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이태원이라는 변방 이태원은 본디 한양에서 숭례문을 나서 삼남으로 가는 이들이 머물러 쉬어가는 곳, 원(院)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부가 운영하는 고속도로 휴게소 정도 될 것이다. 배밭이 많다고 하여 효종 때부터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곳의 이름이 “이타인(異他人)의 동네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기도 한 만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문화 다양성과 퀴어를 상징하기도 하는 동네가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한 후 중립을 지키던 대한제국을 협박해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 주둔지 대상지로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를 지목해 118만 평을 확보, ‘용산군용지’란 이름으로 기지를 세웠다. 이태원엔 소총사격장이 들어섰다. 그곳에 살던 이들은 터전을 잃고 쫓겨나거나 위험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겁탈당한 운종사 비구니들이 살았다는 곳, 청나라에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들의 삶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신용산이 물에 잠기자 그곳을 떠나 효창동과 남영동으로 이주한 일본인에 밀려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 이태원은 전쟁과 제국의 침탈이 만들어낸 ‘변방’이기도 했다.
낯선 이방인들의 땅 한국전쟁 직후 미 8군 사령부가 용산기지를 설치하고, 1957년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가 함께 운영되면서 용산은 동북아지역 미군의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이태원은 기지촌, 상권, 미국식 성문화를 상징하는 곳으로 변하게 된다. 삼각지, 이태원 일대에 기지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7년 한국 정부가 미군기지 주변에 성병진료소를 설치 운영하고 미군 당국이 미군의 외출과 외박을 허용하게 되면서 기지촌은 급격히 번창했다. 1962년 3월 12일 조선일보에는 12살부터 나이 찬 시골 아가씨들까지 서울역에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뚜장이’에 속아 양동, 종삼, 묵정동 사창굴, 아니면 남산을 돌아 이태원으로 가서 국제적 창부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해 7월 19일 경향신문에는 윤락여성자치회 회원들이 현충원 환경 미화에 힘을 쏟았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 자치회는 이태원과 삼각지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윤락여성들의 모임으로 그 회원이 900여 명이라고 소개했다. 많은 수다. 1962년 전국적으로 2만 명 이상의 미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위안부를 국가는 ‘민간 외교관’, ‘달러를 벌이 애국자’라 했고, 일반인들은 ‘양공주’, ‘양색시’라 불렀다. 미군기지의 PX 물품이 기지촌을 통해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다. 운동화, 가죽제품, 양복, 밍트담요 등을 파는 외국인 대상 상가들이 들어섰다. 각종 클럽도 생겨났다. 이태원 일대 클럽에서 노래하는 한국인이 3천 명에 달했다는 데서 그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스트립쇼 같은 성문화도 이태원에서 퍼졌다. 하지만 이런 문화는 그들의 것이었다. 1978년 이태원에 ‘올댓재즈’가 문을 열었지만 한국인 대상의 재즈클럽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이태원은 낯선 이방인들의 공간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1990년대 세계화 물결이 이태원에 변화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세계화와 이태원 문화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시기 이태원은 국제적 상권으로 특수를 누렸지만 1989년 경기침체와 미8군 이전 논의가 시작되면서 불황을 맞았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해외 바이어들이 중국과 동남아 저가 제품을 찾아 옮겨갔고, 그나마 “싸고 질 좋은 모조품”을 찾던 외국 쇼핑객도 줄어들었다. 이태원 상인회가 이태원 상권회복을 위해 발 벗도 나서 판매 품목이나 업종 전환을 시도했다. 외국인 대상 품목에서 보세의류 액세서리, 가방 등을 판매하며 “종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내국인 수요자들” 위주로 품목을 바꿔갔다. 미국, 일본, 북유럽 등에 의류를 수출하던 업체들이 떠난 자리에 국내 신세대 브랜드의 옷가게들이 들어섰다. 여기에 ‘세계화’를 기치로 내건 김영삼 정부가 1997년 이태원을 관광특구로 지정하며 이태원 상권에 부활의 계기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태원 일부와 한남동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식재료 상가, 와인 판매점 등이 경리단길에 들어선 것 이상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태원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이다.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 태국⸱멕시코⸱이탈리아⸱파키스탄 등 이국적 분위기의 식당이 소개되었다. 경리단길을 따라 늘어선 카페와 옷가게도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2012년 세계음식특화거리가 조성되면서 이태원 상권에 불이 붙었다. 이태원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자, 그곳은 점차 문화·경제적으로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이태원이 퀴어 문화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것은 다양성을 지속적으로 들여온 역사적 공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태원,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용산 미군지기, 한미연합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을 완료함으로써 이태원을 비롯한 용산 일대는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변해갈 것이다. 일본군 주둔 이후부터 범접할 수 없었던 곳이 공원으로 바뀔 것이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해방촌과 삼각지 등 용산 일대엔 고층빌딩이 들어설 것이다. 대통령도 이 일대로 행정 공간을 옮겼다. 이렇게 정비되면서 이태원을 비롯한 용산 일대가 망각의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때 운종사 비구니의 슬픈 이야기, 기지촌 여성의 아픈 역사가 잊혀지듯 2022년 현재의 아픔이 빌딩 숲에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참사를 기억할 공간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다. 고베 메모리얼파크에는 1995년 대지진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당시 파괴된 도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곳에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고, ‘용산참사’ 현장 남일당에 빌딩이 섰다. 도심일수록 더 빨리 흔적을 없애거나 후미진 공원에 조그마한 표지석을 세우는 정도다. 그나마 피해자들의 피나는 투쟁이 있어야 대구지하철 참사, 4.16참사의 사례와 같이 기억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10.29 참사가 벌어진 이태원을 영상과 사진 한 장으로 남게 할 것인가. “이태원은 음지라는 느낌부터 든다. 전쟁, 미군, 그들의 섹스문화, 어둡고 담배연기 자욱한 술집, 각종 사건사고, 윤락여성 이런 게 먼저 떠오르니 가까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태원은 개방적이고 이색적이며 심지어 진보적인 느낌이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어울리며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며 퀴어문화의 상징적 공간이다.” 이태원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눠보니 50대와 30대는 같은 장소에 대해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태원이 겪은 역사를 기억하는 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 한국사회는 이태원에 관한 또 하나의 기억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