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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노․경총 임금합의 분쇄와 한국노총 탈퇴투쟁
노․경총 임금합의의 문제점
한국노총은 노동자를 대변하는 조직이 아니라 정부와 자본의 요구에 충실한 조직이었다. 해마다 정부로부터 60억 원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아 왔고, 심지어 1994년에는 노동절대회 행사비로 노동부에 5억 원을 신청하기도 했다. 한국노총은 내부의 요구조차 올바르게 반영하지 않는 비민주적 운영으로 조합원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노총이 집계한 조합원 수는 1989년 167만 명을 정점으로 매년 감소하기 시작해 1992년 말 137만 명, 1993년 말 127만 명이었다. 그나마 소속된 노조도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노조설립신고증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사업에 결합하고 있는 노조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노동부와 한국노총의 조합원 수 통계는 1981년 이후 단 한 번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통계에 대해 한국노총은 노동부는 조직결성 노동자 기준이지만 한국노총은 의무금 납부자 기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1992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탈조직을 1992년 1,665개 노조 68만 7,652명(탈퇴 627개 노조 33만 8,529명, 의무불이행 1,038개 노조 34만 9,123명)으로 집계하고 있다.(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민주노총건설을 위한 제1차 조사연구 보고서’, 1994년 6월) 그런데도 한국노총은 1994년 3월 30일, 전국 노동자들의 거센 반대와 항의를 무시하고 경총과 임금 5~8.7% 인상에 합의했다. 곧바로 노경총 밀실합의에 대한 거부투쟁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한국노총은 경총과 교섭할 권한이 없다. 노동조합법 제33조(교섭권한)은 “연합단체인 노동조합은 단위노조로부터 위임을 받을 때에만 교섭권한이 있으며 교섭권 위임은 총회나 대의원대회의 의결을 가지도록 한다”고 돼 있다. 단 한 곳의 노동조합에서도 교섭권을 위임받지 않은 한국노총이 경총과 한 합의는 노동자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한국노총과 경총의 임금합의는 노동자의 요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한국노총과 경총이 합의한 5.0~8.7%는 물가상승률보다 낮아 실질임금을 깎는 것이다. 합의안은 한국은행이 전망한 1994년 경제성장률인 6.3%와 물가상승률 6.1%를 합한 12.4%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정부와 자본의 요구사항일 뿐이다. 노사정이 합의했다는 제도개선사항 역시 겉치레와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고, 낮은 임금인상률을 감추기 위한 껍데기였다.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실질임금 보장을 위하여 소비자 물가와 주요 생필품 가격이 정부의 억제 목표선 수준에서 안정되도록 최대한 노력한다”고 했지만, 3월 말 물가가 이미 연간 물가억제선을 절반이나 넘어버려서 제도개선 합의사항이 공수표임이 드러났다. 다른 사항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시행계획이 나와 있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노․경총 임금합의는 노사간의 자율교섭을 방해한다. 임금인상은 노사 간의 자율적인 교섭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경총 합의에 따른 강제 타결을 위해 직권조인, 이면합의서 따위를 강요했다. 노·경총의 임금합의는 노사 간의 자율교섭을 방해하는 주범이었다.
노․경총 임금합의는 이미 그 효력을 잃고 있다. 전노협이 1994년 4월에 집계한 임금교섭 현황에 따르면 노조에서는 평균 15.4%의 임금인상 요구안을 내놓았고 한국노총 소속 노조도 10%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된 임금합의는 김영삼 정권이 선포한 ‘무쟁의 원년’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노․경총 임금합의 반대투쟁 사전 조직화
노·경총 임금합의 반대투쟁 사전 조직화의 하나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월 8일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는 노·경총 임금합의 반대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광범위한 반대전선 구축을 위해 ‘반대서명’을 사전에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전노협의 제안으로 전노대도 1월 30일 운영위원회에서 결의함에 따라 반대서명은 전노대 소속노조뿐만 아니라 연대 가능한 한국노총 산하 노조까지 포함해 진행했다. 전노대는 서명한 1,092개 노조 대표자 명의로 2월 24일 <한겨레신문>에 1차 광고를 실었고, 3월 2일 <전국노동자신문>에 2차 1,153개 노조 명의로 광고를 실었다. 서명운동은 전체 1,156개 노동조합이 참여했고, 이 가운데 전노협은 508개 노조가 서명했으며 광고 기금으로 267만 원을 모금했다.
각계각층에도 서명과 신문광고, 기자회견, 항의행동 등의 대응을 요청했다. 2월 16일 전노협 회의실에서 노동사회단체 간담회를 열어 각계각층 500인 성명서 발표, 서명 모금 병행, 신문광고 게재, 기자회견과 항의방문 추진 등을 결정하는 한편 이 사업을 추진할 ‘노·경총 임금합의에 반대하는 노동사회단체 서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서명 추진위원회에는 전국노운협, 전국노련, 한국노동운동협의회준비위, 민중정치연합,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전국연합이 참가했다.
