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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중공업 민주노조 쟁취투쟁(1987년 8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8-10 조회 358

삼성중공업 민주노조 쟁취투쟁

 

⦁ 시기 : 19878~ 19881

 

 

삼성중공업 창원2공장 민주노조 결성투쟁

 

삼성중공업 민주노조 건설투쟁은 노동조합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거대 재벌기업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총수의 지침에 따른 재벌그룹의 전근대적 노무관리 체제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민주노조를 요구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일전이기도 했다.

 

삼성중공업은 창원의 1, 2공장과 거제조선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2공장은 1983년 한국중공업의 중장비사업부를 인수한 것으로 근처의 한국중공업 파업투쟁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거제조선소 역시 인수업체인 대우조선 투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삼성중공업의 노조결성투쟁은 19878월 창원2공장에서 시작됐다. 창원2공장은 한국중공업에서 인수하면서 호봉체계 변화, 노동강도 강화, 적자경영을 구실로 한 처우 악화 등으로 노동자들의 불만이 심각하게 누적돼 있었다.

 

1987810, “민주노조 결성보장”,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등을 요구하며 삼성중공업 창원2공장과 삼성클라크 2개사 노동자 50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농성중인 저녁 10시경 노동조합 창립대회를 열고 창원2공장 위원장에 장종진, 클라크 위원장에 정재영을 선출함으로써 길고도 험난한 민주노조 사수투쟁의 막을 올렸다. 다음 날 새벽 3시 직전 구사대(쎄콤)가 투입돼 쌍방 중상자가 7명이나 발생하자 농성노동자들은 포클레인 20대를 몰고나와 정문을 완전히 봉쇄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811일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위해 창원시청을 방문했으나, 회사측이 이미 유령노조를 접수해 놓았기 때문에 복수노조 설립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절당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창원시청 부시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그런데 회사측은 농성 후 귀사하던 위원장 이하 12명 전원을 납치해 경주동방생명 연수원과 부산 해운대 종합연수원으로 분산, 감금했다.

 

협상을 거부한 현장조합원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납치되었던 조합 간부들이 5일 만에 풀려나게 되었고, 사측과 명칭을 노사협의회로 하고, 노조와 같은 조직체로 운영 4명 전임 부당전출자 전원 원직복직 등 39개 항에 합의함으로써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923, 회사측이 주택보조금을 무주택·기혼자 전원 지급키로 한 합의사항을 뒤집고 선착순으로 100명이라는 공고를 개시하자 노동자들은 긴급 대의원회의를 열어 압도적인 지지(쟁의찬성 47, 반대 5, 기권 3)로 즉각 쟁의를 결의했다. 그러자 회사측은 924일 노사협의회에서 8월에 합의한 사항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이틀 뒤인 926일 장종진위원장과 부위원장 박주협과 임현택, 회계감사 전태용 등 4명을 창원경찰서로 연행해 폭력 및 업무방해로 구속시켜 해고한다. 결국 6명 강제전출 후 노사협의회 위원을 확대하고 대의원을 직선하는 수준에서 삼성중공업노조 건설투쟁은 끝나게 되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1차 민주노조설립 투쟁 

 

그러나 삼성중공업 파업투쟁은 이로써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88416,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노동자 1,500여 명이 임금인상과 노조결성을 요구하며 자연발생적인 총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노동자들은 천보석(해양생산1)을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등 민주노조 설립을 위한 임시집행부를 구성하고, 416일에 이어 417일에도 회사 정문을 봉쇄한 채 철야농성을 벌였다.

 

418700명의 노동자들은 노조설립신고를 위해 거제군청으로 향했다. 200여 명의 전경이 최루탄을 쏘며 행진을 막아서는 바람에 150여 명만이 봉쇄를 뚫고 거제군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제군청에는 이미 416일자로 최석철(도장과 반장)을 위원장으로 한 유령노조가 접수돼 있었고, 거제군청측에서 복수노조 불허를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즉각 군청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해 접수에 성공하고 귀가했다. 다음날인 419일 거제조선소 정문과 후문을 완전 봉쇄하고 농성중인 회사에 구사대(관리자와 쎄콤직원) 800여 명이 난입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게 됐다.

