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은 자본계급에게 빼앗긴 생산수단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 즉 자유로운 생산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자면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는 노동계급의 일부만을 조직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라는 일상적인 대중조직 운동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반드시 노동계급 전체를 단결시킬 수 있는 대중조직 운동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급기야는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꼭 ‘개혁주의적인 지도력’을 지양하는 ‘혁명주의적인 지도력’을 항상적으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45년 11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 -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들’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끝났다. 일제를 이 땅에서 패퇴시킨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즉 노동자 민중, 민족해방운동가들, 미소연합군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를 무너뜨리겠다는 공통목적 외에 제각기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를 패퇴시킨 뒤에 이 땅에 수립해야 할 사회(토대와 상부구조)에 대한 것이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회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 즉 ‘사유제 자본주의 사회’ 또는 ‘국유제 자본주의 사회’였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였다. 전자의 목적을 가진 주요 세력은 미소연합군과 민족해방운동가들이었고, 후자의 목적을 가진 주요 세력은 노동자 민중이었다. 1945년 11월 당시, ‘16개의 산업부문에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8만 8천여 명을 헤아렸다.’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관리하는 공장사회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본계급이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관계가 전제된 자본가들과 공동관리(노자공동관리, 노정공동관리)를 하는 공장사회였다. 다른 하나는 독자적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였다. 그것은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이 없는, 착취와 억압의 관계도 없는 사회였다. 공장사회 단위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양한 일종의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였다. 이러한 ‘연합사회’는 이 땅의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새로운 사회’였다. 이렇게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는 1945년 8.15 직후부터 노동자들이 자본가들과 투쟁을 벌여서 만들어낸 것이다.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주)조선미싱은 주주인 나상권이 양도를 받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분투로 공장은 일단 공동관리의 상태로 …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나상권을 공장에서 몰아내었다. …. 이후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만들어 공장을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러한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란 “해당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공장을 운영하고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사회였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모두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뤄져 있다. 공장도 사람이 사는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 어떤 공장사회에서든 간에 “생산과정은 항상 특정한 생산관계에서 진행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는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이며, 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진다. 그러므로 특정한 생산관계는 사회나 국가의 체제와 성격을 규정한다.”라고 누군가가 썼다. 그러면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의 생산과정은 어떤 생산관계에서 진행됐을까? 분명 자본계급이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아니다. 자본계급(민간자본과 국가자본)도 없고 노동계급도 없다. 다만 같은 이해를 가진 ‘노동하는 사람들’만이 있다. 따라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의 생산관계는 노동하는 사람들 간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공장사회의 성격을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로 규정한다. 한편, 다른 누군가는 “생산관계는 (토지‧삼림‧지하자원‧원재료‧도구‧기계‧공장‧항만 등의) 생산수단이 사회성원들 사이에 어떻게 배분되어 있는가, 즉 그것이 누구에게 소유되어 있는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 된다.”라고 썼다. 소유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소유제(사유제, 국유제)는 필연적으로 착취와 억압의 생산관계를 낳는다. 후자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생산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생산관계’를 가진 사회는 노동자들이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이다. 그러면 노동자들이 해방된 사회는 어떤 소유제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누군가가 썼다. 즉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생산수단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경우뿐’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의 소유제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장을 소유하는 공동소유제이다. 이러한 ‘공동소유제’는 착취와 억압을 전제하고 있는 ‘사유제와 국유제’에 대한 대안적인 소유제이다. 왜 1945년 8.15 이후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노동하는 공장을 집단적으로 공동소유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노동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자, 인류사의 약 99%를 차지하는 ‘원시공산제 사회’의 유산인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제를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즉 육감적인 “피와 땀의 결정(結晶)”(일종의 ‘노동가치론’)으로서 생산수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계급에게 빼앗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베인 토지, 공장, 기계 등의 생산수단은 당연히 노동자들의 소유! 나아가 노동자들은 실천으로서 그것을 증명했다. 그것이 독자적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 즉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였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생산관계와 공동소유제에서 생산과정의 통제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노동하는 사람들은 “종업원대회(회의)를 통해서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의 관리위원들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공장관리위원회는 관리위원장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생산과정을 운영하고 조정해 나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관리위원장이나 관리위원들이 전체 노동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에 노동자들이 그(들)을 해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는 합리적인 운영을 하지 못하는 등 능력이 부족하면 노동자들이 그(들)를 직접 교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임명과정과 해임과정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을 직접 통제하였다.” 