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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연안 항일군사정치대학과 김산의 발자취_김미화(114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12-16 조회 1122
 

중국 연안 항일군사정치대학과 김산의 발자취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19368월 김산은 상해를 출발하여 서안 8로군 판사처를 거쳐 10월 섬서성 북부 보안에 도착했다. 12월에는 와요보에 자리잡은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홍대 紅大)에서 일본경제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김산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당시 그가 사용한 이름은 장명(張明)이었다. 또한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이다. 연안에 와 있던 님 웨일즈를 만나 인터뷰를 할 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 김산이라고 한다.

중국공산당이 연안을 점령하면서 홍군대학도 연안으로 옮겨갔다. 이듬해인 1937년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학교(항대 抗大)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주소는 섬서성 연안시 이도가 봉황빈관 뒤편이다. 김산도 연안으로 이동하여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는 물론 물리와 화학까지 강의하였다.

 

 
 중국 항일군정대학 입구                                          조선의용군이 사용하던 토굴

 

 

항일군정대학 교장은 임표가 맡았으며, 정치부주임은 양상곤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는 7월부터 19397월 항일군정대학이 연안을 떠나 화북지방으로 이동할 때까지 중국 전역에서 연안으로 몰려 온 청년들이 3만 여명에 달했다 한다. 이들 중에는 1938년 최창익의 지휘 하에 함께 연안으로 온 조선의용대 2지대의 조선청년전위동맹 30여 명도 있었다. 이들은 항일군정대학이 전방으로 이전하자 뒤따라 전방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 정권도 항일군정대학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모택동이 글씨를 써서 붙인 단결, 긴장, 엄숙, 활발이 그들의 구호였다. 항일군정대학 건물은 1947년 국민당 군대의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학생 청년들에게 강의를 하던 김산은 19374월 연안에서 개최된 서북청년구국회 대표대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님 웨일즈는 노신도서관에서 유독 영어책을 많이 빌려간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김산이었고, 그때부터 님 웨일즈와 김산의 인터뷰는 2개월간 17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두 사람이 만난 결과물은 1941아리랑의 노래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님 웨일즈는 취재노트에 김산에 대해서 연안에서 유일하게 불행한 사람이다.”고 적었는데 그래서일까? 김산은 이듬해인 193810월 일본 스파이 혐의와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혀 중국 공산당 중앙정보부장인 강생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시간이 흘러 1983년 김산에 대한 명예와 당적 회복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공식적으로 조치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김산은 님 웨일즈와의 만남에서 앞일을 내다본 듯이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不死性)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김산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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