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항쟁을 찾아 가는 길-1
정민주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 희망터 활동가)
제주로 떠난다.
이번 제주도 방문은 4.3항쟁을 테마로 한 한내 제주위원회 주최 답사이다. 4.3항쟁에 대한 가장 뚜렷한 내 기억은 대학교 2학년 때로 4.3 추모 기간에 동아리 선배들과 본 레드헌트라는 영화이다. 영화를 본 후 소감을 나누던 때가 기억난다. 제주도는 수많은 민간인을 참혹하게 죽인 학살터다. 또한 동시에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찾는 대표적인 신혼여행지다. 이유도 모르는 채 몰살당한 가족들의 피가 흥건한 곳에서 새로운 삶,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신혼부부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한내 답사 일정은 4월 13일 오후 1시부터 관덕정에서 시작되었다.
관덕정은 1448년 세종 30년 신숙청이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이 왕성한 시기에 ‘건준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관덕정은 그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엔 또 미군정이 차지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관덕정은 제주 행정의 중심이다.
관덕정 앞에서 간단히 김창후 4.3연구소 소장님의 4.3 개요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4.3은 1947년 3월 1일 기념식을 마친 참가자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가 도화선이 되었고 이 사건이 민관총파업으로 이어져 4.3이 발발했다고 한다.
답사팀은 미니버스를 타고 첫 번째 목적지인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로 향했다. ‘잃어버린 마을’은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해 아예 사라져버린 마을을 일컫는다. ‘학살당한 마을’이 더 적절한 이름일까. 제주항을 지나 오현고등학교 근처로 들어갔다.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한다. 곤을동은 제주 중심지와 가까운 바다와 인접한 해안 마을이다. 70여 호가 살고 있던 마을이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되면서 지금은 마을터만 남아 있다. 검정색 현무암 돌담은 올레와 당시 집터들을 알려주고 집터에 가득한 노란 유채꽃들은 바람에 하늘거린다. 지척의 짙푸른 바다. 마을터에는 아직도 커다란 말방앗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옹기종기 욕심 없이 이웃들과 나누며 살았을 아름다운 마을이 1949년 1월 4일 토벌대들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곤을동 마을터 방사탑 옆 민예총이 설치한 표석이 훼손되어 깨어져 있었다. 아직도 현재 진행중인 4.3을 마주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돌로 싸은 집터가 그대로 보인다. 시에서 유채꽃을 심어놨다고 한다.

훼손된 해원탑 표지석
곤을동에서 함덕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함덕해수욕장은 제주에서 유명한 해수욕장으로 맑은 날씨 때문에 더욱 아름답기만 했다. 몇 번의 제주여행에서 이렇게 맑고 좋은 날씨를 접하지 못한 나는 살짝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코스는 함덕해수욕장에서 서우봉을 넘어 북촌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 함덕해수욕장에서 서우봉으로 가는 길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조금 가파르긴 했지만 왼쪽으로 보이는 제주의 푸른바다를 더 멀리 볼 수 있기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서우봉은 함덕 대대본부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다. 선흘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불타자 오갈 데 없어 마을 인근 굴에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붙잡혀 서우봉 절벽에서 총살당했다 한다.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진 사람들은 주검조차 수습하기 쉽지 않았다 한다. 가파른 절벽을 오르며 시신을 수습했을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살아 있는 목숨이 얼마나 다행이라 여겼을까. 아니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내일이란 생각에 몸서리쳤을까. 아마 두 감정을 오가며 어금니를 깨물 수밖에 없었을 것만 같다.
다음 목적지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북촌에서 학살당한 주민들의 이름과 그곳에서 벌어진 학살의 기록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해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 조직이 활성화된 어촌 마을이다.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 문학기념비가 있기도 하다. 당시 어린 아이였던 이들이 머리가 하얗게 된 할아버지가 되어 그 당시를 회상하는 영상을 보았다. 특히 기념관 전시장 입구의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가 그려진 강요배 화백의 그림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지역의 ‘아이고 사건’은 한국현대사가 얼마나 굴절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54년 한국전쟁 전사자 김석태의 고별식을 하던 중 마을이 소각된 6년을 추념하며 묵념을 올리다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들에게 알려져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나온 사건이다. 억울한 마음을 눈물로라도 보이면 죄가 되던 암울한 시절.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을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했을 이들의 가슴에 남겨져 있을 응어리는 검고 거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현무암을 닮아 있지 않을까.

북촌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북촌국민학교 근처 아기무덤들
너븐숭이 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북촌국민학교가 있다. 북촌국민학교는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1949년 1월 17일 2연대 3대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마을을 불지르고 마을 주민 모두를 학교로 집결시킨 후 총살했다. 죽은 사람의 수가 워낙 많아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옮겨 안장하고 온 가족이 몰살당해 연고가 없는 시체들은 방치되다 야산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의 북촌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문은 ‘평화의 종’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진정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종소리가 들릴 수 있을까? 지금은 4.3 항쟁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들이 무고하게 죽어간 사실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했다 하더라도 현무암처럼 단단히 상처받은 마음을 위무하기엔 현재의 평화의 종소리가 미흡하단 생각이 들었다. 강정마을 구럼비가 해군기지로 파괴되는 오늘의 현실에선 더더욱.
숙소로 돌아온 후 박찬식 전 4.3연구소 소장님이 교육을 했다. 박찬식 소장은 4.3을 폭동으로 바라보는 관점, 수난으로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항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한국의 변혁운동의 발전에 따라 변천해온 과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4.3의 역사적 성격이 제대로 구명되지 못한 상태라는 문제의식을 던져 줬다.
둘째 날은 제주지역 중산간 지역에서 희생당한 가족들의 묘지와 마을주민들이 피신해 있던 동굴 탐방, 그리고 다른 ‘잃어버린 마을’을 찾기로 했다. 특히 동굴 답사는 매우 힘들 것이라 한다. 당시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는 기대와 힘든 일정에 대한 긴장으로 살짝 설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