이러한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는 공장 단위의 ‘노동자평의회’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사례를 하나 보자. “종연방직 노동자들은 종업원회의를 열어 현장의 책임자들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에는 김기섭(창고과장)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몇 명이 짜고 당목을 몰래 빼내 일본인 농장의 과일과 바꿔 일본인 간부들에게 준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자 노동자들은 위원장(김기섭)을 교체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한때 종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박무길을 공장장으로 데려왔다. 박무길이 공장장(관리위원장)으로 들어오고 관리위원회의 진용이 새롭게 짜지면서 공장의 운영이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활동 등이 고양된 결과물이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생산관계와 공동소유제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생산력을 생산수단을 박탈당하여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생산관계 속의 노동자들이었을 때의 생산력과 비교하면 어떠할까? 생산력(가장 중요한 생산력의 발전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자주적이고 민주적이고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관계 그 자체이다)의 하나인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생산성’에 대한 사례를 하나 보자. “화순탄광은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의 경영으로 1945년 10월부터 생산량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시기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광산노동자 2천 4~5백 명이 강제노동을 하면서 1개월에 7~8천 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노동자공장관리 방식에서는 노동자 1천 3백 명이 1개월에 약 1만 2~3천 톤을 생산하였다. 생산성이 3배 이상 증가하였다.” 가장 중요한 생산력의 발전이기도 한 노동하는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력적이고 연대적인 생산관계 그 자체가 다른 생산력, 즉 자기 자신과 사회적 필요를 위한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생산성도 향상시켰던 것이다.  *1960년대 화순탄광촌:「[호남정맥과 역사] 화순탄광」(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처장)에서. 그러나 이렇게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인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가 장벽에 부딪치면서 부서져 갔다. 그 장벽은 노동계급의 안팎에서 만들어졌다. 하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식민지배 정책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동계급의 분열이었다. 미제의 군대는 1945년 9월 8일 이후 38선 이남지역을 점령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를 억압하기 위한 지배정책을 펼쳤다. 그들은 9월 25일 법령 제2호로 일본인 사유재산 매매를 자유롭게 하여 자본계급에게 공장 소유의 기회를 주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노동자들이 실천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 수립운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제의 군대는 12월 6일 법령 제33호로 38선 이남지역의 모든 일본인의 재산(사유 및 국유 재산)=적산(敵産)’을 접수하여 관리하고 불하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것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를 파괴하고, 적산을 ‘국유화=국가자본화’(관리인제도)한 뒤 민간자본들에게 불하하여 미제에 종속적인 ‘식민지 사유제 자본주의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의 수립을 가로막는 더 큰 장벽은 노동계급이 혁명적으로 뭉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를 성취하기 위한 단결투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즉 노동자들은 (사유제 또는 국유제)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노동자들과, 노동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를 지향하는 노동자들로, 서로 대립적으로 갈라섰다. ‘사유제 자본주의 사회’ 수립을 지향하는 노동자들은 미제와 한국인 자본계급에게 의지했고, ‘국유제 자본주의 사회’, 즉 ‘인민민주주의 사회’ 수립을 지향하는 노동자들은 조선공산당(조공)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의지했다.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소위 ‘노동계급의 전위조직’이라는 조공은 11월 24일에 기관지 <해방일보>를 통해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 수립 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즉 조공은 노동자들이 “공장접수나 관리문제로 인해 미군정 당국과 대립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신중하게 재고되어야 할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극복할 수 없는 ‘국유제 자본주의 사회’, 즉 ‘인민민주주의 사회’를 수립하려는 조공의 목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와는 대립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조공이 ‘혁명주의적인’ 정당이 아니라 ‘개혁주의적인’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5년 11월 5,6일 결성된, 조공에 의해 자신의 ‘보조조직’으로 규정된, ‘노동계급의 일부로서의 대중조직’인 전평도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와는 대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즉 결성대회에서 전평의 조직부 책임자인 현훈은「노동자 공장관리에 대하여」를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노자공동관리’ 정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현장 노동자들과 밀착하고 있었던 대의원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전평 집행부는 자본계급이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극복할 수 없는 ‘노자공동관리’를 고수했다. 이것은 ‘국유제 자본주의 사회’, 즉 ‘인민민주주의 사회’ 수립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전평이 ‘개혁주의적인’ 목적에 갇힌 것은 조공의 ‘보조조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하는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주로 할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 일반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속성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자본주의가 인류사회를 지배해 왔다. 한편으론, 그 동안에 자본계급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자본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 동안에 노동계급은 자본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억압당해 왔다.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을 자본계급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당할 만큼 당했고, 참을 만큼 참아 왔다. 이제, 1945년 8월 15일 직후부터 11월까지 ‘노동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공장사회’라는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본격적이고 전면적으로 노동계급이 주도하여 ‘착취와 억압의 관계’가 없는 인류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자본계급에게 빼앗긴 생산수단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 즉 자유로운 생산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자면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는 노동계급의 일부만을 조직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라는 일상적인 대중조직 운동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반드시 노동계급 전체를 단결시킬 수 있는 대중조직 운동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급기야는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꼭 ‘개혁주의적인 지도력’을 지양하는 ‘혁명주의적인 지도력’을 항상적으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참고> 김기원, 『미군정기 경제구조』, 푸른산, 1990; 김무용, 「해방직후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의 조직과 성격」, 『역사연구』3, 거름, 1994; 이영남, 「노동자 공장관리운동(1945-1946)과 노동자공동소유」, 서강대 사학과 석사논문, 1998;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 미래를, 2005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