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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_송시우 (40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4-10 조회 1010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송시우 (한내제주위원회 부위원장)

20001월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조에 의하면,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3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4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하고 있으며,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채택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19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4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9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이라고 제주4?3사건을 정의내리고 있다.


<다랑쉬 오름>
 

 제주4?3사건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 없이,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명예회복에 중점을 둔 진상규명의 한계를 보여 주는 정의들이다. 그래서 진상규명 운동이 더 요구됨을 반증하는 결과물들이다. 모두 시대적 상황을 내포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나 풀이없이 매년 ‘43을 떠올리게 되면서, 올해도 ‘64주년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의 과정 중 상징적인 사건이 있는데, 바로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이다. 194811월부터 제주4?3사건은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되는데,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제주4?3사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놓게 되는데, ‘계엄령과 초토화 작전이다. ‘계엄령에 대한 불법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초토화 작전은 동족을 향해 으로 간주하고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제주도를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강경진압작전인데, 이에 선봉장이었던 사람이 일본군 출신의 송요찬이다. 한라산에 휘발유를 부어서라도 불태우겠다던 ‘9연대대장이다. 194812월 대전지역의 ‘2연대와 교체되기 직전에 훌륭한 토벌업적을 위해 대살, 자수사건, 함정토벌등의 무차별 학살로 1주일 동안에 ‘630을 살해했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져 마을의 젊은 남자들의 신변은 어느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구좌읍 종달이 청년들이 산으로 피신하던 날이 194811월 중순이었는데 마을청년 김호준과 채정옥이 무장대에 의해 납치되었고, 이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입산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가슴속에는 일명 종달리 6?6사건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달리 6?6사건194766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 소속 청년 70여명이 집회를 방해하는 경찰 3명을 구타한 사건으로 그후 종달리 청년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있었다.

다랑쉬굴은 속칭 선수머세라 불리는 지역의 동굴로 19481218(음력 1118),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굴이 발각되어 집단희생 당한 곳이다. 이 날 군경민 합동 토벌대는 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하다가 이 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수류탄 등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나가도 죽을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 넣었고 굴 입구를 봉쇄했고, 굴 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하나 둘 죽어갔다.


<발견 당시 다랑쉬굴의 희생자 유해_사진 4.3연구소>

한때 이들과 같이 다랑쉬굴에 은신해 있었던 채정옥(, 0381) 씨는 사건 발생 다음 날 굴속에 들어가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다. 굴 안에는 그때까지도 연기가 가득차 있었다.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 있는 시신도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자료(제민일보 199244일자)에 의하면 종달리 출신으로 당시 민보단 간부를 역임했던 고()오지봉 씨는 생전에 그날 작전은 함덕에 주둔했던 대대본부가 지휘한 군경민 합동작전이었다. 다랑쉬굴을 발견, 군경은 처음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에다 불을 치펴 질식사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자료에서 채정옥 씨는 희생자들이 왜 그 굴속에 있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종달리는 476?6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그후 4?3사건이 나자 더욱 군경과 서청의 주목을 받아 일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굴 안에 총기류는 없었고 희생자들이 무장대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또 피해자의 유족들은 민보단원들로부터 가족들의 희생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당시의 상황은 사체를 수습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부 유족들은 음력 1118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전날인 음력 11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한편 다랑쉬굴은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회원들에 의해 199112월 발견되었으나, 당시 엄중한 사회현실을 감안 공개치 않다가 전문학자 및 언론사, 의사, 법률가들의 자문을 얻어 199241일 공개했다. 유해 공개는 당시 충격적인 파장을 몰고 오면서 4?3희생의 무모함과 참혹함을 세상에 알렸다. 특히 현장 공개 후, 위 채정옥 씨 등에 의해 희생자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그 충격은 더했다. , 강태용(, 34), 박봉관(, 27), 고순환(, 27), 고순경(, 25), 고태원(, 25), 고두만(, 21), 함명립(, 21), 김진생(, 51), 부성만(, 24), 이성란(, 24), 이재수(, 9) 등의 희생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무분별한 희생이었다. 더군다나 굴 속 현장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 허벅, 요강 등의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 연장류들이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난생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199241일 공개한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45일 만인 515일 한 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새벽 다랑쉬굴 현장에서는 구좌읍과 유족들의 주관 아래 유해인도와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 직후인 아침 7시 현장을 떠난 유해는 제주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된 후, 다시 희생자들의 고향인 종달리 앞바다 등지에 부려졌다. 이는 유해 발굴의 파장을 차단하려는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이 서둘러 유족들을 회유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또 다랑쉬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꺼내진 뒤, 나머지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입구를 다시 콘크리트로 봉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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