 

이에 420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신고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군청을 재점거했으나, 군수는 책임을 회피하며 신고필증 교부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손성섭이 군청 수위실 위에서 예리한 칼로 자해하며 신고필증을 요구했고, 양지운(공무부)은 신고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절규하다 실신하기도 했지만 결국 교부증을 받아내지 못했다. 421일 재차 군청점거를 시도했으나, 전경의 무자비한 폭력과 최루탄에 밀려나게 되었고, 군청 앞에서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강한수(조립과)가 민주노조설립 신고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며, 정필조는 분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신고필증은 교부되지 않았다.

 

422일 농성자 가족들이 철야농성에 동참해 동참자들을 중심으로 가족실천협의회를 구성하고 식사 및 쟁의기금 마련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423일 거제조선소 노동자들은 거제군청을 재점거하려 했지만 전경들의 최루탄 난사로 실패하고 귀사해 철야농성을 계속하기도 했다. 424일 민주노조 신고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구사대 800명이 난입해 무차별적인 구타로 40여 명의 노동자들이 중경상을 입게 되었고,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농성노동자들을 구사대로 오인한 전경들이 오히려 구사대에게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키자 농성자들이 전경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폭력에 밀린 100여 명의 농성자들은 전경의 감시 아래 구내식당에서 철야농성을 계속했다425일 철야농성 10일 만에 회사측과 노동조합이 아닌 사우협의회, 사측으로부터 150만 원의 지원금을 받는 일방적인 임금기구를 구성하는데 합의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2차 민주노조설립 투쟁

 

19884월 한 달간의 투쟁과 패배 속에서도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527, 창원 2공장에서 노조설립 준비 중 제주영업소로 부서이동 당했던 공봉규가 창원 2공장, 제주영업소, 거제조선소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제주공항을 빠져나오다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62일 민주노조쟁취위원회(위원장 위재학)는 거제군청이 삼성측과 야합하고 있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날 밤 상경을 감행하여 위재학(거제조선소 탑재부)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금속노련의 인준증을 첨부해 노동부에 직접 서류를 접수시켰다. 이는 그 동안 삼성에서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기미만 보이면 먼저 서류를 접수하든가 아니면 서류를 넣어 두었다가 접수되었다고 행정관청과 약속해놓는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2개의 시·도 이상에 걸친 사업장은 노동부에 신고한다는 노동조합법 제13조를 이용해 직접 노동부에 신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62, 경남도청에 김무연(창원1공장 과장대리)을 위원장으로 한 발기인 18명의 서명으로 상급단체 가맹 인준증도 없는 신고필증이 접수돼 있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64일 김무연의 출두 해명을 요구하며 부분파업에 돌입했고, 67일에는 김무연의 출두 해명, 공개 사과, 민주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창원 2공장에서는 전재식(가공과)이 노조결성 보고대회를 하려고 출근하던 중 구사대의 집단구타로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67일의 투쟁이 8일에도 이어지자 당황한 회사측은 유령노조 위원장 김무연을 불러놓고 임시조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무연은 나도 학창시절 노동운동을 해봤으나 노조가 있으면 회사가 망한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610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고, 700명의 농성노동자들이 정문을 봉쇄하자 회사측은 무기한 휴업을 공고했다.

 

이에 농성노동자 중 51명을 결사대로 조직해 615일 야간에 서울로 상경했다. 결사대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회사측의 부당한 행위를 언론에 호소하려 했으나, 상경도중 35명이 구사대에 납치되고 16명만 상경할 수 있었다. 삼성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이 중 5명마저 616일 다시 서울 성동구 길2동에서 납치됐다. 남은 노동자중 5명은 동방플라자 앞에서 민주노조 탄압 말라라는 현수막을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나머지 5명은 중앙일보사노조 사무실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였다. 중앙일보사노조는 대의원대회를 열어 회사측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고 농성자들을 교대로 보호해주는 등 뜨거운 동지애를 보여주었다.

