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 고향마을, 충북 충주시 엄정면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충주시 북쪽에 위치한 엄정면은 제천방면에서 서울로 통하는 교통로 상에 있고, 충주에서 원주로 가는 19번 국도가 지나가며, 남한강 수운의 하항인 목계나루가 위치하여 일찍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는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이 서울로 운반되었는데 그 중간 집결지를 조창이라 한다. 남한강 조창의 대표적인 곳이 가흥창(가금면 가흥리)과 내창(엄정면 내창)이었다. 가흥창이 있었던 목계나루는 배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500여명에 이르렀으며 1909년 한 해 오르내린 배가 800척이 넘었다고 한다. 목계나루는 물물을 교환하는 시장과 난전이 크게 번성하였고 나루 부근의 가옥수가 1000호가 되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나루였다. 1913년에는 내국통운주식회사 소유 선박 범선 8척이 충주~용산 간 화물을 수송했고, 그 중심지가 목계였다. 
그림 : 엄정 내창시장 입구. 오른쪽 농협 건물 뒤편이 김삼룡이 태어난 곳으로 지금은 식당이 들어섰다. 목계나루에서 십리(4Km),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가면 엄정면 소재지 용산리가 나오는데 마을 입구에 내창장의 유래를 설명하는 큰 돌비석이 턱하니 반겨준다. 내창장은 오일장으로 1770년(조선 영조46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장이 섰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족히 250년 이상 지속된 역사가 담긴 장이다. 1950년대를 전후하여 가장 번성하였고 대목이나 백중 때는 천 명이 넘는 장꾼들이 모였다고 한다. 내창장은 목계나루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내창장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살림이 넉넉해 한때는 면민이 만 명을 넘었고 교육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 1915년에는 용산리공립보통학교(현 엄정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타 시골 면소재지와 비슷한 작은 마을로 2019년 1월 현재 엄정면 인구현황은 1,710세대, 인구수는 3,505명(남1,822명, 여1,683명)이다. 김삼룡金三龍(1910~1950)은 엄정면 용산리 470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부덕富德으로 부모 마음은 그가 부자로 살길 바랐지만 김삼룡은 ‘하룻밤에 야체이카(정치조직의 세포) 하나씩 만든다는 조직건설의 귀재로 투철한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짧은 일생을 살았다. 아버지 김용서는 땅 한 뙈기 없는 소작인이었으나 병으로 일찍 세상을 등졌다. 6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김삼룡은 어머니 전운계가 내창장 시장에서 국밥집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큰형 김쌍룡金雙龍이 황색엽초 소작을 하면서 그나마 김삼룡은 13살에 용산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림 : 용산리공립보통학교(현 엄정초등학교) 10회 1928년 3월 23일 졸업 사진. 김삼룡도 10회 졸업생이다. 그러나 누가 그인지 확실하지 않다. (출처: 엄정100년사) 작달막한 키에 털털하게 생긴 외모였지만 공부만큼은 늘 일등이었던 그는 1928년 졸업하자마자 스승인 이정재李亭栽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 경성 고학당(5년제 고등보통학교 교육과정)에 입학하였다. 1928년 당시 경성 고학당은 ‘혁명투사 양성’ 또는 ‘노동자 농민의 세포 양성’을 목표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학습을 조직적으로 진행하는 고학생들의 자치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는 학교였다. 경성 고학당에서 공부하면서 김삼룡은 다른 학교 학생들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1930년 11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 2개월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첫 번째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역시 치안유지법으로 형을 살고 있는 이재유李載裕(1905~1944)를 만났다. 1932년 2월 만기 출소한 김삼룡은 고향마을로 내려와 엄정지서를 불과 50m앞에 두고도 자기 집에서 농민들을 조직하고 학습하면서 활동하였다. 1932년 12월 만기 출소한 이재유가 그에게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취할 때까지 김삼룡은 고향마을에서 열심히 고향사람들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1933년 2월 이재유와 접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림 : 1942년 미곡 황새터 뚝방에서 바라 본 용산교와 엄정지서, 우측 건조실은 김삼룡 거주 가옥(출처: 엄정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