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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후꼬꾸노동조합 임금인상투쟁 사업장과 투쟁 개요
한국후꼬꾸는 한일합작(한:일 = 35:65)으로 자본금 17억 9,000만 원, 조합원 103명(남 82명, 여 21명)의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다. 한국후꼬꾸 노동자들은 1989년에 노동조합을 설립한 이래 줄기찬 투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해 왔다. 1992년 임단협 갱신투쟁을 앞둔 때 남자 초임 34만 원, 여자 초임 31만 원, 상여금은 통상임금의 600%였다. 근무시간은 주 44시간으로 토요일 격주휴무제, 일부 2교대 근무를 하고 있으며 평균 근속년수는 남자 1.7년 정도였다.
한국후꼬꾸노동조합은 1991년 1월에 있었던 현대자동차 성과급 투쟁 여파로 회사측에서 전면휴업과 휴업수당지불설을 유포했지만, 교섭을 통해 100% 휴업수당과 부분휴업을 관철하면서 임금인상 투쟁의 기틀을 다져갔다.
1992년 임금인상 투쟁에서 ‘전조합원이 참여하는 임투!공동임투!’를 내걸고 착실한 준비와 투쟁으로 한국후꼬꾸노동조합은 다른 노조보다 일찍 타결됐다. 전국적으로 그 어느 해보다 개별화돼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드러낸 1992년의 임금인상 투쟁 속에서 한국후꼬꾸노동조합이 보여준 임금인상 투쟁 과정에서의 공동참여와 공동실천을 통한 요구조건 관철은 기업별 노동조합에서의 임금인상 투쟁이 조직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임금인상 투쟁 준비와 현장조직
한국후꼬꾸노조는 조합원의 불만과 요구수준을 반영해 기본급 97,976원(일급 3,266원, 요구율 25.6%) 인상과 물가·임금연동제를 요구했다.
노조는 설문조사 결과와 전노협의 임금인상 요구안 등을 토대로 1992년 임금요구안을 작성, 현장토론을 거쳐 요구안을 수정해 임시총회에서 최종 결의했다. 또 요구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단위노조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노력했다.
첫째, 요구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조합원의 요구는 대단히 높은 반면 조합원들의 결의수준은 낮을 뿐만 아니라 개별화돼 있었다. 따라서 예년과 같이 활동적인 조합원들만으로는 임금인상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 조합원의 참여’를 의무로 결의시킴으로써 임금인상 투쟁 승리를 위한 기초로 삼았다.
둘째, 조합원의 연령, 성별, 근속연수, 조합활동 참여 정도가 다양한 상태에서 이를 어떻게 하나로 묶어 세워 요구의 열기만큼 참여를 높일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합원 1인 1역할 하기’를 조직했다. 각자가 지닌 조건에 따라 조합원들을 다양한 형태로 묶어 내는 노력의 결과 현장 내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 각각이 독려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모습을 만들어 냄으로써 조합원 상호 간의 신뢰를 강화했다. ‘조합원 1인 1역할 하기’가 다양한 조합원들의 요구를 개별적으로 방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천차만별한 요구를 일치시키는 형태로 다시 묶어 세워 조합원들이 하나의 역할을 전개할 수 있는 현장조직으로 전환했다.
한국후꼬꾸노조의 임금인상 투쟁 승리에는 다양한 현장조직 활동을 통한 조직력 강화가 밑바탕을 이루었다. ‘조합원 1인 1역할 하기’라는 방침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현장조직을 매개하여 현장의 투쟁력과 조직력을 강화했다.
한국후꼬꾸노조 조합활동의 상징은 선봉대였다. 그러나 1992년 임금인상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풍물패를 구성,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여 풍물패가 조합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됐다. 풍물패를 통해 젊고 활동적인 조합원들을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임금인상 투쟁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선봉대 활동을 통해 노동조합의 기간부대로 단련된 조합원들이 임금인상 투쟁 시기에는 조합원들과 함께할 수 있는 풍물패로 활동함으로써 현장조직을 활기차게 운영한 것이다.
예년의 임단협 갱신투쟁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한 기혼 여성조합원들은 ‘1인 1역할 하기’라는 기치 아래 노래패에서 활동하게 했다. 이렇게 조합활동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현장조직으로 활동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 기혼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가족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이 가족들의 이해와 동참을 얻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함으로써 무리 없이 조합활동에 참여하게 했을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투쟁의 정당성을 홍보하여 조합활동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리고 참여가 미진한 조합원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는 ‘모범실천위원회’가 구성돼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현장의 분위기가 일신됐다. 특히 모범실천위원회를 현장의 반장으로 구성함으로써 노동조합은 조합원 모두 함께할 때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켰으며, 현장 내 위화감을 없애는 데도 기여했다. 이에 따라 족구대회가 있는 날이면 누구나 솔선해서 네트를 치는 등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두드러졌다. 즉, 단지 활동의 모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스로 실천하도록 조합원들을 독려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조합원들이 상호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됐다.