 

한편 회사측은 619일에는 농성자 부모를 동원하여 회유작전을 전개했고, 620일에는 납치한 노동자들의 회사 출근을 저지하며 계속 회유를 시도했다. 1988620, 서노협과 금속노련의 삼성재벌 규탄성명서가 발표됐고, 회사측은 20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가면서 농성에 가담·동조한 노동자들은 고향으로 1주일 강제휴가 조치를 취해 동료들과 격리시켰다. 한편 중앙일보사노조에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구사대를 2배로 늘리고, 외부인사들까지 감금하는 만행까지 저지르자 농성자들은 622일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625일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지하철노조 조합원들의 도움으로 중앙일보사를 나와 통일민주당 당사에서 재농성에 들어가 626일 민주당의 중재로 회사와 협상, 전 노동자 앞에서 보고대회와 신분보장을 약속받고 재투쟁 결의를 다지는 성명서를 발표한 뒤 거제로 돌아갔다.

 

계속되는 탄압과 회유에도 710, 마산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와 노동부장관 퇴진 노동자결의대회에 거제조선소와 창원2공장 노동자들이 모여 각각 지부 결성대회를 갖고 거제조선소 지부장에 위재학, 창원2공장 지부장에 이영수를 선출해 서류상으로만 노동조합인 김무연의 유령노조에 조합가입 원서를 송달했다. 그러나 711일 발송한 조합가입원서는 715일 수취인 거부로 반환됐고, 투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성중공업 제3차 민주노조 설립투쟁

 

19888월부터 회사에서는 민주노조 탄압을 전담하는 환경개선팀을 조직해 민주노조운동을 압박해왔다. 환경개선팀은 1520명의 전담요원으로 구성해 민주노조 결성을 강력히 요구하는 핵심노동자, 민주노조결성에 동조하는 노동자, 단순농성가담자 등으로 A, B, C급으로 나누어 미행, 정보수집, 도청, 납치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다. A급일 경우 1명당 23명의 조원으로 전담반을 구성해 승용차로 24시간 감시하고, B, C급은 전담요원 1명에 직·반장과 친한 동료, 고향 선후배 등으로 하여금 회유와 설득작전을 펼쳤다.

 

10월 들어서는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투쟁해온 노동자들을 방계회사로 전출시키고, 117일에는 위재학 삼성조선 민주노조 위원장을 강릉의 동방생명 관동영업소로 이동시켰다.

 

한편 19881112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철폐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던 거제조선소 노동자 50명과 창원 노동자 30명이 구사대에 의해 대부분 납치되고 12명만이 상경해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회장에서 감옥결단대회를 갖고 한국노총 점거농성을 결의했다. 이들이 1113일 치약과 시너를 소지한 채 한국노총을 점거해 유령노조 철폐” “민주노조활동 보장” “부당전출자 및 해고자 전원 원직복직등을 내걸고 농성에 돌입함으로써 삼성중공업 노조결성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115, 소식을 전해들은 거제 조선소 노동자 30여 명이 모임을 갖고 전면파업을 결의했고, 16일에는 거제조선소에서 약 200여 명이 당일 오후부터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같은 날 위재학 위원장은 금속노련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노조탄압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17, 거제에서 삼성조선 노조정상화 비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전면파업에 돌입하자, 상경농성자 전원은 죽음결단대회를 개최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이들은 1117수입농산물 반대 농민대회18전두환, 이순자 구속촉구 제2차 시민궐기대회등에 참가하여 탄압사례를 발표하는 등 연대투쟁을 촉구했다.

