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라면 노동자의 기억 (8)
* 전원이 월휴계를 작성해놓고 모여 있자 세 반장들이 생산총본부장의 면담을 주선했다. 일단 우리들의 의사라도 전달해 보자는 거였다. 의사 전달은커녕 실컷 훈계나 듣고 오기가 십상인지라 일부 반대자도 있었으나 대화자체를 거부할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라면2과 앞 완제품 출구장 앞에는 작업을 거부하고 나온 아가씨들이 2명에게 징계위원회에 출두하지 말 것을 거세게 요구하고 있었다. 각과에서 모인 아가씨들로 얼핏 보아 300여명이 되는 인원이었다. 징계위에 출두하기 위해 본관 사무실을 향해 가던 2인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을 설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사 측에 불필요한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 현장에 가서 작업을 할 것과 징계위원회에 참석해 떳떳하게 할 말을 하는 게 낫다는 얘기였다. 앞으로의 우리 노동조합 발전을 위해서도 희생자를 최소화시켜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막무가내였다. 고약한 인상으로 소회의실을 들어온 생산본부장은 예의 독종 같은 눈매를 번득이며 30명의 부서원들을 하나하나 찍어보았다. 뭔가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잠시 후 창밖이 소란스럽더니 정동철씨가 들어왔다. 창밖 현관 입구에서는 현관출입이 봉쇄된 듯 아가씨들과 관리자들이 맞고함을 치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너 왜 아가씨들 선동해. 엉?” 순간적이었다. 본부장이 윗 양복을 벗어 책상위로 내던진 후 와이셔츠 팔뚝을 걷어붙이며 정동철씨에게 달려들었다. 정동철씨가 의자에 채 앉기도 전이었다. “누가 선동을 합니까, 누가 선동을 해요?” 정동철씨도 열이 받치는지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의외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멍이 든 듯 푸르딩딩한 눈자위와 실핏줄이 서린 눈을 부라리는 본부장은 가히 가공적이었다. 모두들 기가 질린 얼굴들이었다. “선동을 안 했어, 새꺄 엉?” “난 오히려 말렸습니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아가씨들을 난 오히려 참석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참석해 당당히 할 얘기를 하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나가서 아가씨들한테 물어볼까요?” 정동철씨도 당당했다. 본부장의 위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똑같이 받아쳤다. “맞습니다. 정동철씨는 오히려 아가씨들에게 현장에 가서 작업을 해야 한다, 징계위원회에 떳떳이 참석해서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설득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의외라는 듯 일순 주춤하던 본부장의 눈초리가 내 두 눈을 찍듯이 노려보았다. “좋아, 그렇다면 미안하다. 내 사과한다.” 잠시 뜸을 들이던 본부장이 정동철씨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러나 본부장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 모인 이유가 뭔가?” 잠시 뜸을 들이며 호흡을 가다듬은 본부장이 자못 진지한 빛으로 물었다. 역시 예의 고약한 눈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찍듯이 보고 있었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말이 없었다. 감히 말을 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본부장이 서너 번을 거푸 물어도 팽팽한 긴장감속에 잔기침 소리만 이따금씩 들릴 뿐이었다. “지난 4일 최종 협상 타결 때 파업으로 인한 어떠한 불이익 처분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본부장님이 분명히 하신 걸로 압니다. 노사 협상대표와 20여명의 조합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확약하셨고, 또 노사 대표들과 참관 조합원 모두가 박수로 환영했습니다. 노사 어느 쪽이든 공식 협상에서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사 측의 공신력이나 조합원들의 회사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에 대한 징계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납득을 못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고 시정을 해 달라는 겁니다.” “......지금 말한 사람 이름이 뭐요?” “한경택 입니다.” “그날 협상 때 정동철씨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는 괜찮으니까 이번 파업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 후에 문찬식씨가 다시 말했습니다. 정동철씨를 비롯한 파업지도부와 일반 조합원중 어느 누구도 피해를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본부장님을 비롯한 노무담당 이사와 나머지 회사 측 대표들이 모두 끄덕끄덕 웃으며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합의각서에 안 넣었지?” “회사 측 대표들이 모두 그렇게 하겠다고 확약을 했으니까 안 넣은 겁니다. 합의 각서에 명기를 하자고 해도 노무담당 이사가 걱정하지 말라며, 회사 측 대표 말을 그렇게 못 믿냐며 눙쳐 안 넣은 겁니다. 회사와 회사 측 대표들을 믿고 안 넣은 겁니다.” 본부장은 냉담했다. 그날 무슨 약속을 했건 합의각서에 넣었건 안 넣었건 그건 이미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본부장은 정동철씨의 얘기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지난 14일간의 파업은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은 일부 불순세력이 대다수의 선량한 근로자들을 선동해 일으킨 겁니다. 이것은 파업지도부를 사퇴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본부장이 조용한 어투로 그러나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물건이 없어 못 판다고 영업부에서 난리를 쳐도 파업을 14일씩 끈 이유는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그렇게 한 겁니다.”규찰대의 정문통제로 출입을 저지당한 영업이사가 정문 앞에서 본부장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은 것은 사실이었다. 빨리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물건을 팔아야지 시장 다 빼앗긴다며 발을 동동 굴렀던 것이다. 본부장은 정말이지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목사님이 설교하듯 확신에 차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뭐래도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한 본부장의 입과 눈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30여명의 인원 모두가 숨소리도 크게 못 내며 본부장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4일 오후 송인자가 회의장 안에 들어와 난동을 부린 걸 여러분들은 다 알겁니다. 