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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산업 노동자 투쟁
시기 : 1987년 8월 17일 ~ 9월 4일
인천시 서구 가좌동 57010, 인천교 옆에 있는 경동산업은 서울 서초동 본사와 영등포에 A공장이 있으며 인천에서는 주로 양식기와 주방용품을 생산했다. 일반인에게는 ‘키친아트’라는 상표로 잘 알려진 경동산업은 1970년대 이후 세계최대의 주방용품 생산업체로 급성장했으며, 1988년 내수판매가 70% 이상 증가하는 등 당시 매출액만 900억이 넘었다.
그러나 경동산업의 작업공정은 대부분 프레스와 연마로 되어있기 때문에 산업재해의 위험이 다른 회사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1980년 초에는 B공장 함마기계에서 마루가 튀어 올라 그 자리에서 노동자가 즉사했으며, 1983년 C공장 압연부서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노동자의 머리카락이 기어에 빨려 들어가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뇌가 손상돼기도 했다. 이외에도 끔찍한 산업재해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나 회사는 이에 대한 책임을 모두 노동자의 부주의로 돌렸다. 반면 임금은 최저 생계비는커녕 동일업종 다른 회사보다도 턱없이 낮았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구사대 폭력 1984년 10월경 한덕희, 정명자를 비롯한 노동자 몇몇이 민주노조를 건설하고자 노동자들을 규합하다가 회사에 발각돼 부서이동과 폭행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 갖은 탄압에도 활동을 이어가 1985년 1월 14일 드디어 노동조합 결성식을 갖고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회사는 온갖 협박과 매수로 어용노조를 만들고, 노조 결성을 주도한 노동자 2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어용노조를 동원해 비협조적인 노동자를 폭행했으며, 170여 명의 구사대를 조직해 공장 주위를 24시간 감시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 같은 탄압에 나날이 쌓여가던 경동 노동자들의 분노는 마침내 1987년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14일에 걸친 임금인상과 민주노조 쟁취투쟁으로 폭발했다. 구사대가 공장 앞마당으로 돌진해 들어와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폭력을 행사해 어깨뼈가 으스러지고 이빨이 부러지는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끝까지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1987년 경동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독 완강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쌓일 대로 쌓인 노동자들의 분노에 있었다.
1987년 8월 30일 교섭 당시 “민형사상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던 최경환 사장은 이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오후 3시경 노동자들이 작업에 열중한 틈을 타 술에 취한 200여 명의 각목부대를 동원해 노조 사무실에 난입했다. 정정안은 그들에게 맞아 피범벅이 되어 실신했고, 집행부 8명은 대기 중이던 경찰에 연행·구속됐다. 그리고 회사는 편법을 동원해 김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어용 집행부를 구성했다.
1987년 9월 11일 경찰과 구사대의 폭력으로 경동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건설은 일단 좌절됐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민주노조 쟁취투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속됐던 노동자들은 석방되자마자 대열을 정비하고 <부활 인천교 소식>을 발행하는 등 치열한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4월 12일 해고노동자 3명이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폭력으로도 제압이 안 되자 회사는 적자 운운하며 고의로 잔업을 없애고 야간근무를 축소하는 등 노동자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경동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맞섰다.
1989년 ‘디딤돌’ 투쟁
1989년 임금인상에서 어용노조가 회사와 야합하려하자 경동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임금인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어용노조 김치원 집행부는 파업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을 무시한 채 임금인상대책위를 해산시키고 중재안 1,400원 인상에 타결해 버렸다. 이때 평조합원 출신 임금인상대책위원을 중심으로 5월 14일 ‘디딤돌’이라는 친목단체가 조직됐다. 그러나 노조에 관심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디딤돌은 회사와 어용노조의 감시와 탄압 속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6월 6일 지역 노동자 축구대회, 8월 3일 인노협 수련회 참석 등으로 서서히 영향력을 높여가자 회사의 탄압은 더욱 노골화됐다. 디딤돌은 8월 ‘경동가족 한마당’이라는 일일찻집을 하려고 8월 11일부터 표를 판매했는데, 한 회원이 기계실 정과장과 용접실 손과장에게 표를 빼앗기고 무릎이 꿇리는 등의 모욕을 당하자 디딤돌 회원들은 강력히 항의했다. 8월 27일 ‘경동가족 한마당’이 진행됐지만, 회사는 곧바로 디딤돌 강현중 회장, 유원식 부회장, 안중준 총무에게 사유도 게재치 않은 징계위원회 출석요구서를 발송했다. 이에 디딤돌 회원 전원은 “조합원이 당당하게 대접받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전 회원의 해고를 걸고 싸울 것”을 결의, 모두가 혈서를 쓰고 투쟁을 다짐했다.
8월 31일~9월 4일 농성투쟁
8월 31일 디딤돌 회원들은 ‘디딤돌이 조합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저녁 10시경 구사대가 난입했으나 목숨을 걸고 물리쳤으며,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9월 1일 야간조 점심시간에 조합원들에게 농성의 의미와 끝까지 투쟁하자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회사는 야간조를 새벽 5시 30분에 퇴근시켜 버렸다. 경찰 투입 소식이 전해지자 회원들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9월 2일 사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자 디딤돌은 만장일치로 전면투쟁을 선언했다. 9월 3일 몇 차례의 협상이 있었으나 역시 결렬됐고 구사대와 힘겨운 전투가 이어졌다. 9월 4일 밤새 계속된 싸움으로 회원들이 지쳐있는 사이 회사와 노조는 ‘노사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노사 공동대처와 농성자 통제 등에 합의하고 ‘해고자 유인물배포 방어대책조직’을 구성했다. 이에 분노한 농성자들이 생산부 사무실로 내려가자 곧바로 200여 명의 관리자와 구사대가 그들을 에워쌌다. 농성자들은 그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온몸에 시너를 부었다. 주위에 있던 동료 조합원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노조 사무실로 달려갔으나 어용집행부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그 순간, 4층 노무이사 사무실에서 불길이 치솟고 온몸에 불이 붙은 강현중이 뛰어내렸다. 뒤를 이어 김종하, 안중준, 이종화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이들은 급히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강현중은 9월 9일, 김종하는 9월 15일 숨을 거뒀다.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그 뒤로도 해고를 무기로 한 회사에 맞서 민주노조를 향한 투쟁을 계속하다 드디어 1996년, 두 열사와 함께 투쟁했던 박선태와 최성춘을 위원장과 사무장으로 하는 민주노조 깃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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