2월 22일 여성백인회관에서는 전노대 주최로 ‘1994년 임금인상 투쟁 승리를 위한 단위노조대표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전노협 산하 103개 노조, 163명을 비롯한 총 300여 명의 단위노조 대표자들은 결의대회 후 한국노총과 경총 앞에서 항의규탄 집회를 진행해 △노·경총 임금합의 반대 △3자개입 수배 해제 △해고자 복직 △복수노조금지조항 철폐 △쌀문제 국회비준 거부 등을 촉구하고 일련의 노동정책 후퇴를 규탄했다. 대회장에서는 쌀 투쟁기금 17만 5,000원이 모금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노·경총 임금합의 전에 서명, 기자회견, 결의대회, 규탄집회 등을 중심으로 중앙투쟁을 전개한 후 노·경총 임금합의가 발표되면 단위사업장과 지역에서 대중적인 규탄집회, 선전전, 대자보 부착 등을 수행한다는 방침에 따라 성남, 경기, 인천, 광주, 마창, 부양 등에서는 항의규탄집회를 열었으며 부천은 공투본 확대간부 농성, 성남은 조합원 수련회를 열었고, 경주는 규탄 현수막과 대자보를 부착했다.
전노협의 한국노총 탈퇴투쟁 방침과 탈퇴 현황
전노협은 4월 20일 5기 3차 중앙위원회에서 노·경총 임금합의 분쇄투쟁 방안으로 △한국노총 해체를 위한 의무금납부 거부와 탈퇴투쟁 △노·경총 임금합의선을 뛰어넘기 위해 투쟁시기를 집중하고 공동투쟁을 결정했다. 이 투쟁방안은 노·경총의 임금합의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투쟁을 통해 민주노총 건설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과 단위사업장에는 이러한 방침에 따른 지침을 내렸다.
노·경총 임금합의 이후 대응사업으로 전노대 대표자 기자회견과 반대서명 확대조직, 조선노협과 대노협 등의 규탄광고 게재 등이 진행됐고, 사업장별로 규탄대회를 열었다. 4월 2일 ‘노·경총 밀실 임금합의 거부 및 물가안정 촉구를 위한 결의대회’에는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250명이 참석했다. 이후 경기, 인천, 부천, 대구, 부산양산, 마창, 경주, 광주 등에서 지역별 규탄집회와 기자회견, 농성투쟁들이 잇따랐다.
이러한 전국적 투쟁의 결과로 1994년 이전에 한국노총을 탈퇴한 노동조합이 31개였던 데 비해 1994년 임투 시기에 한국노총을 탈퇴한 노조는 37개였다. 탈퇴는 총회 또는 대의원대회의 결의로 이루어졌고, 맹비 거부 사업장은 153개에 달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지하철공사, 부산교통공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만도기계 효성중공업, 한국중공업, 현대중공업, 세일중공업, 금호타이어, 아시아자동차, 대우조선, 한라중공업, 코리아타코마, 한진중공업,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노동조합과 파티마병원, 경북대병원, 영남대병원, 동산의료원 등 병원 노동조합들이 대거 한국노총을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방침의 결정 및 전선 구축과 한국노총 탈퇴운동의 성과
‘사회적 합의’를 명분으로 한 임금억제 전략으로 추진된 ‘노·경총 합의 가이드라인 제시’에 대한 대응방침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1993년보다 더 사전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노·경총 합의 자체에 대한 반대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견해와 “노·경총 합의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한 전술로서 민주노조 진영도 정부과 경총에 협상을 제안함으로써 반대 전선을 구축하자”는 견해로 나뉘어 논란을 벌이다 전자로 결정했다.
이 쟁점은 전술적 차이에 불과했고 핵심은 정부와 경총에 협상을 제안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협상을 제안할 경우 노·경총 합의 반대투쟁을 조직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명분이 되는 두 가지 측면, ①가이드라인 제시라는 내용적 측면과 ②대표성 위임 없는 노·경총 합의라는 형식 자체의 문제점 가운데 후자의 명분을 잃게 되기 때문에 노·경총 합의 반대 전선을 광범하게 구축하고 반 어용노총 전선을 강화하는 데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 제기됐다. 결과적으로 ‘노·경총 합의’라는 형식의 문제점은 ‘낮은 가이드라인’이라는 내용상의 문제점과 더불어 상반기 노·경총 합의 반대투쟁 조직화와 한국노총 탈퇴투쟁 과정에서 투쟁과 조직화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정은 매우 올바른 것으로 평가됐다.
전노대 주최로 한국노총과 경총 앞에서 대표자결의대회를 소집해 규탄집회를 개최해 노·경총 합의 반대 투쟁을 지역·업종·그룹·단위노조 차원으로 확산하는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한국노총 산하 노조들의 동요와 이반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전노대를 중심으로 서명광고, 지역별 결의대회, 전국과 지역 차원 기자회견 등의 사업을 전개해서 전노대 미가입 노조들을 다수 포괄해 한국노총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노·경총의 합의 자체에 난항을 초래한 것 역시 합의 이전부터 그 효과를 무력화하는 중요한 성과를 남겼으며 이후 대중적인 임금인상 투쟁과 한국노총 탈퇴운동으로 연결됐다. 상반기 임금인상 투쟁와 결합해 추진한 한국노총 탈퇴운동은 전노대 소속 대공장노조들이 거의 한국노총에서 탈퇴토록 함으로써 한국노총의 위상 하락과 민주노총 건설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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