운동권이 아니고는 그렇게 못합니다. 또 송인자가 돌린 증권감독원 자료도 외부세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회사 측의 요구대로 노조 측의 수정안만 제출하자 송인자양이 회의장을 박차고 들어가 노조 측 대표들에게 항의를 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또한 회사 측이 적자타령만 고집하자 송인자양이 증권감독원에 가 회사 측의 재무제표를 열람 복사해 와 대의원과 조합원들에게 돌린 것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누구든 증권감독원에 가서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열람과 복사가 가능한 회사의 재무제표도 또 회사 측의 적자타령과는 너무나 다른 재무제표의 내용을 대의원과 조합원에게 돌린 것도 운동권의 소행이라는 거였다. 한마디로 모든 게 운동권이고 불순세력이라는 식이었다. “공식 합의문서에 없는 구두 약속이라 하여 안 지켜도 그만이고, 그래서 2인을 징계하겠다면 이는 노사불신을 부추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장의 말도 과장과 부장의 말도 각서를 받아야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얘기나 마찬가지 입니다. 노사화합과 노사 간의 신뢰를 위해 모두가 힘쓰는 이때에 이는 중대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로 볼 때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몇 배나 더 많은 일입니다.”본부장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니 눈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본부장은 너 지금 말 다했냐? 너 누구한테 훈계하는 거냐? 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갑자기 현관로비쪽에서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며 봇물 터지듯 소란이 일었다. 현관 출입을 저지하는 관리자들을 밀치고 아가씨들이 현관로비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본부장이 문을 열고 뛰쳐나가며 땡고함을 쳤다. 그러나 본부장의 땡고함은 아가씨들의 욕설과 아비규환에 먹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저 썅놈의 새끼가 내 유방 만졌어.” 일단의 아가씨들이 한 관리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지목을 받은 관리자는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징계위원회의 출두자들이 굳이 징계위원회의 참석을 고집하자 아가씨들도 같이 징계를 받겠다며 따라 들어온 것이다. 아가씨들은 으쌰으쌰를 외치며 혹은 징계철회를 외치며 현관로비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관리자들은 한쪽으로 밀려난 채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자동정비반원들과 소회의실에 있는 정동철씨와는 달리 징계위원회 출두를 위해 들어왔던 송인자 양은 아가씨들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카메라 뺐어.” 아가씨들을 향해 마구 셔터를 눌러대는 관리자에게 이번에는 온갖 욕설이 퍼부어졌다. “본부장님, 형사 부를까요?” “불러요.” 노무담당 이사는 허겁지겁 전화기를 향해 뛰어갔다. 소회의실의 문을 닫고 되돌아온 본부장이 오금을 박듯 말했다. “동료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 선의의 피해를 입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본부장이 나가버리자 소회의실 안은 조용했다. 본관 사무실이 들썩거릴 정도로 노래와 구호가 난무하는 현관로비와는 달리 소회의실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누구하나 쉽게 입을 열지를 않았고 열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현관로비의 아가씨들은 회의실문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대열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회의실안의 30명은 서로의 눈치만 보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나갑시다, 본부장 얘기 끝났으니까.”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회사 측에서 계속 징계를 고집할 경우 아가씨들의 투쟁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라 일어서는 사람은 서너 명뿐이었다. “가만있어 보자고, 그렇게 해 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고.” 김반장이었다. 관리자와 가깝고 평소 보수성이 강해 젊은 친구들과 자주 다투는 사람이었다. “그래, 좀 있어 봐.” 몇몇 사람이 김반장의 말에 동조를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박이 날아왔다. 잠시 어지럽게 언쟁이 오고갔다. 결정대로 아가씨들의 항의대열에 합류하자는 측과 대화로서 순리대로 풀자는 측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미 후자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공무과 자동정비반에서 또 선동을 했다는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파업 때 선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요주의 부서로 주목을 받고 있는 탓이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징계후의 대책으로 옮아갔고, 조별로 2명씩 해고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결정하자는 거였다. 몇몇 사람들은 곧바로 퇴장하여 퇴근해버리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난 결정이었다. 징계도 받기 전에 해고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어쩌자는 건가? 파업 때 비실거리며 꽁무니만 빼는 남자들에 대한 아가씨들의 조롱은 백번 옳은 소리였다. ‘남자들에게 가위를!’. 정말이지 나를 비롯한 30명의 부끄러운 남자들에게 가위라도 하나씩 사 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남자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할 바에는 그게 오히려 마음 편한 노릇일 것 같았다. 벙어리 냉가슴만 앓듯 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동철과 송인자는 보름 후 군사 작전처럼 해고를 당했던 것이다. 핵심적인 민주파들을 각과 사무실에 연금시킨 채, 두 사람을 따로따로 불러 해고를 통보하고, 경비들을 통해 회사 정문 밖으로 끌어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