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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거짓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 진행되는 양상에서 정의란 무엇일까_양규헌
첨부파일 -- 작성일 2017-01-17 조회 1404
 

진실과 거짓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 진행되는 양상에서 정의란 무엇일까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 겹쳐졌던 한해가 지나고 새해를 맞고 있다. 삶의 흔적이 거듭될수록 새해의 의미가 퇴색되는 느낌은 나의 무디어진 감성일수도 있다. 그러나 새해는 누구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다가오는 한 해의 구상들을 구체화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난해를 돌이켜 보며 평가하고 평가의 토대에서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느라 분주한 시기이다.

오래 전 노동운동을 시작 할 때, [정의가][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노동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왔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죽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운동가요가 거의 없었던 시기에 이 노래를 부르며, 노동운동은 정의로운 활동이라는 확신으로 당당해질 수 있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때는 운동의 노선과 이념보다는 막연한 정의감이 활동하는 사람들을 버티게 해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1981년쯤, 노동조합에서 신년을 맞아 신입조합원 교육을 한다. [정의가]를 함께 배우고 노동조합이 무엇인가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 “노동자는 정의로워야 하며 노동조합은 정의로운 사회와 정의로운 삶과, 우리 권리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자 스스로 만든 우리들의 조직이 노동조합임을 설명할 때, 한 신입조합원이 매우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한다. ‘민정당(민주정의당)은 정의사회구현을 주장하고, 우리가 오늘 부른 노래가 정의가이며 노동조합은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들의 조직이라는데, 그렇다면 노조는 민정당과 형제 같은 겁니까?’라는 질문에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다. 에둘러 그들(민주정의당)이 당명으로 붙인 정의와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는 정의는 뜻이 다르다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지금도 정의라는 단어는 논리적 흐름에서 다소 헝클어져 있다.

 

정의는 단어 그대로 올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의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복잡해진다. 올바름과 의로움, 즉 정의에 대한 해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민정당(새누리당의 전신)의 정의와 노동자 민중의 정의규정은 같은 단어임에도 왜 다를까. 법원 높은 곳에 매달린 정의와 우리들 가슴 속에 담긴 정의는 왜 느낌부터 다를까. 정의는 생명을 중시할까 도덕을 우선할까. 쓰레기 짓을 하면서까지 얻고 싶어 하는 게 정의라는 게 성립할까. 정의는 계급적 입장에 따라 다르기보다 계급적으로 재단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으니 정의가 아니라 불의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대의를 위해 악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의라면,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IS의 무차별 인명살상 테러는 정의일까 불의일까. 정의라는 단순한 단어를 해석하는데 명쾌한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는 이유는 단어에 담긴 철학적 의미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공리주의와 국가론이 등장할 수밖에 없으니 짧은 식견으로 덤벼들 일은 아니다). A라는 나라가 자국을 위해 B라는 나라를 공격해도 정의이며, 1명을 죽여서 100명을 살릴 수 있다면 1명을 죽이는 것도 정의라고 우기는 것은 공리주의적 근거를 들먹일 것이고, 이는 지금 지배계급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너무 복잡해서 알 수 없다는 식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어떤 논리나 주장도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뛰어나다고 해도 정당하지 못하면 폐기되어야 한다(노동악법이 바로 그런 것). 모든 사람은 전체사회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유린될 수 없는 불가침성을 갖는다. 따라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정의는 있을 수 없다. 공정성과 평등과 자유를 배제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지배계급이 국민의 공동체를 운운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기만이며 속임수이다.

 

존 롤즈가 주장하는 정의론합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사회의 기본원칙이다. 기본적 원칙으로서 롤즈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 바로 정의라고 이야기한다. 롤즈는 여기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합의 가능한 보편성을 획득하고자한다. 롤즈는 보편성에 정의의 필연성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한 계약에서 정의의 정당성을 도출한다. 한마디로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규정한다. 진실과 거짓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 진행되는 양상에서 정의라는 화두가 모든 걸 규정하는 잣대가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정의가 무엇인가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정의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계급에 따라 다르다는데 있다.

 

국가의 기능이란 그 기능을 수행하는 계급을 구분하고 그 기능이 정의를 바탕으로 굴러가야 정상적인 국가가 된다. 개인 역시 구분된 이성과 용기와 절제가 잘 어우러져야 정의의 가치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체득하는 정의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절대 살 수도 없고 시장논리가 가치를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의이다. 사회적으로는 소외되거나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지원하며 실질적인 기회균등을 마련하고 진정한 평등이 유지되는 사회를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 권력과 자본이 결탁하여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가 만연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불의가 만연하는 세상이다.

 

지배계급도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로는 강조하고 있다. 세상이 온통 썩어빠진 상황에서도 자본과 권력은 자신감 있게 정의사회를 외치며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국민전체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소외계층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게 그들의 정의이다. 아울러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생각을 외치는데 급급하다. 실제는 자신들의 생각을 반영시켜내기 위한 꼼수들이 정치라는 가면에 씌워 포용이 아닌 포섭정치로 군림하고 있다. 허접한 의리 때문에 국정농단을 두둔하며 권력찬탈에 눈알이 벌겋게 달아올라 거품을 물며 자신들만이 옳다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의 가면을 쓰고 싶을 뿐이다. 21세기 최첨단 정보와 IT시대에도 지배 권력의 집단광기에서 풍겨나는 그들만의 정의(의리)앞에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새해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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