 

회사측이 1119일부터 집집마다 방문하여 회유작업을 벌리자 20일 현지파업 농성자들은 주민홍보를 시작했다. 22일에는 거제도에 옥포공영, 대우병원, 대우조선, 대우기공 등이 참석한 삼성노조 탄압분쇄와 민주노조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돼 활발한 연대투쟁을 시작했다. 25일에는 위재학 위원장이 서울에서 거제로 내려와 농성에 합류함에 따라 현지 농성자들의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26일 현지 농성자 800여 명이 감옥결단대회를 열어 해고와 구속을 불사하고 민주노조 깃발을 세울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1128, 거제에서 공대위주최로 열린 민주노조탄압 삼성재벌 규탄대회에 참석하고 상경하던 위재학 위원장이 구사대가 납치하려 하자 극약을 먹으며 항의하다 중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사측은 병원에 보내 치료할 생각은 않고 감금·폭행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다. 또한 앞서 1122일 한국노총 농성자 12명에 대해 면직처분을 내렸던 회사는 이날, 한국노총 농성자 7명에 대한 특례보충역 해제를 통보하는 등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창원1공장 250명이 이날 민주노조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하고, 삼성클라크도 노조결성식을 강행했다.

 

1129, 거제 현지 노동자들은 변전실을 점거하는 등 투쟁의 수위를 높여나갔다. 또한 삼성클라크 노동자들이 노조신고서를 접수하러 창원시청을 방문했으나 이미 6월에 유령노조를 접수시켜 놓은 관계로 무산되자,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회사측은 1130일자로 전면 휴업조치를 취했고, 항의하는 창원1공장 노동자 50여 명이 출근투쟁을 벌였으나 강제해산 당하고 지도부 10명이 납치됐다. 이날, 상경자들은 한국노총 주최로 열린 부당노동행위 규탄대회에서 탄압사례 발표 후 전경련까지 가두행진을 벌이고, 삼성제품 파괴식과 불매운동을 선포하며 삭발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삼성중공업노조 결성투쟁은 11월을 넘어 12월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2월 투쟁은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1일 거제 조선소 김선치 이사가 집행부 4명 불법납치, 창원1공장 100여 명 출근투쟁에 실패하자 마산 통일민주당 백찬기의원 사무실 점거농성 돌입 

2일 위재학 위원장 불법 납치범 색출과 구속 요구하며 신현지서로 가두행진 후 마산지방법원 충무지청에 최관식 사장 고소, 창원1공장 민주당의원 사무실 농성팀 해제, 창원2공장 노사협의회 간부 6명 한국노총 농성자 지지방문 

3일 거제 현지 통일민주당 김봉조의원 사무실 점거농성, 서울농성자 삼성본관 앞에서 시위하려 했으나 세콤과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 농성자들 부천지역 노동악법 개정 보고대회에 참가해 탄압사례 발표 

4일 거제 현지 노동자들 노동악법 철폐부산집회 참석해 삼성노조탄압 사례 발표, 이날 뉴스비젼 동서남북에 삼성중공업 부당노동행위 및 구사대 납치장면이 보도됨 

78일 서울지역 학생들 삼성본관 앞에서 노조탄압분쇄를 요구하며 시위, 수원전자단지 내 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가 유인물 배포 

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삼성 부당노동행위 즉각 중지 촉구 성명 발표, 한국노총 주관으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노동악법 철폐 및 삼성 악질재벌 규탄대회에 참가 후 600여 명과 함께 삼성본관 앞에서 노조탄압 중지 요구하며 이건희 회장 화형식을 마치고 명동일대에서 피케팅 

10일 거제 현지에서 공대위주최로 삼성노조 탄압 규탄 및 군민 위안잔치개최 

11일 한국노총 삼성제품 불매운동 스티커 작업 

12일 수원 삼성단지 해고자들 유인물 배포, 창원1공장 중앙일보사노조 점거 위해 상경 

13일 거제 공대위강용길 위원장 등 5명이 위재학 위원장 중대발표에 참가하려고 정문에 도착하자 쎄콤(구사대)이 강위원장과 김영숙 납치해 집단폭행, 김영숙은 삼성중공업 사장 최관식과 이사 이명구 고소, 위재학 위원장 거제조선소노동조합 결성 선포 후 부위원장과 함께 삭발, 창원1공장 상경자 6명 중앙일보노조 사무실 점거농성 돌입 

