 대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전국에서 모이는 노동자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할 기세였다. 서울대에서 열린 전야제는 전노협 건설을 향한 단결과 투쟁의 공간이었고 노동자들의 감격이 타오른 무대였다. 거기 모인 노동자들 누구도 학교 정문을 통해 입장하지 못했다. 경찰들이 정문은 물론이고 주변 골목을 모두 막아섰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과천과 안양에서 관악산을 넘었다. 야간침투훈련이라도 하듯이 관악산을 넘어 전야제 장소로 향했다. 정문에서도 원천봉쇄하려는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넓은 울타리 곳곳을 뚫어야 했다. 그때문에 전야제는 예상보다 늦어졌다. 밤이 짙어갈 즈음 전국노동자대회 깃발이 휘날렸고 전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속속 진입했다. 참가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비롯해 노동가요를 함께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외국에서 온 노동운동활동가들도 수백 명이 참가했다. 일본에서 온 활동가들이 그 장면을 보며 “혁명전야”라고 감탄하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1988년과 1989년에 걸쳐 진행된 전국노동자대회는 전노협을 건설하는 동력이 되었다. 1989년, 되찾은 노동절에 1박2일 가투 노동절 쟁취투쟁은 1980년대부터 해왔었다. 독재정권이 만든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의 유래와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성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분노를 표출하며 메이데이 쟁취 결의를 모으는 투쟁이었다. 차량 통행이 많은 도로를 선택해 비밀리에 동을 뜨고 백여 명이 도로를 점거함으로써 행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아지(선동)와 홍보물을 뿌렸다. 투쟁대오가 차도로 뛰어들어 차량을 막고 정체를 빚는 시간 안에 짧은 가투를 마치고 해산해야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다. 차량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라 경찰이 즉각 출동할 수 없으므로 그 틈을 이용해 약식집회를 하고 노동자·시민들에게 홍보물을 배포하는 가두투쟁이었다. 당시 노동절 쟁취투쟁은 대중적인 투쟁이라기보다 정치조직 성원들과 활동가 중심의 소수가 참여한 투쟁이었지만, 긴장도는 그만큼 배가되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절 쟁취투쟁은 활동가 중심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이 참여함으로써 대중투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투쟁의 양상도 적극적인 가투로 공권력과 맞서며 역사 속에 숨겨졌던 메이데이 유래를 되살려냈다. 모든 투쟁이 마찬가지지만 노동절 쟁취투쟁도 조합원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했다. 대부분의 조합원이 ‘근로자의 날’(휴일이며 회사에서 ‘근로자의 날 기념’이라고 찍은 수건을 기념품으로 지급)은 알고 있었지만 메이데이(노동절)는 생소했다.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해 어떻게 투쟁하고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토론하면서 조금씩 관심을 두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집회에 참여하기보다는 주변 활동가들에게 이끌려 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투쟁으로 하나되고 성장하는 노동자 1988년 노동법 개정투쟁 이후 열린 1989년 노동절은 세계노동절 100회 투쟁이었다. 전야제부터 계획했으나 연세대는 원천봉쇄돼 미리 들어간 일부 동지들 외에는 가투를 하며 진입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현동 굴레방 다리에서 밀고 밀리는 투쟁이 장시간 진행됐다. 신촌로터리 쪽을 바라보며 공격하는 노동자 대오와 신촌로터리 쪽에서 올라오려는 경찰들 간의 지형은 우리가 내리막을 잡고 있어서 훨씬 유리했다. 투쟁 중간마다 연세대에 5천 명의 동지들이 모였다는 소식에 노동자들은 함성과 함께 더욱 힘을 냈다. 경찰병력이 증강돼 밀고 올라오면서 우리가 골목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누가 나누어준 것도 아닌데 앞쪽에 선 노동자들 손에는 각목이 들려있었고 각목들은 춤을 추며 전경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한참 각목을 휘두르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조심하시라고 한다. 같은 노조 조합원인데 그 친구가 각목을 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너도 각목 들 줄 아냐?”고 했더니 “나도 전에 검도를 해서 각목 좋아해”라고 했다. 그날 투쟁대오는 경찰들을 경기대 앞까지 밀어냈고 결국 밀려난 경찰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밤에는 청계천을 지나 동국대 안으로 진입했다. 동국대로 향하던 중 청계천에서는 코너에 몰린 경찰병력이 소속이 다른 경찰들하고 자기네끼리 서로 공격하며 싸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국대를 침탈하려는 경찰들과 늦은 시간까지 화염병을 날리고 투석전을 벌이다가 간단하게 전야제를 치렀다. 밤을 거의 샌 상태에서 다음날 메이데이 투쟁에 나섰다. 1박 2일의 노동절 집회를 다녀왔던 동지들은 이후 활동가로 성장했고, 검도 했다며 각목을 들었던 동지는 노조 조직부장을 맡기도 했었다. 노동자 의식은 투쟁으로 성장한다는 자각은 물론 자본과 권력을 향한 분노는 투쟁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가투와 파업투쟁으로 확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