한편 한국후꼬꾸노조의 임금인상 투쟁 준비과정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준비의 체계성을 확실히 한 점이다. 먼저 경기노련 사업 설명회를 통해 현 정세와 임금인상 투쟁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고 단사에서의 조직강화와 공동임금인상 투쟁의 중요성을 교육했다. 이어서 단위노조 임원과 조합원들의 간담회를 통해 관심을 임금인상 투쟁으로 집중시키고 간부수련회, 현장토론을 통해 집행부와 조합원이 하나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후꼬꾸노조는 임금인상 투쟁에 앞서 모든 활동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계획하였고 이를 조합원들의 토론과 참여 속에서 전개했다.
한국후꼬꾸노조는 경기노련의 핵심사업장으로서 임금인상 투쟁을 앞두고 경기노련 간부와의 간담회와 강연회를 통해 정세 인식을 공유하고 공동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이는 타결 이후에도 지역 연대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노조에서 진행한 현장토론도 매우 유효했다. 즉, 임금인상 투쟁 준비기인 2월 말에 1차 현장토론을 통해 조합원들의 의견을 집약했다. 간부는 조합원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며, 임금인상 투쟁을 통해 무엇을 쟁취할 것인지를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다. 간부들은 임금격차 해소, 신입조합원 임금, 물가와 임금연동제를 중심으로 설명했고 조합원들은 토론했다. 현장토론을 통해 무엇으로 의견을 결집할 지를 분명히 준비하고 이를 중심으로 조합원들의 의견을 하나로 묶어 냈다. 이러한 현장토론을 그 이후에도 서너 차례 계속하면서 현장 조합원들의 결의와 의사통일을 해가는 수단으로 삼았다.
교섭과 투쟁, 그리고 타결
1992년 3월 23일 임금인상 1차 교섭이 시작된 이래 4월 25일 5차 교섭에서 타결될 때까지 노동조합은 꾸준한 현장 활동과 지속적 투쟁 분위기 고양을 통해 요구안을 관철했다. 특히 1992년 연초에 현대자동차 성과급투쟁 여파로 임시휴업 조치까지 내렸던 회사로서는 추가인상에 대한 재고, 성과급 고려 등을 통해 1992년 임금인상 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단결과 투쟁으로 5차 교섭에서 요구안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국후꼬꾸노조는 교섭 시기에 임금인상대책위원회 아래 교섭위원들을 중심으로 ‘합숙위원회’를 설치했다. 함께 숙식을 같이하며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실질적인 임금인상 투쟁 사령부의 역할을 수행, 임금인상 투쟁 전체를 무난히 이끌 수 있었다.
또 4월 6일 임금인상 2차 교섭부터 시작한 족구대회를 4월 17일까지 흔들림 없이 계속해 조합원들의 단결과 자신감을 고조시켰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노조 창립 3주년 기념집회를 힘있게 치러내 조합원들에게는 자신감을, 회사에는 위축감을 주었다.
한국후꼬꾸는 주 2회 화요일과 금요일에 교섭했으며, 4월 27일 임금인상 대책위원회 56차 회의에서 4월 20~29일을 준법투쟁기로 정하고, 4월 30일까지 쟁의발생신고, 5월 12일 쟁의행위 결의 등의 계획을 수립했으나 사측의 대폭적 양보로 조기 타결됐다.
5월 7일 임시총회에서 단협과 임금이 각 73%, 74% 찬성으로 타결됐다. 임금은 기본급 88,500원(일금 2,950원) 인상으로 인상률 23.1%, 요구액 관철률 90.3%에 달했다. 단협에서는 주택자금 대출, 퇴직금 누진제, 근속수당 3,000원 인상, 전임자 2명 확보, 가족수당 개선 등 많은 부분을 쟁취했다.
6월 2일을 전후해 노조는 임금인상 투쟁 평가를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임금인상 투쟁 대책위원회 평가, 조합원 설문 평가, 현장조직별 평가를 진행함으로써 투쟁 이후 있을 조직의 이완과 분열을 조직 내부로 수렴해 내는 모범적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타결 이후에는 파업사업장 지원투쟁 등을 통해 공동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타결 이후 지역에서 사측의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하던 현대기업 지원 집회와 롯데캐논 규탄집회에 많은 조합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롯데캐논노조에는 조합원 차원에서 투쟁기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시기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에도 사측의 전폭적 양보로 공동투쟁이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초기의 교육 등으로 강조된 공동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식이 타결 이후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로 나타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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