14일 명동성당에서 500여 명이 참가해 삼성그룹 민주노조 탄압규탄대회열고 가두투쟁 중 삼성본관과 명동 신세계백화점과 수원 동방생명 등 타격, 거제 현지에서는 노조결성 후 거제군청에 신고서 접수하던 중 구사대 및 전경과 충돌해 부상자 10여 명 발생(강용길은 갈비뼈 골절

15일 거제 현지관리자 부인 등으로 조직된 구사대가 몰려와 변전실 유리창을 깨는 등 난동, 14일 집회시 부상당한 대우조선 신유식 등 7명이 최관식 사장 고소 

16일 거제 공대위주최로 악질 삼성재벌 폭력응징 거제지역 노동자대회개최 후 거제군청에 접수한 신고필증을 교부받기 위해 군청으로 가자 백골단과 전경이 최루탄을 난사하고 강제해산해 위재학 위원장 등 4명 부상 

17일 중앙일보 농성자 전원 노조측의 신변보장으로 구사대 저지 뚫고 한국노총에 합세 

18일 거제 현지 공대위주최로 구사대폭력 규탄응징 대회개최, 전경·백골단·구사대와 충돌하여 공대위 풍물악기와 차량 전소 

19일 거제 공대위 강용길 위원장이 차량 전소에 대한 배후조종으로 최관식(사장) 고소, 서울농성팀 통일민주당 방문해 국정감사권 발동과 당 차원 삼성그룹 폭력사태 진상조사단 파견 요구 

21일 장기간 투쟁에 대한 쟁의기금 마련 논의 

22일 한국노총에서 농성하는 팀이 학생들과 함께 삼성제품 불매운동 피케팅(신세계 앞

23일 명동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피케팅하던 노동자들이 백골단에게 무자비한 폭행당함 

24일 회사측이 제반 상여금 140% 인상해 지급하고 오후에 구사대가 테러진압용 가스총을 발사하며 집행부 25명과 충돌, 부상자는 회사측 앰뷸런스에 싣고 도망가 18명 행방불명, 2명 중상 입고 옥포대우병원에 입원치료 중 

25일 거제 집행간부 포함 11명 서울농성에 합류 

28일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신애전자와 불매운동 피케팅, 명동성당에서 규탄대회 후 전경 2,000여 명과 대치하며 투쟁 후 민주당사에서 대우정밀 상경자들과 철야농성 

29일 명동 신세계 앞 피케팅을 백골단이 원천봉쇄함에 따라 취소하고 평민당사에서 단결의 밤(삼성, 대우, 신애전자, 동성인쇄, 현대사회연구소노조

30일 쟁의기금 마련 위한 볼펜·라이터 판매활동 전개

 

이렇게 삼성중공업노조 설립투쟁은 1988년 해를 넘기게 되었다. 1989년 삼성중공업의 투쟁은 연초부터 뜨겁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14일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노동자 200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파업을 전개하고, 오전 분과토론을 통해 농성을 결의한 노동자들이 1230분부터 구내식당에 모여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요구사항으로 유령노조 해체와 민주노조 활동보장 부당해고자 전원 원직복직 무노동무임금 철폐 등이었다.

 

삼성중공업 투쟁이 해를 넘기면서도 계속 확대되자 평민당과 민주당에서 복직 및 군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에 이르렀고 삼성중공업, 대우정밀, 현대중공업 등 재벌3사 노조가 합동기자회견을 통해 회사측에 협상을 요구했다. 198916일 평민당과 민주당은 한국노총에서 농성하고 있는 삼성노동자들에게 민사소송(부당해고)’특례자 병역문제를 당 차원에서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17일 거제 현지에서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 참고자료 

마창노련삼성중공업 민주노조 쟁취투쟁 일지」 (1989)

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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