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시간이 흐르면 계절이 바뀐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세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자연법칙을 대하는 일반적인 시각이라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보며 인생도 흘러가는구나라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것일 게다.
한줄기 빗줄기가 여름의 끝자락을 흔들고 제법 선선한 기운이 불어오자 계절 변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뜨거웠던 여름이 저 멀리로 나풀거리며 지나가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가운데 추석명절을 앞두고 있다. 명절은 민속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기일, 축일로서 즐거운 날의 상징이다. 추석에 전해지는 풍습에는 ‘음식’과 ‘놀이’와 ‘경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특히 공동체적 풍습 자체는 과학문명이 발달된 지금의 시기에도 음미해 볼 만하다.
추석은 신라 유리왕 때 비롯되었다. 유리왕은 두 공주로 하여금 서로 경쟁관계를 설정하여 ‘경쟁 속에 생산성 향상’을 꾀하게 하였다. 즉, 궁궐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을 두 공주에게 각각의 대오로 재편한 다음, 7월 보름부터 8월 보름까지 밤늦도록 베를 짜게 하고 한 달 후 생산실적에 따라 지는 편이 이기는 편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며 즐기는 것이다. ‘한가위’의 뜻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정확한 역사적 근거까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시작된 추석이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피지배계급의 분노를 잠재우는 명절로 변화되었으며 당대를 존치하기 위한 기제로 작동되었을 수도 있다. 노동의 대가에 대한 불균형과 불평등의 심화로 붕괴될 위험을 안고 있는 봉건사회를 지탱하는 요건들이 명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버릴 수 없다. 21세기의 한국은 고유 명절이 고작 2~3개에 불과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매월 한 번 씩의 명절이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설득력을 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생산한 곡식으로 송편과 음식을 만들어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는 날로 정해진 것은 일가 친지가 인연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명절을 계기로 흩어져 살아가는 일가들이 이날은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임을 강요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가족제도에서 많은 친척들까지 모인 상황에서 밤을 새우면서 감당해야 할 여성들의 살인적 노동 강도는 명절 속에 묻혀 버린다. 강강술래와 줄다리기와 가마싸움은 투쟁적인 의미보다는 집단화된 놀이로서 의미가 강한데, 느린 가락의 진양조로 구성지게 시작하다가 점점 빨라지며 휘돌아가는 강강술래는 집단적 분노를 음악으로 표출하며 삭히는 데 기여함으로서 집단적 투쟁의지는 공동체 놀이 속에서 소멸되지 않았을까?
‘추석빔’이라는 건, 추석명절에는 머슴들까지도 새로 옷을 한 벌씩 해 주었다는 뜻이다. 양반은, 주인은 담뱃대 입에 물고 큰 기침하며 감시기능만으로 호의호식을 하며 노동 강도를 높여 낼 수 있는 여건이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추석빔’이란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지친 노동에서 잠시 휴식을 갖는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하기휴가가 그렇고 명절휴가가 그렇고 그런 휴가 때마다 지급되는 보너스가 즐거움을 더욱 부채질한다. 때문에 우리의 고유 명절이라는 추석은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 날만 같아라”는 속담에 귀가 솔깃해지는지도 모른다.
추석의 사전적 의미는 “가을의 저녁”이다. 이 짧은 의미는 풍요와 평온을 상징한다. 가을이란 계절은 노동으로 이뤄온 수확을 하는 시기이다. 그런 날을 기념하는 추석은 낭만의 계절 가을과 함께 더더욱 빛날지도 모른다. 올해도 명절 휴가를 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도로에 차량들이 줄을 잇고 백화점 진열대는 호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명절과 휴식은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지난 수년간 노동자투쟁과 올해 쌍용차 투쟁은 여름휴가에 동력을 상실했고, 장투사업장 투쟁은 명절을 통해 동력이 소진되는 과정을 경험해 왔다. 사회적으로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노인, 장애, 고아원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근본적 예산 대신 명절 때 라면박스 꾸러미와 ‘사회공헌기금’과 자그만 모금이 사회적 책임을 대신하게 되면서 소외계층일수록 명절을 두려워하게 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시민의 삶,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할 국가와 정부는 부자들의 잉여가치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은 무시무시한 경찰특공대 투입으로 집단적 학살의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서는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다’라는 역설은 해석할 방법이 없다. 시민의 세금으로 새롭게 단장된 서울광장에서는 밤하늘을 눈부시게 하는 화려한 싸이키 조명과 함께 현란한 음악과 춤 공연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건너편 대한문 앞에는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공권력에게 짓밟히는 용산참사 유족들의 피맺힌 절규가 광란하는 해비메탈 음악에 흡수된다. 지배계급의 이윤배가를 위한 개량의 떡고물은 ‘일몰금지’라는 규제도 없이 매우 자유롭게 밤하늘에 뿌려진다.
야만의 자본주의가 사회적 모순을 극명하게 노출하는 시기에 맞이하는 추석명절은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 아니라 진정한 집단화와 공동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강강술래의 진 풀이를 전투적으로 재구성해야 하고 줄다리기와 가마싸움은 지배계급을 향한 투쟁으로 바꿔내는 것이 명절다운 명절의 의미가 될 것이다.
생존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배된 쌍용차동지들과 전철연 동지들이 갖는 명절의 아픔을 함께 하며 여전히 해결해야할 투쟁의 과제들에 대해 결의를 모아보자.
그리하여 지배계급의 체제유지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추석이 사회적 모순에 대해 분노를 모아내고 ‘노동자계급 반격의 날’로 전환하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추석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